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티오스가 공의회를 소집한 목적은 명료했다. 10여년 전에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결의된 사항들의 파기, 그리고 로마에 대한 공세.
10여년 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항들이 결의되었다.
1.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수위권 인정
2. 세속 권력자에 의한 성직자 임명 금지
3. 포티오스와 그를 성직자로 서품한 시라쿠사의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정죄
포티오스는 이번 공의회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뒤엎고 로마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려 했다. 그를 총대주교로 재임명한 바실리오스 또한 동서 교회의 갈등 봉합이 불가리아로 인해 물건너간 것을 겪었기에 포티오스의 이러한 시도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로마의 교황 요한 8세(872 ~ 882 재위) - 기존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이미 872년에 선종 - 또한 이탈리아를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동로마의 지원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포티오스의 공의회 소집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는 사절단에 대주교 이상만 입을 수 있는 팔리움 - 양털로 짠 견대로 제의를 입은 다음 그 위에 걸친다 - 을 선물로 보내며 포티오스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을 인정하기까지 했다.
포티오스가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1. 869년의 공의회에서 결의된 사항의 파기 및 869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무효 선언
2. 서방 교회가 독단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삽입한 필리오케에 대한 규탄
3. 서방 교회만의 독자적인 교회 전례에 대한 규탄
1번은 당연했다. 포티오스가 보기에 지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거기에 더불어 자신과 자신을 서품한 그레고리우스를 부당하게 정죄한 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이었다. 2번과 3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방 교회의 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포티오스 자신이 보기에 서방 교회의 독자적인 교회 전례,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서방 교회가 멋대로 삽입한 필리오케는 신학적으로 이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당 공의회를 통해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적 우위를 로마에게 인정시키고 로마의 수위권을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기존의 로마 교황들 - 니콜라오 1세, 하드리아노 2세 - 이었다면 포티오스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해당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 8세는 달랐다. 해당 공의회를 인정했다. 첫 번째로 해당 공의회를 반대해 대 이슬람 전선에서 동로마를 이탈시키는 우를 범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포티오스의 제안, 곧 해당 공의회를 로마에서 인정하는 대신 불가리아를 다시 로마의 관할로 넘기겠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불가리아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산하로 들어가겠다고 하며 로마에게 빅엿을 날려준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끝난 후, 더 이상 포티오스와 로마의 갈등은 없었다. 엄밀히는 포티오스와 로마 모두 각자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서로를 공격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먼저 로마의 상황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끝난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882년에 교황 요한 8세가 암살당하고 말았다. 성탄절을 9일 앞둔 12월 16일의 일이었다. 요한 8세는 교황 중에 최초로 암살된 교황이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교황청은 수십년 동안 내우외환을 겪으며 콘스탄티노플에게 간섭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포티오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로마가 주장하던 로마 수위권이 일단락 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후에는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정책에 협조하는 것은 물론 재위 후반부에 실의에 빠진 황제를 위로하느라 바빴다. 바실리오스는 자신이 아끼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죽은(879 사망) 이후로 실의에 빠졌으며 콘스탄티노스의 사망으로 차기 황제로 내정된 둘째 아들 레온에게 극단적인 적대감을 보였고 포티오스는 바실리오스의 이러한 행위를 막지 않았다.
886년, 바실리오스가 사냥 도중 사슴에게 공격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 혹은 레온이 사주한 집단에 의해 암살당하자 - 황제의 장자인 레온이 로마의 다음 황제로 즉위했고 레온은 전임 황제와 밀접한 관계였던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그를 아르메니아의 한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그것은 포티오스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했음을 의미했다. 포티오스는 추방된 이후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지 못했고 891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오스가 불러일으킨 일련의 사건은 당사자들의 퇴장으로 인해 일단락된듯했다. 그러나 겉으로만 일단락되어 보이던 이 분열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