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易)’이라는 글자의 어원에 대해서는 석척설(蜥蜴說)과 일월설(日月說),
일영설(日影說)등 세 가지 설이 전한다.‘석척설(蜥蜴說)’은 ‘역(易)’이라는
글자가 주변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도마뱀을 상징하는 상형문자
(象形文字)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이에 비해 ‘일월설(日月說)’은 ‘역
(易)’자를 양(陽)을 상징하는 ‘일(日)’과 음(陰)을 상징하는 ‘월(月)’의 회의(會
意)문자로 보는 견해이다.하루하루가 지나 한 달이 되고,한 달이 12번 바
뀌어 1년이 되며,1년 동안에는 사시사철(四時四節)변화가 있다는 데서 ‘역
(易)’이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일영설(日影說)’은 ‘일(日)’과
‘물(勿)’의 회의문자(會意文字)로 보는 견해로,고대에 해 그림자를 보고 그
날의 일과(日課)에 대해 진퇴(進退)를 명한 데서 ‘역(易)’자가 비롯되었다고
본다.이렇게 그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역(易)의 의미가 변화 가
운데 중정(中正)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현행본 주역 은 「역경(易經)」과 「역전(易傳)」으로 구성되어 있다.「역경
(易經)」은 크게 상하(上下)양편으로 나뉜다.‘건괘(乾卦, )’에서 ‘이괘(離
卦, )’까지 총 30개 괘가 ‘상경(上經)’,‘함괘(咸卦, )’에서 ‘미제괘(未濟卦,
)’까지 총 34개 괘가 ‘하경(下經)’으로 구분되어 있다.전통적으로는 복희
씨(伏羲氏)가 ‘팔괘(八卦)’를 그렸는데,그 후 수천 년이 지나 주문왕(周文王
이 64괘의 괘사(卦辭)를 쓰고,그의 아들인 주공(周公)이 384효에 대한 효사
(爻辭)를 썼다고 전한다.그리고 「역경(易經)」이 나온 지 다시 7백 년이 지
나 공자(孔子)가 괘효사(卦爻辭)의 해석에 해당하는 소위 ‘십익(十翼)’을 찬
술했다고 전하는데,이것이 바로 「역전(易傳)」이다.27) 이렇게 해서 정착된
현행본 주역 은 「역경」과 「역전」을 합쳐 총 2만 4천여 자로 구성돼 있다
주역 의 저자와 관련된 논의는 반고(班固,32~92)가 한서(漢書) 「예문
지(藝文志)」에서 “주역(周易)의 도는 매우 심오해서,세 성인을 거치고 세
왕조를 거쳤다.”28)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가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본다.우선 「역경」의 경우 성립과정
에 대해서 정확한 근거를 밝히기 어려울 뿐 아니라,신화적으로 기술되어있
어서 그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다.물론 최근 연구 성과에서는 갑골복사
(甲骨卜辭)와 비교분석하여,그 성립과정을 추론하기도 한다.29) 하지만 그
저자에 관련해서는 신화적으로 기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상식이다.
한편 「역전」은 각 전(傳)마다 성립연대가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인 평가이다.예컨대 노사광은 「역전」의 내용이 한 사람이나 한 학파에 의
해서 편집되지 않았음을 수많은 증거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
다.그의 주장에 따르면,대개 전국시대(戰國時代,B.C.403~221)부터 진한시
대(秦漢時代,B.C.300~A.D.200)에 이르는 여러 가지 설을 모아서 편집한 것
이기 때문에,「역전」을 공맹(孔孟)의 학문과 한데 묶어서 말할 수는 없다.30)
이 주장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지만,학자들마다 그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다만 「역전(易傳)」의 주 내용이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성립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대부분 일치된 의견을 보인
다.
이렇게 볼 때 역(易)에는 선진시대(先秦時代)에 통용되었던 변화의 관념이
집약되어 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한 시대,한 인물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인식은 타당하다.이러
한 분석은 비교적 후대에 나와서 텍스트로서의 형식을 갖춘 주역 만 하더
라도 공자(孔子),또는 공자 이후의 유학(儒學)의 이념을 담고 있는 저작으
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뒷받침한다는 데서 그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주역 이 성립한 후 수많은 주석서들이 나왔는데,오늘날에는 이것
들을 상수(象數)와 의리(義理)의 연구 방법으로 크게 구분한다.32) 전개과정
으로 보면 세계 내 존재를 괘(卦)와 효(爻)로 기호화하여 그 원리를 찾고자
하는 상수역학(象數易學)이 그 괘효사(卦爻辭)의 의미를 유가적 의리(義理)
로 풀이하려는 의리역학(義理易學)보다 앞서 연구된 것으로 볼 수 있다.왜
냐하면 최초로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하는 복희씨(伏羲氏)이래로 음양오행
(陰陽五行)의 세계관에 기초한 주역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그
런데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활동한 왕필(王弼,226~249)이 주역주(周易主)
33)를 통해 의리역(義理易)의 기반을 닦은 이후로 점서(占書)로 인식되었던
주역 연구의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예컨대 당나라 때의 공영달(孔穎
達,574~648)이 주역주(周易主)에 소(疎)를 덧붙여 주역정의(周易正義)
를 저술하였는데,이 책은 의리역(義理易)분야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주석서로 평가된다.이 점을 시대별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대(漢代)에 성황을 이루었던 상수역(象數易)은 왕필역(王弼易)보다
먼저 성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맹희(孟喜)와 경방(京房,B.C.77~B.C.37)‧
순상(荀爽,128~190)‧정현(鄭玄,127~200)‧우번(虞翻,164~233)으로 대표
되는 상수학자(象數學者)들은 당시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연구하면서, 주역
과 융합하는 점성술(占星術)및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의 영향을 받음으
로써 괘기설(卦氣說)34)을 중심으로 상수학(象數學)체계를 형성하였기 때문
이다.35) 이들의 상수역학(象數易學)연구 내용은 당대(唐代)이정조(李鼎祚)
의 주역집해(周易集解)를 통해서 정리되었다.36)송대(宋代)에 이르러서 상
수역학(象數易學)은 소강절(邵康絶,1011~1077)의 선천역학(先天易學)을 통
해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다.37) 이 선천역학(先天易學)은 분명히 상
수역학(象數易學)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주자학(朱子學)이 성립하는 데 있
어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비해 의리역학(義理易學)에 크게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정이(程頤,1033~1107)의 이천역전(伊川易傳)과 주희(朱熹,1130~1200)의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손꼽을 수 있다.38) 이후 청대(淸代)왕부지(王夫之,
1619~1692)에 이르러서 의리역학(義理易學)이 총결산 하게 된다.이로 보건
대 상수역학적 접근 방식이 의리역학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음을 추론할 수
있고,의리역학적 접근 방식이 시도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수역학적 접
근 방식이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역 연구가 일찍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주역 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
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역학에 기초하여 점을 쳤다는 기록이 전한
다.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주역 연구는 위에 언급한 기록으로만 존
재할 뿐,구체적인 연구저작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한편 고려시대에 윤
언이(尹彦頤,1090?~1149)가 쓴 역해(易解)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 또한
전하고 있지는 않다.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역 관련 저작
은 권근(權近,1352~1409)의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이다
권근 이후로 우리나라에는 상수역학(象數易學)과 의리역학(義理易學)의 두
가지 연구 경향이 드러난다.곧 정이의 이천역전(伊川易傳)과 주희의 주
역본의(周易本義)를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는 의리역학적 경향과 소강절의
선천역학(先天易學)을 바탕으로 한 상수역학적 경향이 모두 나타난다.조선
초기에는 권근과 이세응(李世應,1473~1528)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의리역
학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이 경향은 이이(李珥,1536~1584)에까지 전
해진다.그런데 서경덕(徐敬德,1489~1546)40)과 이황(李滉,1501~1570)의
계몽전의(啓蒙傳疑)41)에 이르러서는 상수역학적 경향이 두드러지는데,정
약용(丁若鏞,1762~1836)의 주역사전(周易四箋)도 상수역학적 내용을 담
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임원철(2013) pp.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