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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점심시간,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인적이 드문 이 곳엔 오직 발소리만이 들릴 뿐. 발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세호는 조용히 몸을 뒤로 돌렸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박세호.”
민지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계단에서 울린다. 그녀는 어제와는 정반대로 세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세호는 구면이지만 구면이라는 건 결코 친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떨떠름한 관계가 아닐까.
세호에게 쏟아지는 민지의 따가운 시선. 그녀도 어제 일을 잊진 않은 모양이다. 확실히 어제 그녀에게 보여줬던 언행을 생각하면 이렇게 그녀를 따로 부르는 것도 못 할 짓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할 말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뭐냐... 어제 일은 미안하다.”
고개를 푹 숙이는 세호.
“나도 모르게 심하게 말한 거 같다.”
어색한 침묵이 흐를 뿐. 그녀가 받아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세호의 사과는 진심이다. 이윽고 민지의 한숨소리가 세호의 목 뒤로 들려왔다.
“아니, 사과할 건 오히려 나야. 정말 미안해.”
민지도 고개를 푹 숙인다. 세호를 영입하는 데 실패한 어제, 그가 자신에게 울분을 토해내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세상엔 들춰내선 안 될 것이 있다는 걸.
고개를 숙이는 민지를 보며 세호는 떠올렸다. 자신이 그녀를 부른 이유를.
“그건 이제 괜찮아, 신경 안 써.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세호는 왜 자신이 민지를 이 곳까지 데려온 것일까?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실수하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믿어주지도, 들어주지도 않아.」
그때 세호의 머릿속에 맴도는 나래의 말.
‘그래, 말할 건 말해야지.’
세호는 머릿속을 정리하듯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연다.
“저번에 네가 얘기했던 그 애, 진짜 범인인 거 같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것처럼 민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심 세호가 팀에 들어오겠다는 대답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건...... 갑자기 왜?”
“지난번 세븐 스퀘어에서 개가 나를 지켜줬다고 얘기했었지?”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민지였다.
“그렇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세이비어 요원들의 진술과 피해자들의 몸에 난 상처들은 일치.......”
말을 잇지 못하는 민지.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세이비어들의 진술 말고는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때 피해자들이 중태에 빠진 상태였고 CCTV 같은 것들도 요원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에 믿을 수 있는 건 그 요원들의 진술뿐이었었지만 기왕이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한 민지였기에 지금 세호와의 만남은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박세호, 말해봐.”
“사실 그 애의 이형력.......”
-키야아아아악!!
세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묻히고 말았다. 두 사람은 황급히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저기 봐!”
세호가 가리킨 곳은 음악실이나 미술실 등 예체능 교실이 모여 있는 별관 건물. 옥상엔 이미 기분 나쁜 검붉은 빛을 띤 기운이 모여든 균열 속에서 칠흑빛의 괴인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몬스터......!”
온실에서 해충을 본 것처럼 민지의 눈살을 찡그러졌다.
“어떻게 하지?”
세호가 시선을 민지에게 옮겼을 땐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네, 부탁드려요. 현 시간부로 작전을 시행합니다!”
민지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세호에게 외쳤다.
“어서 지하 대피소로 가, 서둘러!”
“너 혼자서 괜찮겠어?”
민지는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
“문제없어. 그리고 어제 네가 물었지? 왜 몬스터랑 싸우냐고.”
민지의 눈빛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몬스터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구하고 싶어.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세호를 뒤로 한 채 곧바로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민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부상을 입었겠지만 그녀는 그런 것 없이 바닥에 착지해 곧바로 달려갔다.
별관에 도착한 민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게걸스러운 이빨을 과시하며 으르렁 거리는 칠흑빛 괴인, 미니언의 무리. 그녀는 왼쪽 손목의 디지털 손목시계 중앙 아랫부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한 순간의 섬광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고, 빛이 멎었을 땐 민지의 교복은 국제 이형력 관리국을 상징하는 X자로 교차 된 두 자루의 검이 겹쳐진 은빛 지구 문양이 새겨진 푸른 완장을 찬 검은색 제복으로 바뀌어 있었고, 제복의 오른쪽 가슴에는 은빛의 기사 투구 모양의 엠블럼이 박혀있었다. 이것이 곧 자신의 팀, 리틀 나이츠의 상징인 것.
환복을 마친 민지가 왼손의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왼편에 형성된 지름 60cm 정도의 연분홍빛으로 빛나는 빛의 구멍. 그녀는 구멍에서 검은색으로 빛나는 돌격소총과 실탄이 가득한 탄알집을 꺼내 소총에 삽탄 시키며 홀로 되뇌인다.
“몬스터 섬멸 작전, 개시!”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가 불을 뿜으며 탄환 세례를 퍼붓는다.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리석은 적의 무리를 향해.
*
서울의 한 병원.
“감사합니다, 그럼 빠른 쾌유를 바라겠습니다.”
안경잡이 청년이 머리에 붕대를 맨 중년 여성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후련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우우웅.......
때마침 진동하는 그의 휴대전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댔다.
<현이 씨, 지금 어디 있어요?>
“경혜 씨? 지금 병원이야.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고......”
<지금 서상고등학교에 몬스터가 침공했어요,>
경혜의 청천벽력 같은 통보에 방금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한 현의 표정이 굳었다.
“서상고? 거기 민지 있을텐데......”
<네, 지금 거기서 몬스터들과 교전하고 있어요. 지금 세리랑 혜성이가 올 테니까 같이 민지랑 합류해주세요!>
“알았어, 금방 가지.”
전화를 마치는 대로 현은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가 병원을 나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세리를 찾았다.
“아저씨, 여기에요!”
그때, 앞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현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포니테일 머리가 잘 어울리는, 무척 건강미 넘쳐 보이는 외모의 여자가 승합차에 탄 채 그를 향해 왼쪽 팔을 흔들고 있었다. 현은 곧장 그녀가 탄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세리야, 너 운전면허도 있었어?”
“당근이죠, 나 이래 뵈도 대형 면허에요.”
세리가 한껏 너스레를 떨자 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넌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
“아저씨... 지금 충분히 웃으세요.”
그 때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년의 목소리. 혜성의 목소리였다.
“혜성아? 너 왜 그러냐?”
평소의 퉁명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의 모습.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수석에 탄다.
“좋아, 세리야. 목적지는 대충 알고 있지? 최대한 빨리 가자.”
이때까지만 해도 현은 전혀 몰랐다. 어째서 혜성이 벌벌 떨고 있었는지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를!
“걱정 마세요, 저승 빼고는 다 갈 수 있으니까요!”
“잠깐 너 방금...”
3초대의 제로백을 기록하며 질주하는 승합차와 하나의 선이 되어 지나가는 배경. 그제야 현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으아아아악!!”
“히에에에에엑!!”
중력마저 느껴지는 가속과 함께 승합차는 풍경이 이동하는지 차량이 이동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두 남자의 비명을 싣고 엄청난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번 소설을 고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파트 1입니다. 원래는 안경잡이 청년 현이 히로인 나래의 사건에 대해서 풀어나가는 서술이 있었지만 너무 길고 지루해서 그냥 지워버리고 나름대로 개그씬을 넣는다고 난폭운전 묘사를 넣긴 했습니다만 뭔가 두 사람이 속도에 압도되는 묘사를 넣기가 힘들었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