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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자로(St. Lazarus) 기사 수도회.

1130년. 성 라자로 병원 기사 수도회의 전신인 '성 라자로의 나환자들의 집' 즉, '성 라자로 수도회'가 설립됐습니다.


1142년. 예루살렘의 왕 풀크(1092년 ~ 1143년 11월 13일)가 성 라자르 교회와 가난한 자(miselli)로 불리는 환자들을 돌보던 병자들의 수도원에게 요르단강으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붉은 저수지(Red Cistern)와 올리브 동산 사이의 토지를 할당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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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추정되는 붉은 저수지 위치. 현재는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박물관.)



'성 라자로 수도회'는 그곳에서 요단강으로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에게 자선품을 받았고 공동체 집을 지었으며 포도밭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1148년에는 예루살렘 왕국 가문이' 예루살렘 성벽들 옆' 토지를 '성 라자로의 나환자들의 집'에게 소유권을 확장해주었습니다.


1150년에는 부유해져서 베들레헴 평원에 13카루케이트(carucates), 대략 6.3제콥킬로미터와 말 한 필을 구입했으며, 예루살렘 성 옆에 공동체를 위한 집을 지었습니다.

1197년에서 1205년 사이에, 라틴 왕들을 위해 작성된 『왕의 서(Le Livre au roi)』에서는 나병에 걸린 한 기사 혹은 병사들은 성 라자로 수도회에 들어가야만 한다,¹고 명시했습니다. 강제성을 없지만, 예루살렘 대귀족들의 후원과 교회 기사 수도회(Knight Templar)의 후원으로, 나병 환저들이 요양할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성 라자로 수도회'의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아내는 수녀원으로, 재산은 상속자에게 양도했으며 상속자가 없을 경우 왕에게 귀속되었습니다.² 어떻게 보면, 잔인해 보이나 당시 나병 환자들의 취급을 생각해본다면 '성 라자로 수도회'는 피난처였습니다.

'성 라자로 수도회'가 군사 단체로서 활동한 내용은 12세기에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1244년 라 포비 전투에서 전사한 '성 라자로 수도회'의 기사들과 1248년 10월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준 면죄권,


1255년 '그리스도교도의 이름으로 적들을 몰아낼 목적을 위해 활동적인 기사들과 다른 이들, 건강한 이들과 나환자들 모두로 이루어진 귀족들의 한 수도회로서'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언급,

7차 십자군의 참전과 1291년의 아크레 방어전의 참전 등,

13세기 중반 부터는 나병 환자들을 위한 단순한 병원이 아니라, 나병 환자들도 칼을 쥐고 이교도를 물리치는 기사 수도회로서 활동했습니다.



1: A.A. Beugnot (ed.), ‘Le Livre au Roi’, in Assises de la Haute Cour, Recueil des Historiens des Croisades, Lois, 1 (Paris, 1841), pp. 636–7; Shahar, ‘Lépreux’, pp. 20–1.
2: “Livre au Roi,” in Recueil des Historiens des Croisades, Lois, Vol. 1 (Paris, 1841), 636-637.





12세기 성지 예루살렘에 등장한 기사 수도회들(Military Orders)에 관하여: 성 라자로, 성 토마스, 마운트조이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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