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 몇년간 나의 마음에 안식처가 되어준 곳에 나는 손을 뻗었다. 바로 가챠게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의 한정 카드를 얻기 위하여 나는 작년 10월부터 모아온 재화를 전부 쏟아부었다. 그리고 난 내가 원하는 것을 건지지 못했다.
머리칼을 잘려버린 삼손의 무력함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거의 일주일을 현탐에 사로잡혀 살아갔다. 그동안 해온게 있어서 더 가자니 이젠 정말로 무리가 오고, 그렇다고 그만두기에는 쌓인 것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며칠을 현탐에만 빠져있던 중 강희자전과 감투가 생각났다. 화자가 강희자전을 서점에 팔았는데 서점 주인은 강희자전을 화자가 판 가격보다 바가지를 씌워서 팔려고 했다. 자신이 돈을 들여 강희자전을 산 만큼 더 이득을 얻고 싶었으니까.
그 뒤로는 매관매직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감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화자는 논했다. 감투는 돈으로 매길 것이 아니라고. 감투라는 것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고 했다. 감투에 값어치가 생긴다면 감투를 쓴 뒤 돈이 되었건 다른 무언가가 되었건 감투에 쓴 값어치만큼의 무언가를 자기 주머니로 긁어모으려고 할 테니까.
그렇다면 그 한정 카드는? 본디 내가 보기에 한정 카드라는 것은 값어치가 매겨질 만한 것이 아니다. 한정 카드라는 것은 사람의 정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서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는 이미 온 지가 오래되었다.
감투를 사는 사람이 그 감투를 쓴 뒤 감투를 가지고 저 땅끝까지 갈퀴로 돈을 긁어모은다면 나 또한 그 한정 카드로 그만큼의 값어치를 할 정도로 사용할 것이었다.
그 한정 카드로 라이브를 돌리고, 그 한정 카드로 이벤트를 뛰고, 그 한정 카드의 이벤트 커뮤를 보고, 그 한정 카드의 일러스트를 보고, 그 한정 카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상을 입혔을 것이다.
내가 사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이거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난 그저 사랑을 갈구할 뿐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액정 안에 곱디 곱게 포장된 재화 n만개만큼의 사랑이다.
나의 사랑이란 참으로 비루하다. 내가 본 사람들은 나를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나도 내가 본 사람들을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하여 나는 굶주려만 있었다.
그렇게 굶주리다가 찾은 것이 가챠 게임이었다. 통조림 속의 사랑을 파는 장소. 일러스트의 향기는 강렬하고 감정선의 맛은 날카로운 사랑을 파는 장소. 가챠게임은 결국 사람의 정서에 기반한 장사다. 절대 안 망할 것이다. 감정에 값어치를 매겨서 팔고 있으니 어찌 망할 수가 있을까.
결국 상술이다. 그렇기에 가챠 게임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돼지 흑우라고 자조하고는 했다. 내가 되어보니 알 수 있었다. 오타쿠들이란 가챠가 상술이란걸 모를 만큼 멍청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상술이란 걸 알면서도 그걸 원할 뿐이었다.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고 한정 카드가 필요했으니까.
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다. 정서적인 지지가 필요해서 그 지지를 상술에 의지해서라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입장이 되니 딱히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 물질로만 살 순 없으니까.
물질적인 장사도 있으면 정서적인 장사도 없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직접 아무것도 없는 내 마음 속 사막에서 장미 하나 키우겠답시고 어린왕자 놀이나 하는 것보다는 그럴싸한 꽃동산에 돈 주고 놀러라도 가는 게 편하고 쉬웠다.
그런 거라도 없으면 못 살아먹을 지경이었던 저는 그놈의 흑우가 되었고, 개돼지가 되었다. 나는 종잇 속 아이들의 생계를 챙겨주고 싶었고, 챙겨주곤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안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건 그렇게 많지가 않다. 나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는 사실과 이제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몇년이고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나는 그 쥐뿔도 안되는 값어치만큼의 사랑이 필요할 뿐이었는데, 이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결국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의 소중한 값어치는 그대로 사라졌단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