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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고

한여름에 점심을 먹고 동아리방에서 늘어지는 오후, 친구가 커피나 사러 나갔다오자며 말을 꺼낸다.

"뭐로 마실거야?"

"오늘은 내가 사줄게."

"당연히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여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너도 진짜 대단하다."

"차가운 커피는 음료지, 커피가 아니야."

"사거리쪽 골목에 치킨집 맞은 편 카페 글로 갈까?, 거기 커피 괜찮던데?"

복학 이후 새로 들어가게된 동아리에는 같은 학번의 친구가 있었고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어서 그런건지 왠지 누나같은 느낌으로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사장님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랑 아이스 하나 주세요."

"맛있네. 여기가 학교 근처에서 제일 괜찮은듯?"

"그렇지? 나도 여기서 한번 먹어보고 여기서만 마셔."


그때부터 사거리까지 올라갈 때는 그 카페에서만 커피를 사갔었던 것 같다. 큰 길가도 아닌 골목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앉을 자리도 없이 테이크아웃만 취급하지만 커피는 진심인듯 나 뿐만 아니라 커피 좀 마신다는 주변 동아리 사람들도 좋아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이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돌아다녀도 힘들지 않은 계절이 되었다. 친구는 이제 졸업할 때가 다가와서 동아리 활동도 뜸하게 되었지만 가끔 같이 얘기를 하거나 그 카페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점심 먹었어?"

"응, 먹고 커피사러 나왔어."

"동방가게? 나도 이제 가는데 조금 기다렸다 같이 가자."

"역시 따뜻한 거 먹는구나. " "당연히 따뜻한 아메리카노지."

"내 돈주고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신 적이 없는데."

"내가 사주면 마셔?"

"그건 사준 사람 성의가 있는데 마셔야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다가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는 잠시 동아리 활동 못할거 같아."

"그래? 요즘도 잘 보기 힘든데 많이 바빠?"

"막학기라 프로젝트나 과제 할게 많아서..."


이제 졸업하면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이제까진 별 생각 없었는데 순간 이런 얘기를 들어서 그런건지, 슬슬 추워져서 그런건지. 항상 밝았던 친구의 지친 모습이 눈에 밣혔다. 말하던대로 친구는 그 날부터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어서오세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맞으시죠?"

그 동안 카페 사장님과는 사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사장님, 가끔 같이 오는 제 친구, 요즘도 커피 사러오나요?"

"네, 거의 매일 오시는거 같은데 힘들어 보여요. 졸업이 가까워서 그렇다고 하던데 항상 샷 추가해서 드시더라구요."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친구에게 작은 깜짝 선물을 하고 싶어져 부탁을 드렸다.

"혹시 제 친구 오늘 커피 값을 제가 미리 내도 될까요?"

사장님은 힘겹게 말하는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그렇게 해주겠다며 카드를 받았다. 커피값을 낸 이후 며칠간 설레긴 했지만 나도 기말고사 기간이라 온통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없이 학기말을 보냈다-는 솔직히 변명이고 물론 친구에게 그 동안 온 연락은 없었다.


12월 중순을 넘어 말로 넘어가는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날, 커피를 사러 올라가게 되었다. 점심때라 그런지 사장님은 없고 알바생만 정신없이 바빠보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아무생각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서 있다가 받은 커피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전 따뜻한 거 시켰었는데요."

아니 여기 단골이고 커피는 무조건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는데 이게 뭐야라는 생각을 하며 살짝 짜증이 난 상태로 커피를 바꿔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킬건데 내가 먼저 받아도 돼?"

"응, 그럼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 먼저 주세요. 완전 오랜만이네. 바쁜 일은 다 끝났어?"

"끝났지, 진짜 너무 힘들었다. 어디 나가 놀지도 못하고 학교에 처박혀서 일만 했어."

"그래도 넌 다 끝내서 좋겠다."

"이제 취업준비 시작하면 더 빡쎌건데, 공부할 때가 제일 꿀빤거야."

"벌써 꼰대가 다되셨군요."

오랜만에 보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졸업하고도 계속 보고싶다는 마음을 숨기며 그간의 이런저런 밀린 얘기를 했다.

"눈 많이 오네."

"이제 학기 끝나면 졸업하기 전까지 고향집으로 내려가 있을거야?"

"아니, 연말에 밀린 약속도 있고, 지금 방이 내년 2월까지라서 좀 있으려고."

"하긴 그 동안 못놀았으니깐 열심히 놀아야지."

"사실 약속이 많진 않아. 요즘 사람도 많이 안만나다 보니 외로움 타는거 같아서."

"아, 그래?"

무슨 의미로 말한거지?


횡단보도를 건너고 학교 정문을 지나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걸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뭐해?"

갑자기? 이걸? "아무 일정 없는데?"

두근대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대답했다.

"너는 있어?"

"나도 지금은 없는데..."

아, 이거 그거구나.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데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에 만날래?" 

친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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