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1년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본격적인 외부 공세(와 장대한 삽질)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1265년 불가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던 도중 몽골 제국의 주치 울루스를 지배하던 베르케 칸의 기습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데(이때 일설에는 만지케르트에 버금가는 졸전이었다 하지만 정면 대결이었던 만지케르트와 기습이었던 베르케의 공격은 비교하기 불공정 하긴 합니다.)
미하일은 몽골과의 격돌 이후, 이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모색하게 됩니다.
(아바카 칸에게 시집간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바로 이들과 결혼 동맹을 맺는것이었는데, 1265년 훌라구 울루스의 훌라구에게 마리아 팔레올로기나를 시집보내려 하지만, 도중 훌라구가 덜컥 죽자 아바카가 대신 혼인하고, 1266년 베르케가 죽자 주치 울루스의 실권자가 된 노가이 칸에게 에우프로시네를 시집보냅니다.(다만 둘 다 사생아를 시집보낸거라고 합니다)
(노가이 칸은 크림 칸국의 시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멩구티무르를 칸으로 내세우며, 주치 울루스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고, 실제로 주치 울루스를 지배하던 청장 칸국의 칸이었습니다.)
지도만 봐도 짐작가다시피 당시 로마와 몽골의 역량은 수십배, 아니 수백배 차이가 났습니다.
전성기 몽골 제국의 인구는 1억을 넘었고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손꼽히는 이들이 사위가 되었으니 얼마나 든든할까요
심지어 이들은 로마가 도움이 필요할때마다 병력지원도 해줬으니 천군만마나 다름없었을겁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도움이 로마를 회생시키진 못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건 아니었습니다.아시다시피, 로마의 몰락은 몽골이 막을수 있는 그런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몽골은 로마와 적극적인 군사동맹을 맺고 군대가 필요할때마다 군을 파견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훌라구 울루스의 아바카 칸은 미하일 8세와 공모해 십자군을 결성하려 했고, 프랑스 왕과 교황에게 원조까지 요청했습니다.(여담이지만 아바카는 나중에 소원대로 9차 십자군에 참여하긴 합니다)
주치 울루스의 경우, 1277년 이바일로가 준동하자 미하일 8세가 노가이 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노가이는 수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바일로를 토벌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바일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이들을 격파해냈습니다. 하지만 이바일로가 오랜 전쟁으로 인해 기반을 잃고 몰락하고 노가이에게 망명하자, 노가이는 역으로 이바일로를 붙잡아 처형합니다.
그 외에도 미하일 8세 말기 테살리아의 데스포테스인 요안니스 1세 두카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수천명의 몽골군을 원조하기도 했습니다.
미하일 8세가 죽고, 안드로니코스 2세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기 로마는 결국 미하일 8세가 벌여놓은 일을 감당 못하고 붕괴하고 있었고, 아나톨리아엔 투르크 소국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 또한 몽골의 칸들에게 자녀들을 시집보낸건 동일했습니다. 주치 울루스와 훌라구 울루스에게 또 딸을 시집보냈는데 특히 훌라구 울루스 측이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에게 시달릴때, 훌라구 울루스의 올제이투 칸은 무려 4만명의 지원병력을 약속했고, 실제로 3만명의 몽골군을 지원했습니다. 이들은 비티니아 지역의 도시를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위치 보다시피 오스만 공격한겁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관계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 시기, 몽골과 로마의 관계는 금이 갑니다.
사실, 훌라구 울루스와는 찰떡궁합이었지만 주치 울루스와는 마냥 그렇진 않았습니다.
특히, 미하일 8세의 사위였던 노가이 칸은 불가리아를 공격하며 종종 로마도 약탈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사위들도 로마의 항구를 점령하는 등 로마와 대립각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1335년, 훌라구 울루스가 후계 단절로 붕괴하고 맙니다.
주치 울루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말년, 콘스탄티노플 침공 계획까지 세우지만 실제로 공격하진 않았습니다.
이후 몽골과 로마의 교류는 딱히 없었습니다. 로마는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며 장대한 내전과 함께 멸망을 향해갔고 주치 울루스 포함 몽골 제국 전체가 내분과 흑사병이 겹친 크나큰 혼란의 시기를 겪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제국의 인연은 끝이 납니다.
+번외, 원나라와의 교류 흔적?
여담이지만, 명사에서 로마인이 원명교체기 혼란과 몽골이 갈고닦았던 실크로드 무역로가 다시 붕괴하자 이도저도 못할때, 명 태조가 "왕조 바뀌었으니 앞으로 사신 나한테 보내셈!"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이때 로마는 요안니스 5세가 말아먹을대로 말아먹어서 사신 보낼 기력도 없었던 상태라 이후 따로 사람을 보내진 않았다 합니다.(이를 보면 해당 로마인도 단순한 행상인은 아니었던걸로 추정됩니다)
이를 보면 원나라 본토와도 어느정도 교류를 했던걸로 추정됩니다.
뭐 실크로드 무역로가 워낙 잘짜여있었고 로마도 몽골 칸국들과 적극적인 관계였으니 본토와도 어느정도 교류는 었겠고
이미 니케아 제국 시절에 카라코룸에 사신을 보낸 전적이 있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