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으음......”
세호가 정신이 들었을 때 그의 시야에 비친 것은 붉게 노을 진 하늘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학교를 바라본다. 사람의 일상이라는 건 이렇게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었을까.
“일어났다.”
그때 방금까지 자신을 도와 학교에 침입한 인트루더 무리와 싸웠던 나래의 가녀린 목소리가 세호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 나래야....... 이제 다 끝났어?”
은발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하는 세호.
“그래...... 고맙다, 또 도와줘서.”
“박세호!!”
세호가 지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민지와 포니테일 여자가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김민지? 너 괜찮냐?”
“누가 누굴 걱정해? 제대로 된 훈련도 안 한 주제에 몬스터와 싸우려 들다니, 무모하잖아!”
민지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세호에게 박혔다. 도와주고 욕먹기라고 하던가. 세호의 마음을 읽은 건지 그녀와 같이 찾아온 포니테일 여자가 팔꿈치로 민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중얼거린다.
“민지야, 감사 인사.”
“아...... 그, 그래도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몬스터들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어.”
이번엔 병 주고 약 주기라니. 쓴웃음을 짓는 세호. 그는 학교 건물을 다시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학교 사람들은 다 돌아갔어?”
“응, 학교 선생님들도 네 안전은 확인했고 네가 깨어나면 우리가 귀가시키겠다고 말했어.”
“그래, 잘됐네.”
안도의 한숨을 쉰 세호는 곁에 있던 나래를 보고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민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민지. 나래 말인데.......”
“그건 이제 괜찮을 거야.”
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검은 제복을 입은 장신의 안경잡이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머리카락이 성게처럼 삐죽삐죽한, 불량스러운 분위기의 소년이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네가 세호 맞지? 우리 민지를 도와줘서 고맙다.”
“아, 그건 어쩌다 보니까....... 그보다 괜찮다니요?”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의 피해자를 만나서 이걸 받았거든.”
청년이 세호에게 건네주었다. 액정에 금이 간 휴대폰에서 보여준 건 늑대의 형상을 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는 은발 소녀의 모습. 다급하게 찍은 것이라 화면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나래의 모습임이 확실했다.
“이미 상부에 보냈으니 걔가 무고하다는 게 밝혀질 거고, 처음에 현장에 출동했던 그 세이비어 요원들은 징계 처리를 받겠지.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으니까.”
“그럼 나래는 어떻게 되는 거에요?”
“일단은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는 우리랑 같이 가서 보호시설에서 대기해야겠지.”
나래에게 시선을 돌리는 청년.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현의 시선을 느낀 건지 그쪽으로 시선을 맞춘다.
“다른 세이비어들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정말 미안하다.”
청년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뒤를 이어 민지를 비롯한 다른 요원들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세호의 눈엔 민지만 조금 늦게 고개를 숙인 것 같았지만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괜찮다.”
민지 일행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민지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기 정리도 끝났고. 이만 철수해야겠네요.”
“그래, 돌아갈 때도 내가 운전할게요?”
“아니, 절대 하지 마.”
“아니, 절대 하지 마.”
포니테일 여자의 선언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안경잡이 청년과 성게 머리 소년.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에이~ 왜요? 내가 운전하니까 빨리 왔잖아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이 새꺄!”
“너 운전 두 번 했다간 아저씨 심장마비 걸려!”
두 사람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자 포니테일 여자는 단념한 것인지 작은 목소리로 “속도를 모르네......”라고 중얼거렸다.
“저기, 잠깐만요.”
그때 민지 일행의 등 뒤에서 들리는 세호의 목소리.
“저기...... 그 세이비어라는 거,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세호를 바라보는 네 사람.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는지 네 사람 모두 놀란 눈치였다.
“좋아, 나는 찬성!”
침묵을 깨는 포니테일 여자. 그녀는 예의 활기찬 표정을 되찾으며 세호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맞잡고 힘찬 기세로 흔들었다. 그때, 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세리야, 잠깐만.”
포니테일 여자 세리가 자리를 터주자 청년이 세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방금 전과 달리 살짝 진지해 보였다.
“세호 네가 팀에 들어온다면 고마운 일이지. 특히 민지는 네가 다니는 학교로 간다는 말을 듣고 엄청 기대 했으니까.”
청년이 자신을 언급하자 민지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청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 어머니도 그러하셨고 나를 비롯한 다른 세이비어들도 마찬가지로 몬스터와 싸울 땐 목숨을 걸어야 해. 잠깐 방심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근데 진짜로 세이비어가 되려는 거야? 관리국에서 부를 때까진 평범하게 살 수 있잖아.”
청년의 질문에 침묵하는 세호. 하지만 이는 결코 망설임 때문이 아니다.
“그래요, 몬스터 따위랑 싸우는 것보다 친구들이랑 게임이나 하는 게 더 좋죠.”
말을 이으면서 그는 떠올린다. 몬스터에게 습격받은 상가와 학교, 자신의 일상 속 공간을.
“하지만 그 괴물들 때문에 제 주변 사람들이 잘못되는 건 싫거든요. 아저씨나 민지도 그것 때문에 세이비어가 된 거잖아요?”
세호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침내 그 입을 열었다.
“너 마음에 든다. 좋아, 오늘 저녁에 너희 집으로 갈게. 가족들한테 허가는 받아야지.”
“사촌 누나랑 같이 살고 있어요. 이따가 지도 보내드릴게요.”
“그래, 부탁한다.”
말을 마친 현이 빙긋 웃자, 뒤에서 다시 세리가 잽싸게 다가와 세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아! 환영해, 후배님! 이 몸은 조세리! 앞으로도 잘 부탁... 으갹.”
“제발 좀. 아직 허가받은 것도 아니거든?”
“그래, 세리 언니. 김칫국부터 마시지 좀 마.”
성게 머리 소년과 민지가 세리의 옷깃을 당기며 뒤로 끌고 갔지만 어째선지 민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래 너도 고생 많았다. 이제 쫓겨 다닐 필요 없겠네.”
나래에게 다가가 미소 짓는 세호.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민지 일행을 따라 승합차에 올라탔다.
“좋아, 세호야. 그럼 나중에 찾아갈게.”
청년의 말을 끝으로 민지 일행과 나래를 태운 승합차는 학교를 떠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세호는 누나 수민을 설득시킬 생각에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
서상고등학교에 몬스터가 침공한 지 사흘이 지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검사원의 인사를 받으며 검사장에서 걸어나오는 세호의 모습.
서상고등학교가 몬스터의 침공을 받은 그 날, 세호는 현과 함께 그의 보호자인 사촌 누나 수민에게 자신이 세이비어가 되겠다고 밝혔고, 오랜 고심 끝에 수민은 세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세이비어가 되면 공무원 취급을 해주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사흘 뒤 세호는 그날 만났던 안경잡이 청년과 함께 한때는 그렇게도 싫어했던 관리국의 검사장으로 향했고, 신체검사, 체력 및 신체 능력검사, 이형력검사 등 세이비어가 되기 위한 이런저런 테스트를 받았고, 그 결과 세호는 세이비어로서 합격이었다.
‘이렇게 쉽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세이비어들이 포획한 몬스터를 직접 퇴치하라는 등 살벌한 테스트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너무 난이도가 낮은 게 아닌가 느끼는 세호였다. 어쩌면 최대한 많은 수의 세이비어를 양성해 부족한 인력을 채우려는 관리국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끝났나?”
세호의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먼저 검사장에서 나온 은발의 소녀, 나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합격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나래. 세호는 현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청년이 상부에 나래가 무고하다는 내용의 영상을 보낸 뒤의 일은 의외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건 당시 나래에게 누명을 씌웠던 세이비어 요원 2명은 허위보고, 무고한 시민 공격 및 불필요한 병력을 움직이게 했다는 사유로 직위해제라는 무거운 처분을 받았고 동시에 나래의 수배 조치도 해제되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나래는 망설임 없이 세이비어가 되기로 했고 오늘 세호와 함께 테스트를 받은 참이었다.
“설마 너도 세이비어가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나래. 누명을 쓰면서까지 사람들을 지키며 몬스터와 싸우는 길을 택했던 것이 그녀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인 것일까.
“넌 이제 어디서 지낼 거야? 이제 세이비어인데 계속 떠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래. 실제로 관리국이 세이비어 요원에게 주거시설을 지원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건 등급이 높은 세이비어 요원들의 얘기. 민지나 혜성처럼 아카데미 출신이었다면 아카데미 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겠지만 나래는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니 역시나 해당하지 않는 얘기다.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녀에게 남은 건 떠돌이 생활뿐. 그때 주저하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던 세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그... 뭐냐,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올래?”
세호를 바라보는 나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우리 누나한테도 이미 얘기해놨어. 어때?”
지난주 금요일, 현과 함께 수민을 설득할 때 세호는 넌지시 나래 얘기를 꺼냈고 잠깐의 토론 끝에 수민은 나래를 같이 살게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역시 세이비어가 국가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세호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
“좋아, 그럼 이따가 나랑 같이 가자.”
세호는 빙긋 웃었다. 그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눈앞의 소녀를 챙기려 하는 걸까. 그녀에게 자신의 어린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일까?
“두 사람 다 끝났니?”
세호가 마음속으로 누나에게 감사를 표할 때 복도 저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세호와 나래의 시선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민지 일행이 다 같이 모여 있었고, 청색 자켓을 입은 장발의 여자가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세호가 말했다.
“아... 신경혜 관리 요원님 맞으시죠?”
“그래, 오늘부로 정식으로 리틀 나이츠 팀의 요원이 된 걸 축하해. 그리고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돼.”
“네, 경혜 누나......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셨어요?”
나래와의 악수까지 마친 경혜가 다시 세호를 돌아봤다.
“너희가 우리 팀의 요원으로 들어왔으니까 간단하게 환영회 같은 걸 좀 하려고 하거든. 둘 다 시간 되니?”
“가서 식사도 하고 멤버들 얼굴도 익힐 겸. 어때?”
민지가 거들었다. 그리고,
“같이 가자. 닭갈비 맛있는 집 갈 거니깐!”
어느새 경혜와 민지의 옆에 나타난 세리. 세호 입장에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알겠어요. 나래 너도 같이 갈 거야?”
“맛있는 집.......”
대답 대신 세리가 한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빛내는 나래. 그녀의 입엔 어느새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어 보였다.
“좋아, 그럼 가즈아!”
“세리 저 녀석, 닭갈비 때문에 더 신난 거 같은데.”
“세리 누나가 세리 누나 했죠, 뭐.”
세리는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선두에 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고 현과 혜성, 그리고 경혜도 함께 움직였다.
“박세호, 앞으로도 잘 부탁해.”
다른 일행의 뒤를 따라가던 민지가 세호에게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덩달아 빙긋 웃으며 세호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앞으로 세호의 삶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크나큰 난관으로 가득할 수도,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으로 가득한 것이 곧 인간의 삶. 선택해야 할 순간은 언제든 찾아올 것이고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건 확고한 결심. 오직 그것뿐이다.
드디어 3편의 에필로그를 완성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전의 전투파트 보다 더 쓰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던 것 같네요.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올린 것들은 지금까지 쓴 것들의 부족한 부분을 고치는 느낌으로 썼는데
이번에 올리는 건 후반부 파트를 아예 새로 쓰는 것이었으니까요 ㅋㅋㅋㅋ
후반 파트는 세호가 누나에게 허락을 받는 걸로 끝내고 다음화를 세호가 세이비어가 되기 위한 검사를 받는 걸로 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전개가 너무 늘어질 것 같기도 해서 누나 파트는 언급하는 정도로만 쓰고 대신 세호가 검사를 합격하는 장면을 넣기로 했습니다.
아마 이 다음부터는 노벨피아 같은 곳에도 연재할까하는데...
다음 에피소드는 역시 민지나 혜성 같은 세호의 팀원들 하나하나씩 다루는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