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에 취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는 기운은 스테이크보다 사람 목을 더 쉽게 썰어제끼던 암살자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이 미친 새끼가!"
시퍼런 칼날은 당장이라도 피를 갈구하는 것처럼 더욱 빛을 냈지만, 미동도 없던 쇠붙이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떨림에 봉팔은 자신이 원하던 진실에 거의 다 왔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한봉팔의 머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말을 해야 저 아이, 아니 저 자에게서 진실을 얻을 수 있을까? 무작정 내가 찾던 걸 달라고 하면 저 쇠붙이의 떨림에 내 목이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이미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냥 말없이 태워준다고 나를 또 찾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온갖 생각이 넘실대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목에 겨눠진 칼날에서 익숙한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아아... 이 냄새를 잊을 리가 없지...
"앰비벌런스(ambivalence), 하나처럼 보이는 세상에 섞인,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들을 상징하는 말이죠. 아버지가 피던 담배 이름이기도 하고요. 20년 전에 단종된 담배 냄새가 여기에서 날 줄이야... 열 살 꼬마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네요."
봉팔의 말과 동시에 칼날은 더 깊이, 경동맥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면서 칼에서 느껴지던 떨림도 사라졌다. 내가 잘못 말한 건가? 내가 저 사람의 살의만 더 돋워버린 꼴이 된 건가? 진실이 눈 앞인데, 이걸 이렇게 놓칠 수는 없는데....
"추리력이 꽤 좋네. 네 목숨이 어떻게 될 지는 하는 말을 듣고 결정하지. 어차피 법망이 보호할 수 없는 택시니까" 독한 냄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꼬마의 앳된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서슬퍼런 칼날도 목에서 멀어져갔다.
떨림이 사라진 건 죽이겠다는 결의가 아닌 체념이었던 것이다. 이미 들켰다는 것에 대한 체념 말이다. 이제 적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주면 난 진실을 얻을 수 있겠구나!
온 몸을 휘감는 희망과 함께,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진실을 여는 열쇠가 한봉팔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불법택시를 운영한 이유가 바로 당신같은 분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나라는 필요없는 사람들한테는 서슴없이 죽음을 권하면서, 정작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필요하다는 이유로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했죠. 국가를 위한다는 신기루 같은 명분으로 말이죠. 저는 그런 분들과 만나서 꼭 돕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한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자기가 하는 말이 더 신기루 같은 것인 걸 알면서, 진실을 알기만 하면 끝이라던 평소의 생각과는 완전히 딴 판인 거짓말이 주르륵 엎어지듯 나왔다. 확실히 주워담기는 글르긴 했지만, 어차피 아는 걸로 끝나면 아버지 마중가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차라리 이렇게 엎어버리는 게 나았으리라.
"..." "..."
멈춰버린 차와 함께 죽음을 불러오는 듯한 침묵이 차 안을 휘감았다. 마치 모든 시공간이 같이 멈춘 것처럼.
"차 돌려. 돌아간다."
봉팔이 원하는 말이 바로 나오진 않았지만, 침묵을 깬 꼬마의 말이 자신이 원하는 진실로 다가가는 시동버튼임은 분명했다.
"탑 시크릿으로 모셔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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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고작 그런 말에 낚여서 근본도 모르는 잡놈을 데려왔다고?"
봉팔은 여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번 슈퍼사이즈 버거세트만 사던 이 여자가 설마 내가 찾던 그 사람이었다고? 세상 참 좁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야야야,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딨냐? 얘도 어디선가 들은 게 있으니 그렇게 말했겠지."
"아니 진짜 계산이 안 되면 나한테 전화라도 하던가!"
"도청을 안 하는지 도청하는데 모른 척하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 인마! 걸리면 책임질거냐?"
둘의 짧은 말싸움을 들으며 봉팔은 드디어 진실의 종착지에 다다랐다는 확신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내가 찾던 죽지 못하는 사람들이구나!'
인생의 숙원을 해결한 감동에 벅찬 마음이 가득해진 그에게, 오연희라 불리는 여자가 말을 꺼냈다.
"야. 너는 못 죽는 사람 아니지? 그럼 우리 좀 도와줘야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