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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소설] 엎드리지 않는 자 - 운명

지하 정글 곳곳에 숨겨진 수십만개의 노즐이 물안개를 뿜는다. 이파리에 방울이 맺혀 수풀을 헤쳐나가면 흠뻑 젖을 정도였으며 앞을 제대로 내다보기 힘들정도로 뿌연 안개가 꼈다.

"후읍... 하아..."

봉팔은 밀림 한가운데에서 습기 먹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한숨을 짓는다.

'이렇게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신호를 보내지? 게다가,'

봉팔은 지정된 시험장에 도달하기전에 지급받은 산탄총을 불안하다는 듯이 몇번이나 고쳐잡으며 뒤를 돌아본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교단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가 오지 않았을까요, 봉팔씨?"

언더월드 오버턴 광신도 귀부인이 다른 파트너가 머리통에 리볼버를 대고 쏘려던 것을 실린더를 꽉 쥐어 막음과 동시에 봉팔에게 넌지시 미소를 보이며 포교의 신호를 보낸다.

"그만... 이 이상 더 하고 싶지 않아..."

휴게실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도 더 이상 아프기 싫다는 둥 하던 정신적으로 힘들어보이던 남자는 귀부인의 제지에도 방아쇠를 힘껏 누르며 당겨봤자 죽지도 못할 짓을 하려한다

"예성 씨, 어차피 그걸 머리에 쏴도 죽지 않을 거잖아요. 라은 씨, 자해를 막아주시는 건 정말 고마운데다 당신을 독에 마비시켜버릴 정도의 이야기라면 흥미롭긴 한데, 부디 시험장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그래도 제가 리더 노릇을 한다는 게 감지덕지긴 한데"

"객관적으로 보면 당신이 제일 낫죠."

귀부인, 라은은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대답한다.

"음, 이 남자는 제가 처음 만났을 때도 죽겠다느니 타령을 했고요. 저는 누군가를 지휘할 자신이 없으니, 가장 먼저 지시를 내렸던 당신 밖에 없죠."

봉팔은 조가 배정되고 대면했을 때 순간을 떠올린다. 보급품이라고 산탄총, 알루미늄 방망이, 리볼버를 툭 던져주는데, 예성은 죽겠다며 읊주리며 덜덜 떠는 손으로 리볼버에 탄환을 우겨 넣었고, 라은은 야구 배트를 어깨에 얹어두고 운명이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느니 타령하는데 가장 먼저 행동했던 건 봉팔이었다.

"선택권이 없긴 했죠."

"그런데, 어디로 가는거죠? 여기에 같이 왔던 분들을 찾는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어쨌던 지정해준 시험장을 이탈한단 얘긴데, 시험을 제대로 치룰 맘이 없으신가봐요?"

라은이 말을 마치는 순간 모자 챙 끝에 달린 해골 장식에서 방울이 떨어진다.

"... 네."

봉팔이 잠시 주저하다 대답하는 그 순간 안개 저편에서 쇳덩이가 찰칵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대비하세요!"

봉팔은 외침과 동시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총구를 들이댔고 라은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예성에게서 리볼버를 빼앗아든다. 안개 너머로 뭔가 애매한 형체가 보이자 봉팔은 황급히 견착하여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늑대를 본딴 것 같은 주둥이가 그를 덮치려든다.

쾅하고 귀를 때리는 총성과 함께 봉팔을 해치려고 달려든 기계 늑대는 머리가 반쯤 날아갔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속도를 늦추지 못해 봉팔의 옆을 빗겨지나가 몇바퀴 구른다.

'뭔가 구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래서, 아까 얘기를 계속하자면"

봉팔이 쭈그리고 앉아 기계 늑대에서 부품을 뒤적대는 동안 라은이 입을 연다

"도와드리죠. 포교를 거부할 권리가 있듯이 이 시험을 거부할 권리도 있을거에요."

"캐물어본 거 치곤 스무스 하게 넘어가시네요. 근데... 라은 씨가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거에요?"

라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야구 배트를 몇번 붕붕 휘두르다 어깨 위에 얹어둔다.

"운명 같은 걸지도 모르죠. 사실 저도 다 아는 게 아니에요. 교단은 단지 이승과 저승이 뒤바뀔거라는 사실만을 믿고 있다는 거죠."

"그만, 됐어요. 더 말했다간 또 뻗습니다."

봉팔이 일어서며 답한다.

"좋아, 그 고릴라랑 다르게 폭발물은 없는 거 같고."

'그래도 쓸만한 부품은 없는건가, 계속 움직일 수 밖에 없군.'

봉팔은 고민하던 중 라은의 뒤에서 쓰러진 채로 울며 부들대는 예성을 힐끔 쳐다본다.

"라은 씨, 예승 씨 들춰매고 움직여주세요. 도움이 안돼도 그냥 두고 갈 순 없어요."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네요."

라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봉팔의 지시에 따라 예성을 왼쪽 어깨에 들춰맨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끝장내... 이만 끝내라고!..."

"아무래도 총을 맞길 상태는 아닌 거 같네요. 리볼버도 제가 맡죠."

봉팔은 라은에게 리볼버를 건네 받는동안 잠시 생각에 빠진다

'민철씨와 연희씨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혹시 망설이는 거라면, 어차피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운명인거에요."

라은의 조언에 봉팔은 실소하며 대답한다.

"운명 뿐만은 아니죠. 내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거에요."

"이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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