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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오스 분열: 동서교회 갈등의 절정 (끝)

891년, 포티오스가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에서 사망한 뒤로 포티오스 분열에 관여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인물들은 모두 역사의 뒤로 퇴장했다. 그러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대립은 이들이 모두 역사의 뒤로 퇴장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로마는 포티오스가 879년에 소집했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부정했다. 전임 교황 요한 8세가 인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공의회에서 의결된 사항들, 곧 필리오케와 서방 교회의 전례 부정, 그리고 로마의 수위권을 실질적인 수위권이 아닌 명목상의 수위권으로만 제한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로마는 869년에 이그나티오스가 소집했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제 2차 니케아 공의회의 뒤를 잇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선언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정반대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이그나티오스의 공의회, 곧 로마의 실질적 수위권을 인정하고 포티오스를 정죄한 869년의 공의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포티오스의 공의회야말로 제 2차 니케아 공의회의 뒤를 잇는 정통 에큐메니컬 공의회라고 주장했다.


이 둘의 주장이 결코 봉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니케아에서 처음으로 공의회를 소집한 이래로 동방과 서방이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전통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결국 787년의 제 2차 니케아 공의회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의 공의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따로 자신들이 관할하는 교구의 성직자만을 소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포티오스가 문제를 제기한 필리오케 역시 해결되지 않은 불씨로 남았다. 서방 교회는 여전히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필리오케를 끝까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라틴어 역본에 삽입했다. 동방 교회 또한 계속해서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현되기 때문에 필리오케는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전례도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게 되었다. (가령, 부활절을 예로 들자면, 부활절을 준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을 서방 교회에서는 재의 수요일, 즉 부활절 46일 전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했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부활절 48일 전을 정결 월요일이라 하여 그 날부터 사순절이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포티오스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이그나티오스는 차후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모두에게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나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만 시성되었고 로마에서는 시성되지 않았다.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역으로 자신들을 발 밑에 두려했던 포티오스를 로마가 좋게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포티오스가 빚어낸 분열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해결할 수 있는 시기는 결국 오지 않았다. 로마는 882년에 교황 요한 8세가 암살당한 뒤로 이탈리아 왕국의 왕들과 갈등을 빚거나 그들에게 종속되어 교황의 시체가 재판정에 세워져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의 능욕을 겪거나 10세기 초, 세르지오 3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뒤에는 로마시의 유력 가문이었던 테오필락투스 가문과 해당 가문의 귀부인들의 영향 하에 놓이는 소위 창부정치를 겪으며 콘스탄티노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과 기회 모두 주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또한 이그나티오스를 지지하는 성직자들과 포티오스를 지지하는 성직자들끼리의 갈등이 심화되는 와중에 결국 황제에 의해 총대주교 자체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포티오스처럼 교권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는 인물이 더 이상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오스가 만들어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은 관련 인물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결코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었고 그 결과는 결국 1054년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상호 파문을 통해 교회의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지고 말았다. - 물론 이 당시에는 서로가 또 상호 파문을 했다고 여기는 정도였다. - 이 후, 동서 교회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결국 1964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90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교황과 총대주교로서 만남을 갖고 다음해인 1965년에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전까지 서로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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