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이야기: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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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병자호란을 재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정묘호란 이후 조선-후금(이후 청나라) 간 지속적인 외교적 마찰이 있어왔고 이는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갔다.
이후 후금이 칭제 작업을 수행하는 단계에서 후금의 칸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가 조선에게 칭제 과정에 동참을 요구했으나 조선이 거부한다. 결국 이는 병자호란의 발발로 이어졌다. 또한 조선 조정이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외교 실패를 저질러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조선이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대해 최근 연구는 반론을 제기한다. 조선과 후금의 외교적인 갈등이 1635년에 대부분 해소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일으킨 주체인 청나라를 주목하지 못한 '조선의 전쟁 자초'라는 해석도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병자호란을 일으킨 나라는 청나라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타이지가 일으키고 진두지휘하였다. 우리의 질문은 마땅히 '왜 홍타이지는 전쟁을 일으켰는가?'로 재편해야 한다.
사실 홍타이지는 이에 대해 자신의 답을 얘기했다. 그는 병자년 11월 25일(이하 모두 음력 기준) 제천 의식을 치루면서 병자호란의 원인을 조선의 '절화교서'를 지목했다. 그렇다면 절화교서는 또 무엇인가?
절화교서는 병자년 3월 1일 인조가 조선팔도에 하달한 교서, 왕의 명령서였다. 당시 후금 사신이 조선 조정에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칭제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혀 온나라가 척화론에 들끓고 있었다. 이에 인조는 후금과의 화의가 끊어져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절화교서를 전국에 하달한다.
그런데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에게 하달되었어야 할 교서가 후금 사신들에게 탈취되어 병자년 3월 20일 홍타이지에게 전달되었다. 전쟁 발발 전후 홍타이지는 이 교서를 증거로 삼아 조선이 정묘년의 화의를 먼저 깼다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절화교서가 전쟁을 자초한 것일까?
그러나 절화교서가 전쟁을 자초했다고 보기엔 여러가지 무리가 있다.
첫째, 절화교서의 본질은 대청 선전포고가 아닌 일종의 경계령일 뿐이었다.
둘째, 절화교서를 탈취한 청은 한동안 조선에 이 교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교서를 처음으로 언급하여 조선을 비난한 시점은 전쟁이 임박한 10월 말이었다. 7개월 동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점은 회의적인 견해를 지지한다.
결정적으로 셋째, 절화교서가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지 않았다. 절화교서를 하달한 이후에도 인조는 춘신사 나덕헌, 회답사 이확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심지어 절화교서를 탈취한 홍타이지도 이들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제 병자호란의 원인에 대란 일반적 해석과 절화교서에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절화교서는 홍타이지가 자신의 침략적 행위를 세탁할 의도로 조선에 원인을 전가하려는 교묘한 수작일 뿐이다. 어쩌면 이는 원조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이야기는 다음 글에 이어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