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 경제는 어둠 그 자체였다. 6.25 전쟁 발발 전, 미 군정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촉발된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정부 재정적자가 겨우 안정되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생산의 차질과 유엔군 대여금의 방출 등으로 통화팽창이 진행되면서 '전시 인플레'가 가속화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군인과 공무원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자 정부는 전시 인플레와 전시 식량 문제 해결책에 고심을 거듭했고,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지세에서 현물세를 부활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전시 인플레 억제와 원활한 식량수급을 목표로 한 임시토지수득세는 한때 조세수입원에 40%에 육박할 정도로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백두진 재무부 장관은 임시토지수득세가 없었으면 경제체제가 붕괴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의 입장에서 긍정적이었지, 농촌 경제는 막대한 희생을 치뤄야 했다. 임시토지수득세의 세율은 결코 낮지 않았고(생산량 10석 미만도 세율이 15%), 거기다 농지개혁의 유상분배 때문에 지가상환까지 겹쳐 전국의 농가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미곡가는 부르는 게 값이었지만 세금 내고 남은 것으로도 자급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인플레이션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보릿고개', '절량농가'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은 당시 농촌 경제의 파탄을 잘 들어낸다.
전쟁이 끝나도 농민들의 아픔은 해결되지 않았다. 전후 미국의 원조는 식량 문제를 해결했지만, 가격 경쟁에서 밀린 농가들은 말 그대로 파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했지만, 당시 이들을 받아줄 산업적 기반이 부실한 실정이었다. 당연히 실업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