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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세호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화장실에서 챙긴 대걸레 자루 하나에 의지해 대피소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나 교실에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성훈이나 현모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미 지하에 있는 대피소로 몸을 피한 것 같았다.
‘그래, 굳이 내가 나설 필요 없어. 그 녀석 분명 세이비어라고 했잖아.’
세호는 예전에 본 적 있었다. 자신의 이형력만 믿고 몬스터를 사냥하려고 했던 이형력자 소년이 되려 몬스터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자신이라고 그 소년과 다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몬스터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구하고 싶어.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그의 머릿속에서 민지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에 대해서 자세한 건 모르지만 긴급상황에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의 지시대로 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세호는 어느새 1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대피소였다. 그가 안심하는 순간,
“꺄아아아악!!”
그때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지는 웬 여자의 비명. 그는 반사적으로 비명 소리가 들린 곳을 찾기 위해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바닥에 쓰러진 안경잡이 소녀와 그녀를 눈앞에 두고 게걸스럽게 으르렁거리는 칠흑색 조무래기 몬스터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돌겠다, 진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는 세호. 그녀를 도와야 하나? 그녀를 도우러 갔다가 세호 자신도 그녀와 사이좋게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모르는 척해야 하나?
“누가, 누가 좀 도와줘요!!!”
그녀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를 들리자 세호의 몸은 이미 괴인을 향해 쏜살같은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키이익!!!
세호의 인기척을 느끼자 소녀를 뒤로한 채 칼날처럼 자란 손톱을 드러낸 괴인. 이틀 전에 마주친 철갑 거인에 비하면 몸집도 작고 강해 보이진 않았지만 위협적인 괴물임엔 틀림없다!
-캬아아아아악!!
미니언이 갈고리처럼 돋아난 손톱을 세워 세호에게 도약하자 세호 역시 대걸레 자루를 쥔 양손에 온몸의 체중을 실었다. 그 날과 똑같은, 몸속에서 용암이 흐르면서 솟구치는 감각이 함께 대걸레 자루에 푸른빛의 기류, 이형 에너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빠악!
아무런 요령 없이, 오로지 세호의 완력만으로 휘두른 대걸레 자루가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괴인의 안면을 가격했고, 괴인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걸레 자루 또한 세호의 이형력을 버티지 못한 건지 산산이 부서져 복도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이런.......”
-키르르르르.......
세호의 갑작스런 공격에도 미니언은 다시 일어나 앙상한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대걸레 마저 잃어버린 세호는 말 그대로 맨손.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황급히 말했다.
“뭐하고 있어? 어서 뛰어!”
“하, 하지만 다리에 힘이......”
몬스터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해야 되나? 맨손으로?’
세호는 피가 쏠릴 정도로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형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그는 여학생을 조용히 부른다.
“내 말 잘 들어. 이놈은 내가 어떻게 할 테니까 어떻게든 대피소로 뛰어, 알겠지?”
“뭐? 하지만......”
“꼭 도망쳐라!”
세호는 여학생의 대답도 무시한 채 눈앞의 괴물을 노려보자 괴인 역시 흉악한 괴성을 지르며 세호를 향해 도약했다. 모 아니면 도. 세호의 목숨을 건 도박...... 일 것이었다.
푸샤아악!!
“엇...?”
갑자기 벌어진 순간이었다. 은빛의 기운이 서린 검, 그리고 그 예리한 칼날에 뒤통수를 꿰뚫린 괴인의 모습이 세호의 시야에 들어온다.
-카...... 아악.......?
괴인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당황스러운 괴성을 흘리며 그 자리에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갑자기 날아온 검을 바라보는 세호. 익숙한 모양의 검이었다. 물론 검의 주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자기 몸보다 커 보이는 카키색 파카를 입은 소녀,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은발이 어울리는 소녀, 나래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나래....... 너 어떻게...?”
세호는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는 괴인의 뒤통수에 꽂힌 장검을 뽑아 도신에 묻은 검은 재를 털어내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지나가다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너의 것도.”
“기운이라니...... 그게 구별이 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이렇게 우연이 맞아떨어져도 괜찮은 걸까? 개연성이 없는 건 현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제는 고마웠다.”
“뭐, 뭐? 아니야. 그,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세호에게 고개를 숙이는 나래. 고작 밥 한 끼 먹인 거로 도움을 받을 줄은......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사는 게 맞는 모양이다.
“아, 맞다. 잠깐만.”
세호는 나래를 뒤로하고 복도에 주저앉아있던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손잡아.”
“뭐, 뭐? 아...... 응.”
세호에게 의지해 일어서는 그녀, 하지만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지 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 이제 괜찮은 거지, 우리...?”
“일단은. 걸을 수 있겠어?”
“으, 응......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여전히 공포에 떠는 소녀에게 세호가 해줄 수 있는 건 부축해주는 것뿐이었다.
-키에에에엑......
-키케케케케엑......
-끼야아아악......
저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괴성.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나래는 장검을 고쳐 쥐어 전투자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방출하는 하얀 빛의 입자.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며 그녀가 세호에게 속삭인다.
“어서 도망가라.”
“괜찮겠어?”
나래는 세호의 질문에 화답하듯 오른손에 쥔 하얗게 번뜩이는 장검으로 계단을 가리킨다. 도망치라고 재촉하듯.
“알았어. 무사해야 한다! 가자!”
“으, 응...!”
나래를 뒤로 하고 계단으로 내려간 세호와 여학생과 함께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가 지하 2층의 대피소로 통하는 통로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세호는 숨을 헐떡이면서 대피로의 문을 열자 딱 학교 복도의 두 배 정도 되는 넓이의 통로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지금껏 비상 대피 훈련 때에나 와봤던 학교 내 지하 대피소를 설마 실제 상황에서 들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여학생의 얼굴엔 여전히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학생이 먼저 대피로로 들어가자 세호도 뒤따라 들어갔다. 분명 경보 방송이 울렸을 땐 학생들의 아우성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대피로는 조용했다. 세호나 여학생이나 서로를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세호는 물론이고 그녀도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는지 그 고요함은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저기, 내 이름은 수아야. 나수아.”
정적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여학생.
"어? 어... 나는 박세호.“
"세호구나...... 아까는 고마웠어.“
어리둥절한 채로 안경 소녀를 바라보는 세호. 그녀가 말을 이었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아, 아니...... 내가 해치운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 너처럼 직접 나서서 누굴 도와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쑥스러운 듯 웃는 세호.
"그래서, 너는 뭣 때문에 대피를 못했던 거야?"
불현듯 수아가 세호에게 물었다.
"나? 그...... 좀 일이 있어서."
역시 세이비어랑 만났다고 하면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는 너는?"
"나는 도서실 위원이니까. 다른 사람들 먼저 내보내다 보니까 늦어버렸어....."
고개를 끄덕이는 세호. 그는 고개를 들어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을 나래와 민지를 떠올리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세호야, 왜 그래?”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지나온 길을 쳐다보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아야, 먼저 들어가. 조금만 더 들어가면 대피소 CCTV에 네 모습이 찍힐 거고 선생님들도 열어줄 거야.”
“뭐? 잠깐 세호야, 뭐 하려고?”
“사람들이 나 못 봤냐고 물어보면, 못 만났다고 말해, 알겠지?”
수아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세호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수아가 무어라고 외치건 말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피로에서 나가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세호.
대피로를 나온 세호는 다시 올라간다.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마음에 반응하듯 세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기운, 이형 에너지가 뜨겁게 솟구친다!
1층까지 거의 다 올라온 그의 시야에 보인 것은 괴인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넣는 나래의 모습,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지하 계단으로 도망치려다가 그와 마주친 또 한 마리의 괴인이었다.
세호는 눈앞의 괴물을 보자마자 몸이 굳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푸른빛의 이형 에너지가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듯 그의 오른쪽 주먹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렬한 진동이 세호의 오른팔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크윽......!”
그는 오른팔을 압박하는 진동을 털어내려는 듯 온몸의 체중을 실은 주먹을 괴인에게 뻗는다, 그리고!
촤아아악!
그의 오른손에서 벗어난 푸른빛의 기운은 이윽고 한 줄기 푸른 빛줄기가 되어 괴인의 명치를 찌른다!
-캬아악!!
세호가 뿜어낸 빛줄기의 출력에 의해 1층 중앙복도의 벽에 처박힌 채 미동도 않는 괴인. 푸른 섬광도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는 세호. 이틀 전처럼 피로감이 밀려왔지만 못 버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좋아,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세호.”
그때, 나래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호는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다시 올라온 이유를.
“별관에서 몬스터가 처음 나타났어. 가자.”
별관 건물을 가리키며 말하는 세호를 바라보는 나래.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나래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별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네, 3부가 되어서야 다시 전투씬이 나왔습니다. 사실 전투씬이라기에도 무색한 게 잡졸들 정리라 세호가 처음 대걸레로 후려친 걸 빼면 전부 한 방에 끝나지만요 ㅠㅠ
아무래도 필요없다 싶은 부분을 죄다 쳐내느라 이렇게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고 세호가 왜 굳이 별관으로 가는지는 다음 화 중에 나올 겁니다. 특별한 이유는 결코 아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