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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아직 완전히 애인이라고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지인보다는 가까운 사이를 소위 썸이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나는 동갑의 대학 동기와 썸을 타고 있었다. 수연씨는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서 대학을 쉬다가 복학을 했다. 나도 국가의 부름으로 몇 년 학업과는 거리를 두다가 복학을 하긴 했으니, 적어도 내가 다니는 과에서 수연씨와 동갑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난 수연씨를 수연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다른 호칭으로도 부르지 못했다. 그저 수연씨라고만 불렀다. 수연씨는 별을 단 장군의 따님이었고, 그저그런 수저를 물었던 나와는 밟고 있는 계층 자체가 달랐다. 같은 것이라고는 가방끈 길이와 나이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그런 단순한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것일까. 수연씨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성실하여 교수님과 학우들의 평판도 좋았다. 그래. 수연씨는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난 아니었다. 난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수연씨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썸을 탄다고 해서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수연씨는 수연씨대로 바빴으니까. 그러다가 곧 축제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이번만큼은 함께 지낼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씨는 모처럼 축제니 오늘만큼은 졸 놀자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축제는 늘 그렇듯이 시끄럽다,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갓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한 자유의 영혼들이 다들 술을 컵째로, 좀 시간이 지나자 병째로 입속에 들이부었다.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있으면 빨리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

"팀의 체력을 책임진다! 인간성기사 뿌뿌뿡!!! 뿌뿌뿌뿌뿌뿌뿡!!!!!!“

"......"

이런 난장판 속에서 수연씨는 딱히 아무런 말도 없이 날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면서 조용히 잔을 비우고 있었다.

"수연씨.”

“네?”

“...아니에요. 그냥 불러봤어요.”

”에이.“

“...그냥 수연씨가 너무 예뻐서 불러보고 싶었어요.‘

평소의 수연씨는 예뻤지만, 술김에 바라본 수연씨는 예뻤다. 예쁘고 친절하고. 수연씨같은 분이랑 진정으로 이어진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연씨의 연인이 된 그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잔뜩 취해 있었다. 몸을 못 가누거나 걸으면서 비틀거릴만큼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요상한 기분이 되어 아무 때나 허공에 대고 큰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곁에 있는 수연씨가 어느 정도로 취했는지 가늠을 하지 못할 만큼 취해 있었다.

"으으으음... 흐끅. 수연씨. 집이 여기서 어느 쪽이에요?"

"어디인진 알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진 모르겠어요..."

"걸어서 거기까지 같이 바래다 주게요?"

"물론이죠. 전 수연씨같은 귀중한 몸을 혼자 집에 가라고 하는 매정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귀중한 몸이라니. 하하."

아마 난 수연씨도 그때 나만큼 취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연씨는 잔뜩 붉은 얼굴로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씨의 웃는 얼굴은 귀중했다.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쳐다보는 것 자체가 행운이란 생각이 들 만큼.

수연씨는 표용력이 넘치는 사람이다. 아무리 내가 공감대가 있는 사람에다가 소위 말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수연씨는 술 취한 남정네를 곁에 두고도 얼굴을 찡그리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수연씨."

"네?"

"수연씨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다닌 것 같아요. 사람을 잘 믿는걸 보면요."

"어머. 제가 무슨 진짜 천사라도 되는 줄 아나. 저 아무 사람이나 막 믿고 다니는 사람 아니에요."

수연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밤공기가 추운지 따뜻한지 잘 모를 지경이었지만 수연씨의 손이 내 손보다 따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제가 왜 휴학했는지 말 안했죠? 사실 지금도 말하는 건 좀 어렵긴 한데 꼭 군대에만 사람 쏘는 총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 몇 번 맞아보니까 잘 알겠더라고요. 아무튼, 전 누굴 믿을지 안 믿을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철썩같이 믿잖아요. 저는 갑자기 발정이 나서 수연씨를 덮치거나 하는 희대의 악인일지도 몰라요? 지금까지의 착한 모습은 다 위선에 연기인 형편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런 말을 하는 것 부터가 믿을만한 사람이란 증거에요. 이미 나쁜 마음을 품었으면 진작에 이상한 짓을 했지. 이런 말은 안 했을 거 아니에요. 하늘씨."

진작에 이상한 짓을 했다? 수연씨는 나 스스로보다도 더 나를 믿고 있다. 내가 그런 착한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빌고 싶다.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수연씨는 날 보고 웃어주었다. 너무나 미안하게도, 그 웃음 때문에 나는 좀 더 울적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수연씨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약간이나마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기분이 들 적,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연씨도 나도 우산은 없었고, 어딘가에 비를 피할 만한 무난한 장소도 없었지만, 지금 난 딱히 그 비를 피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비를 맞을 만큼 맞아서 추운 몸으로 이부자리에서 베게가 비에 젖는건지 눈물에 젖는건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얼어붙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수연씨가 비를 맞는건 좀 많이 별로였지만. 수연씨의 집은 좀 멀리 있었다. 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그리고 수연씨나 나나 운전면허는 있었어도 가진 차는 없었고, 있었어도 거나하게 취해서 운전을 한다면 사고가 나도 크게 날 것이 분명했다.

비를 피할 곳이 딱 한 곳 있긴 했지만...

"저, 비가 계속 오잖아요. 어떡할래요? 근처에서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릴까요?"

"우리 집이 여기서 가깝긴 한데... 아니, 아니에요."

"네? 그럼 거기서 피하면 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사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지금까지도 그 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나 수연씨가 비를 맞는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실례합니다..."

내 방은 누군가를 모시기에는 누추하고 남루한 방이었다.

"방이 좀 어지럽죠? 미안해요. 방 청소를 좀 했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미안해요."

집에 오자마자 나는 아직 비에 젖은 머리칼을 말리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누추하고 남루한 곳이라고 해도 내가 사는 곳이라 긴장감이 팍 사라졌던 걸까.

"저, 춥지 않아요?"

"네? 하하. 전 괜찮아요."

"전 좀 추워서..."

"아. 그, 덮을 담요라도..."

"혹시 갈아입을 옷 같은거 있나요?"

"...네?"

"좀 씻고 싶어서..."

난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자는 건 좀 그래서... 싫으면 말고요."

"아, 아뇨. 그, 싫다는 건 아닌데, 그..."

"아? 아하하하. 괜찮아요. 아까 전에 말했잖아요. 하늘씨는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나라면 믿을 수 있다. 하늘씨라면 괜찮다...

나는 안 괜찮다. 수연씨가 이렇게 내 집에 와서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이 떨떠름하다. 아니, 떨떠름하다는 말의 경계를 벗어날 만큼 수연씨의 상냥함은 내 마음 속을 버석버석 밟고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수연씨가 날 믿어준다는 사실은 늘 기뻤고 든든했지만, 나를 이렇게나 진심으로 믿어준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우면서도 내 숨을 무겁게 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입 밖으로 홀로 맴돌기 시작했다.

수연씨가 나에게 기대고는 있지만, 내가 수연씨를 짐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짐이 된다면 내가 수연씨에게 짐이 되었으면 되었지.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작자를 이다지도 믿어주다니.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수연씨였지만, 알몸으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나였다. 이 곳의 주인은 나였지만 아무 말도 없이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비바람이 부는 길바닥에 누워 노숙이라도 하고 싶었다.

물이 솨아아아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훨씬 전부터도 나는 절대로 앞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주저앉은 채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저, 하늘씨. 이제 눈 뜨셔도 괜찮아요?"

"아...?"

수연씨는 자신의 사이즈에 맞지 않아 하늘거리는 와이셔츠와 츄리닝 바지 한 벌을 입고 내 앞에 와 있었다. 묶은 머리도 같이 풀었는지, 평소에는 머리를 묶고 다녀서 볼 수 없던 기다란 머리칼도 바짓단 옆으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수연씨가 옷을 입은 윤곽은 사복을 입을 때와는 달랐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온 몸의 둔덕이 옷 너머로 그대로 드러났다. 수연씨는 말 그대로 옷 한 벌만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내 옷을. 이를 눈치챈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수연씨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서 도망치듯이 갈아입을 옷만 문 앞에 두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물은 평소에 트는 것보다 뜨겁게 틀었다. 가장 겉부분의 살갗부터 시작하여 시작해서, 그 밑의 지방까지 녹아내리고, 근육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고, 그 뒤로는 뼈가 하늘하늘 가루로 휘날려서, 완전히 내 몸이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까지, 난 뜨거운 물을 틀어댔다.

"......"

잔뜩 얼굴이 붉은 채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얼굴이 붉은 게 단순히 취해서 그렇다거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건 틀림없이 지금의 수연씨가 학교의 모두가 선망하는 수연씨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수연씨는 엄친아가 아니다. 부족할 것 없는 가정환경을 타고나서 미모도 좋은데 학업도 출중한 그런 도덕책에 나올 법한 사람이 아니다. 외간남성의 집에 와서 옷을 팔랑팔랑할 정도로만 차려입은 한 명의 성인 여성일 뿐이었다.

아무리 썸을 탄다고 해도 나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 상호간의 믿음과 선을 지키고 서로가 서로를 믿을만한 사이로 지내던 사람이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피상적인 접점은 뒤로 접어놓은 관계.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건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마음 속 불씨가 싹텄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불씨는 더 커지면 아무리 바람이 크게 불어도 꺼지지 않을 화마가 될 불씨였다.

눈 앞에 있는 꽃을 손으로 꽉 움켜쥐고 짓이겨 안의 꿀을 탐하고픈 저열한 욕망. 그 꽃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무책임한 욕망. 나는 그런 욕망을 자제할 만큼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의 최선은 욕망이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고, 수연씨와 최대한 떨어지는 것이었다.

비는 그칠 기미는 커녕 더욱 더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분명 집 안인데도 비가 세차게 오는 소리가 창문과 벽을 잘도 넘어오는 것을 보면 오늘 안에 비가 그치기는 글른 것 같았다.

수연씨도 분명 비가 그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겠지.

"저, 수연씨. 어떻게 하실 거에요?"

"비가 아무래도 안 그칠 것 같죠? 어쩔 수 없나... 혹시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을까요?"

"아, 네. 네..."

방에는 침대가 버젓이 있었지만, 수연씨가 침대에 있는 걸 보고 난 아무 말 없이 여분의 담요랑 이불을 깔고 바닥에 누웠다.

"하늘씨. 참대에서 안 잘 거에요?"

"아뇨. 괜찮아요. 전 바닥에서 자야죠..."

"네? 그렇지만 하늘씨도 비 다 맞고 왔는데..."

"전 손님을 바닥에서 재우는 그런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이 말은 핑계다. 당연하지만 난 떨어져서 자야 했다. 혹시라도 모르는 일을 위해서 나는 나를 최대한 경계해야 했고, 나를 최대한 구석으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하늘씨."

"네?"

"그거 알아요? 지금 하늘씨가 평소랑 엄청 다르게 보인다는거?"

"다르게 보이다뇨?"

"갑자기 저랑 계속 거리를 두고, 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잖아요. 저한테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마냥."

"...미안해요. 지금은 도저히 수연씨랑 눈을 마주칠 기분이 아니에요."

"어째서요?"

"...수연씨는 좀 추하고 구질구질하지만 솔직한 이유가 좋아요? 아니면 무난한 가짜 이유가 좋아요?"

"둘 다요."

"그럼 무난한 가짜 이유부터 말씀드릴게요. 제가 바닥에서 자면 침대가 더 넓으니까 수연씨가 더 편할 거 아니에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요?"

"...지금 이 상황에서 같이 잔다면 수연씨한테 이상한 생각을 품을 것 같아요."

샤워를 하고 나서 잠기운까지 같이 와서 그런 것인지 진심을 말하는 건 의외로 쉬웠다. 수연씨는 날 믿고 있었으니까. 내가 수연씨를 그런 눈으로 바라봤다는 걸 알면 경멸할지도 모르겠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관계가 모두 단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였다. 나에게 내가 져 버리는 것. 오로지 지금의 내가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욕망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 더더욱 두렵고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상한 생각이라는 게 뭐에요?"

"그게 무엇이든간에 수연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 발짝은 앞선 거요."

"손 정도는 같이 잡아도 괜찮지 않아요?"

"그 정도로 안 끝날 것 같아서 무서운 거에요..."

"...아까 밖에서 걷고 있을 때, 저를 덮칠지도 모른다고 했죠?"

갑작스럽게 날아든 수연씨의 질문은 내가 답하기에는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하지만, 날카로운 질문과는 달리 수연씨의 눈빛은 늘 그랬듯이 부드러웠다. 아니, 수연씨의 눈빛은 평소보다도 더 부드럽고 선명해서... 난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

"네..."

"사실 그때 하늘씨라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수연씨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어째서...?"

"하늘씨니까요."

"안 돼요..."

"왜 안 돼요?"

"전... 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수연씨랑 저는... 아직까지는 그럴 만한 관계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진짜 이유는요?"

수연씨의 따뜻한 눈빛을 바라보고 나니,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이젠 나도 몰랐지만 멈출 수 없는 말은 입에서 잘도 흘러나왔다.

"전... 전 수연씨 같은 분의 곁에 있어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요? 왜!? 하늘씨가 저보다 못난게 뭐가 있어서요?"

"수연씨는 제게 없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걸요."

"하늘씨에게 없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뇨?"

"수연씨가 가진 건... 그, 그게..."

"적당히 얼버무리면 저 화낼 거에요?"

수연씨가 가졌으면서도 나는 못 가진 것? 너무 많아서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이 결핍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고귀함.

고귀함이라는 것은 사람이 갈고닦을 수 있지만 어느정도는 고귀함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수연씨는 진정으로 고귀함을 타고난 사람이다.

단순히 수연씨가 나보다 지체가 높다거나 다른 누군가를 매료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 수연씨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 나랑은 밟고 있는 층계 자체가 다르다. 그럼에도 나를 믿어주고 나의 말대로라면 기꺼이 그 층계를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만약 혐오스러운 악마고 구역질이 나는 아가리를 위장한 채로 수연씨에게 내가 사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면 수연씨는 흔쾌히 내가 오라고 하는 곳에 들어갔을 것이다. 악마의 역겨운 아가리 속으로. 내가 강권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 자신만의 의지로.

수연씨는 그렇기에 진실로 고귀한 사람이다. 수연씨가 가진 고귀함이란, 나는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그런 것이다.

"...수연씨는 저에겐 없는 고귀함이 있어요. 수연씨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에요."

"고귀함이라뇨?"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읽어보셨나요?"

"아뇨."

"데미안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데미안 이야기를 시작했을 적. 수연씨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수연씨는 알을 깰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저같은 사람의 말만 믿고도 기꺼이 예전의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고귀함은 그런 거에요. 수연씨는 저만을 믿어줬잖아요."

수연씨는 내가 보기에도 괜찮나 싶을 만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수연씨는 날 보고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아니. 역으로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만 했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내 손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그렇기에 지금은 아무리 수연씨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그것 뿐일까? 내가 늘어놓은 것들을 금빛으로 치장해도 부족할 것 같았다. 진짜 금을 내면에 지니고 태어나서 금이 무엇인지 아는 수연씨와는 다르게 나는 금이란 게 무엇인지 모른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금빛만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있잖아요? 그냥 솔직히 겉모습부터 말할게요. 수연씨는 웬만한 남자들은 감히 다가오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워요. 거기에다가 목소리도 미성인데 몸매까지도 대단한걸요. 하지만, 이제부터 그런 건 말하고 싶지 않아요.

"......"

"수연씨는... 아니. 전... 제가 수연씨랑 반대였다면, 전 수연씨처럼 못 했을 거에요. 전 그럴 수 없어요. 수연씨가 제게 손을 내밀었다면 그 손을 뿌리쳤을 거에요."

"어째서요?"

"수연씨를 못 믿었을 테니까요. 전 그릇이 아주 작고 이기적인 사람이거든요."

"거짓말."

"거짓말이면 좋겠어요. 저도 제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말이면 좋겠어요..."

"하늘씨가 먼저 저에게 대학생활 힘들지 않냐고 손을 내밀어줬다고요!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하늘씨도 제가 하늘씨를 믿는 것 만큼이나 절 믿어줬잖아요?"

"......"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냥... 그냥... 아니에요. 아무말도 안 했던걸로 해 주세요. 제 말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그게 아니에요."

수연씨는, 내 한쪽 손을 더 꼬옥 부여잡은 채로 남은 한 손으로 푹 숙인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난 수연씨의 눈빛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시야 구석에 보이는 수연씨의 눈빛이 늘 보여줬던 따스한 눈빛도 화난 눈빛도 아닌 슬픈 눈빛이라서 난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흡!?"

한순간이었다. 수연씨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입술을 그대로 가져가버렸다.

갑자기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던 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수연씨의 얼굴로 가득 찬 내 눈 앞은 눈을 감지 않았는데도 껌껌해졌다. 암흑 속에서 나의 눈은 눈물만을 계속해서 흘렸다.

수연씨의 입술에선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술 냄새 뒤로는 내가 샤워실에 갖다놓은 별 향취도 없는 비누 냄새. 그 비누로도 지워지지 않은 향수 냄새, 그 향수 냄새로도 가려지지 않은 수연씨의 체취가 한데 몰려와 내 얼굴을 얽메어와서 머리가 이상해질것만 같았다.

"푸핫..."

"하아... 키스는 처음이죠?"

"......"

"...말을 안 하는 걸 보니까 나 몰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품었던 건가요?"

"처음... 이에요."

"후훗. 역시. 저도 처음이에요... 기뻐라..."

"수연씨..."

"저를 지금까지 계속 거부했으면서... 이번만큼은 절 거부하지 않네요."

"제가 언제 수연씨를 거부랬다고..."

"지금 웃는걸 보면 저랑 이어져서 기뻐보이는 것 같은데... 왜..."

"아니에요. 무작정 기쁜 게 아니야. 무작정 기쁘기만 한 게 아니야..."

"하늘씨는 제가 싫은 거에요?"

"수연씨가 싫은 게 아니에요. 제가 싫은 거에요."

나는 몰려 있었다. 절벽 끝까지 몰려 조금만 더 몰린다면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만 같이. 하지만 설사 뛰어내린다고 나는 절벽 밑에 쳐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로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날개가 돋아서 저 하늘을 잠깐이나마 날았을 것이다. 그 날개가 벌새의 것처럼 작은 날개라도.

"그, 그게! 그, 제가, 제가 스스로를 싫다고 한 건... 제, 제가 너무 싫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수연씨에 비해서 저는 너무 작고 초라한 존재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작아지는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제가 수연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닌것만 같아서..."

"그렇게까지 말 안해도 알아요."

"수연씨는 가끔씩 다른 분들한테는 안 보여주고 나한테만 보여주는 웃음을 짓거든요. 지금도 그 웃음을 짓고 있어요. 저는 그 웃음이 좋아요."

"하늘씨는 항상 제 웃음을 좋아했잖아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그냥 좋은 게 아니에요. 지금은 지나치게 좋다고요. 전, 전 수연씨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여자로서의 수연씨는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여자로서의 수연씨는, 제가 생각하던 것 보다도 너무나도 친절하고, 완벽해서... 그냥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막 행복한데, 그런데도 어떻게 다가갈 수가 없어서... 하핫..."

"하늘씨는 지금 이 상황이 싫어요?"

"...모르겠어요."

"하늘씨는 제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없어질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아니, 앞으로도 못 해요. 하기 싫어요... 하기 싫어요...! 그런 생각 하기 싫어요!"

수연씨의 상냥함이, 내 마음을 잘근잘근 밟아놓은 상냥함이 한 번 균열을 만들고 나니 내 입술 밖으로는 있던 마음도 없던 마음도 완전히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저, 수연씨. 저 지금 이상하게 보이죠? 입은 계속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눈물만 계속 흘리고, 그러면서 뭘 물어보기만 하면 모르겠다고만 하고..."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저도,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거에요?“

”저에게 이렇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다가와준 누군가는,,. 사실 하늘씨뿐이였어요.“

”...네?“

”나머지는 절 그냥 보고만 있는 거에요. 그냥 절 보고만 있고, 부러워만 하고, 아니면 질투나 하고, 아니면 그냥 예쁘다느니 되도 않는 칭찬이나 하며 한번 사귀자고 들이대기만 하고... 하늘씨처럼 절 대해준 분은 없었어요. 단 한 명도.“

”...정말요?“

”그럼요.“

”아... 수연씨...“

”이번 건 말하면 좀 기분나쁠지도 모르지만, 말해도 될까요?"

"...수연씨가 하는 말 중에서 기분나쁜 말은 없어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머리가 어지러워서 수 많은 말들 중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 말 한마디 만큼은 단언코 진심이었다. 아무리 수연씨가 나쁜 말을 한들. 설사 수연씨가 지금 여기서 날 쫓아낸다 한들 무엇이 슬프고 불쾌할까.

"사실은... 하늘씨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살짝 기뻤어요."

"네?"

"하늘씨, 그거 알아요? 하늘씨는 저한테 알게 모르게 계속 거리를 뒀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절 신경쓰지 않는 걸까 싶어서 살짝 슬퍼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서.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저를 훨씬 더 신경써줬으니까... 엄청 기뻤어요."

"저도... 저도 기뻐요."

"전 하늘씨가 그렇게 마음 속에 여러가지를 품고 있는 것도 몰랐어요. 어느정도 저항감이 있었단 것도. 그런데,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면 저도 슬퍼야 정상인데..."

내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돌려도 날 계속 바라보고 있던 수연씨는 말꼬리를 살짝 떨며 잠깐 고개를 숙였다. 순간이 멈춘 그 잠시기 자닌 뒤 다시 고개를 든 수연씨의 눈 속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수연씨가 나로 인해서 눈물을 품었다. 나로 인해서...

"어째서인지, 평소에 그렇게 든든해보였던 하늘씨가 그렇게 힘들어하는게 다름아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기쁜 거 있죠.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절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저만이 하늘씨의 그런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움직이지도 않고 날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에만 열중하던 수연씨의 눈물은 더욱 더 차올라서, 조금만 더 있으면 눈물이 또르르 흘러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수연씨의 이야기를 못 듣고 침몰해버릴것만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난 수연씨의 눈물을 대신 훔쳤다.

"저도... 저도 하늘씨가 생각하는 것 만큼 착한 여자가 아니에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사실은 저도 좀 나쁜 여자라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수연씨의 눈물이 고인 얼굴 앞에 맨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 나를 보며 수연씨가 답례로 해준 웃음이 스쳐지나간다. 수연씨는 말했다. 나 때문에 아파해서 기쁘다고? 그래. 그럼 얼마든지 아파하고 울고 말 테다.

"저, 저 지금 하늘씨한테서 굉장히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

"무슨 말인지는 하늘씨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네... 네. 수연씨..."

마지막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뱉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마음 속의 목책을 결딴내버릴 불길이 내 입안을 맴돌고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것을 모조리 붉게 물들여버릴 시뻘건 불길이.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내가 이 불길을 잠재우는건 불가능했다. 이 불길이 잠자코 사그라지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으니까.

"좋아해요...!"

"...!"

"좋아해요! 엄청! 저도 수연씨가 원한다면 지금 제가 딛고 있는 세계를 미련없이 깨트릴 만큼! 그 대가로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제 것이 아니게 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수연씨를 좋아한다고요!"

그렇게 외치고 나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 뒤 이미 오래 전부터 불길 속에 빠져들어갔던 수연씨의 품을 껴안았다. 이미 손을 뻗기 시작했을 때조차도 잠깐의 주저가 날 잠시 막았다. 내 마음속의 불길이 날 시뻘겋게 태우고 있었지만, 지금 수연씨를 껴안아버린다면 나 뿐만이 아닌 수연씨까지 완전히 불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수연씨는 그래도 괜찮다고 해줄 것이다 하는 답이 나온 뒤엔 이미 수연씨의 입술을 품은 뒤였다. 모든 냄새가 그대로였다. 술 냄새, 향수 냄새, 비누 냄새, 수연씨의 체취... 모든 것이 변치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

행복? 난 지금 내가 행복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새는 없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 수연씨를 필사적으로 갈구하고 있었고, 수연씨 또한 날 필사적으로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수연씨의 구석구석까지가 전부 다 나의 것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수연씨도 마찬가지였다.

창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타 사이트에 올린 아이돌마스터의 2차 창작 팬픽을 여기에 맞게 정황이나 인명 등을 수정하고 올린 것입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고칠게요.

첫 문장에 원래 동갑이라고 써야 할 걸 연상이라고 썼군요. 정신줄을 놓았었나 봅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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