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집에 놀러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친구가 돼지를 잡았다며 돼지고기 한덩이를 가져오셨는데, 집에서 잡아서 그런진 핏물에 질척이고 껍질이 제법 누랬다. 어떤 부위냐고 물어보니 아버지는 잘모르겠다고 하며 알아서 한번 조리해보라고 말씀하시길래, 아버지 고향이 제주도였던터라 경사가 있다하면 돗 잡는다 하며 돼지를 해먹은 전통을 생각해 수육을 한번 만들기로 했다. 고기를 살펴보려 두 손으로 고깃덩이를 움켜잡아보니 껍질에서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지는게, 정말로 집에서 잡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표면의 털이 깔끔히 제거되지 않아, 마치 털보의 면도 하고 하루 지난 턱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여기서 추가로 면도를 하지 않고 방치한 체 그대로 물을 담가 피를 빼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수시간이 지나서 커다란 냄비에 물을 붓고 고깃덩이, 청양고추, 통양파, 통마늘, 말린 생강 조금, 된장 한스푼을 넣고 30분을 강불에 끓이고 또 30분을 중불에 끓이고 꺼내보니, 그 비주얼이 찝찝했던 부위 불명의 돼지고기는 훌륭한 수육이 되어 나왔다.
하지만 몇 점을 썰다 보니 갈색 빛으로 익은 껍질에 털이 도드라졌고, 두어점을 집어 입에 넣어보니 틀림없이 훌륭한 수육이었지만, 턱수염 같은 털이 입술을 스칠 때 몹시 불쾌해졌다. 촘촘히 썰어 그 기분을 좀 덜었지만, 역시 떨쳐낼 수 없었다. 적당히 모아다 한끼 정도로 아버지에게 대접해드렸고 아버지께선 몹시 만족하셨다. 나머지는 커다란 락앤락에 담아 냉장고에 집어넣었고, 나는 그 중에 여섯 점 정도를 접시에 담아 야식 삼아 먹었다.
잠자리에 들 무렵, 내 뱃속에서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설사가 마려웠던 것이 아니었지만 창자에서부터 꾸르릉꾸르릉 소리가 나고 마치 액체처럼 휘몰아치는 게 느껴지기도 했고, 방귀를 뀌어서 그 냄새를 맡으니 썩은 달걀에 무, 느끼한 비계향이 좀 더 강하게 나는 악취가 났다. 위장이 이쯤에 위치할 법한 배 윗쪽에서는 살짝 욱식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에 자극을 받아 트림을 하는데, 마치 어렸을 적 폐렴에 고생했을 때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편도의 안쪽, 식도의 주변에서 풍기는 '아픈 향'과 함께 '구토를 유도하는 듯한 느끼한 냄새'를 내뱉는 것이다. 돼지고기가 상한 것인가? 내가 이상하게 조리했나? 수육 중에 덜 익은게 있었나? 그런 와중에도 눈꺼풀을 꼭 감고 자려고 애쓴 나 자신이 대견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방에, 돼지 머리를 뒤집어 쓴 나체의 인간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몸매는 전형적인 보디빌더처럼 몸시 뛰어났고, 뒤집어쓴 돼지머리는 그 턱 주위로 잘잘하게 턱수염이 돋아나 있다. 그러자 나는 겁도 없이 그 인간에게 달려들어 점프해 양손으로 어깨를 잡고, 다리를 허리에 쪼매인 상태로 나체 인간의 멱살... 왼쪽 목가를 마구 물어뜯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나체 인간은 쓰러지지 않았지만 아무런 반격을 하지 않고 돼지처럼 울며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 치기만할 뿐이었다. 내가 지금 잠에서 깬 채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이라서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그 꿈 속에선 내가 내 스스로를 제어할 수도 그리고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자각은 했지만 나는 3인칭에서 그 행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 꿈 속에서는 관찰하고 있던 나는 존재하지 않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 인간은 무엇일까? 그 돼지는 무엇일까? 그 날 어떤 농가에서 도축으로 생을 마감한 돼지의 영혼? 제주도에서부터 이어져온 우리 집안에게 희생된 돼지들의 집합체? 아니면 내 머릿 속에서 창조되어 튀어나온 꿈 속의 존재?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그 장소 혹은 그 꿈에서 내가 너를, 돼지를 먹었다고 믿고있는 것이었다.
그 날 일어나 아버지에게 혹시 탈이 나진 않았냐고 물어보니 아무 일 없었다고 말씀하셨고, 내가 그 고기는 별로 몸에 안 받는 것 같고 설사가 날 것 같으니 먹지 못하겠다 설명드리니 아버지는 모두 자기 반찬, 술안주거리라며 좋아하셨다. 그 날 나는 저녁 냉장고에서 수 일 전에 소금과 후추, 케이준 분말과 마늘, 청양고추를 버무려 재워둔 돼지 후지를 꺼내 프라이팬에 볶아 무파마 라면 스프를 끓인 것과 함께 먹었고 양념을 쳐두지 않은 다른 돼지고기는 김치찌개로 해먹을 까 고민을 했다.
이제 보니 우리 집안은 정말로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