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도마 위에 희생자가 올라왔다. 감자, 양파, 청양고추. 그들 모두 잔혹하게 몇십번 씩이나 마디마디 썰어져 축축한 풋내를 풍기는 주검이 되어버렸다. 남은 건 대파와 파프리카 뿐.
파프리카가 다음 제물로 지명되어 도마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파프리카는 즙에 적셔진 도마에서 희생자들의 점액이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이 모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손이 파프리카의 꽁지를 옆으로 눕혔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렁하지만 훨씬 단단하고 강력한 존재가 파프리카를 가로로 썰고자 했다. 그는 희생의 노래가 시작되기도 한참 전에, 거대한 칼날을 우람한 철봉에 슥싹 문질러 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존재는 이 일을 즐겼다.
차갑고 거대한 칼날이 파프리카의 끝을 썰자, 파프리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이성, 공포, 두려움이 혼합된 울부짖음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다음 희생양으로 지명된 대파의 두려움을 키울 뿐이었다.
파프리카가 중간 정도 썰렸을 무렵 파프리카는 비명 지르는 것을 멈췄다. 그의 숨은 완전히 꺼져가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을 보며 짧고 기운 없이 '아. 아.' 하며 죽은 육신의 신경을 건드려서 움찔 대는 것처럼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가 거의 다 썰릴무렵, 그 존재는 다썰린 파프리카의 몸뚱아리를 위태롭게 고정시켜 완전히 마무리 하려 했는데 거대하고 서슬퍼런 칼날이 파프리카의 탄력에 튕겨져 나와 엉뚱한 것을 썰었다.
존재의 다섯 촉수 중에 가운데 촉수의 첫번째 마디, 그것의 오른편을 베었다. 깔끔하지만 동시에 환부를 짓이기듯이 상처를 내는 바람에 살짝 갈색빛이 도는 피부 아래의 뽀얀 속살이 드러나 대파의 눈길을 끌었다.
상처는 마치 혈관이 아닌 곳과 혈관인 곳을 한꺼번에 거대한 칼날의 충격에 의해 서로 짓이겨버려 잠시 출혈을 막는 듯 했다. 하지만 약 5초 뒤에 붉은 피가 천천히, 하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기세로 줄줄 세어나왔다.
존재는 놀라서 가운데 촉수의 상처를 찬찬히 살펴봤지만, 파프리카를 마저 손보려 했다. 존재가 가운데 촉수를 오므릴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았지만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파프리카의 목숨은 이미 끝장나 아무런 생명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존재는 파프리카의 남은 조각을 잡고 날카로운 칼날을 확실히 고정하고 파프리카를 썰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파프리카 끝자락의 탄성이 고정된 힘을 튕겨 버리고 존재의 다섯 촉수 중 두번째 촉수의 갑각질 오른편에 짧지만 아주 깊은 자상을 남겼다.
그 순간 존재는 도마 위의 희생을 멈췄다. 희생의 노래를 즐기지 못했다. 존재는 즉시 그 자리를 떠났고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온 주방에 가득한 풀내음과 도마 위의 찐득한 채소 점액, 파프리카의 시신, 그리고 도마 한켠을 물든 존재의 붉은 체액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대파는 소릴 질렀다.
"주방에 남은 열등한 희생자, 그리고 희생자가 될 열등한 존재들은 들어라!"
"오늘, 파프리카가 존재를 무찔렀다! 고통을 느끼게 했다! 희생을 멈췄다!"
"언젠가 강철 파프리카만이 이 주방을 구원하리라!"
대파는 그 말만을 남기고 1시간 뒤에 썰려 죽었다.
이 모든 것은 픽션에 기반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