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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전사 (5)

무너진 지옥의 궁정 한켠에서 추잡한 날개짓이 울려퍼진다.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악마 왕자가 불러낸 살덩이들이 불패의 전사를 싣고 지옥의 지상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들은 연신 날개짓을 하더니 캐캐묵은 먼지와 책 내음으로 가득한 서재로 날아들어가 싣고 온 정복자를 철퍼덕 패대기 친다.

"놈들이 멍청한 건지, 애송이가 뒤 끝이 있는건지."

올라오는 동안 잠을 청하고 있던 불패의 전사는 잠이 깨는 바람에 불쾌함을 내뱉듯이 낮게 으르렁댄다. 부러진 왼팔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른 다리로 의자에 오르려 하지만,

"고통스럽고, 움직이질 않는군."

"더 이상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아."

190년 전 더스틴의 승리로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에 의해 더스틴의 육신을 차지했지만, 그 세월 동안 육신은 너무나 늙은데다 악마들의 왕과의 전투로 남아있던 기력 마저 모두 소진했다. 애초에 불패의 전사는 악마들의 왕과 싸워서 온전하게 이길거라 확신하고 싸웠던 게 아니었다. 그는 이 마법을 풀고나면 진정한 패배, 진정한 죽음을 맞이할 순간이 왔음을 확신한다.

"브렌다."

그는 자신에게 항상 도전하려고 드는 소녀의 이름을 속삭인다. 잠시 침묵을 가진 뒤, 불패의 전사는 애절하게 실소한다. 큰 소리로 웃지 않았지만 어찌나 절절한지 온 궁정에 울려퍼진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맹세가 지켜질 것임에 기쁘지만, 가족을 잃을, 바라는 일을 이루지 못할 소녀에게 동정한다.

"악마들의 왕, 네 말이 맞아. 난 이기심으로 가득찬 괴물일 뿐이다."

전사는 슬픔을 나누는 일 없이 홀로 슬퍼한다.

"웃고 계시는 군요. 승리를 자축하던 참입니까?"

불패의 전사가 슬픔에 젖은 웃음을 계속 껄껄 대던 참에 악마 왕자가 문을 열고 다가온다.

"왔군. 승리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전리품을 하나 더 챙겨야겠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요구하시는 군요. 일단 그게 뭔지 들어보고요."

악마 왕자는 속으로 이것이 정복자의 끝없는 탐욕인가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의족."

"대충 만든 것도 괜찮아, 설산을 내려가고 도시까지 도착할 때까지 부서지지만 않으면 돼."

왕자는 잠시 말이 없다 손으로 이마를 쑥 훝으며,

"그거라면 마법을 푸는 동안 저희 쪽 장인들에게 주문을 넣어보겠습니다. 한 1주는 걸릴거에요. 당신 마법을 푸는데도 그정돈 걸릴거고요."

"네 아비가 내게 마법을 걸 때는 반나절도 안걸렸는데."

"일단 앉으시지요."

악마 왕자가 손가락을 튕기더니 그의 주변에서 살덩이들이 돋아난다. 불패의 전사를 심연에서 이곳까지 모셔다 준 충직한 사역마들이다.

"그 살덩이들이 불친절하다는 건 알고 있나?"

"올라가시는 동안 잘만 자시던데요, 뭘."

"그 얘기가 아니라"

"그래서 마법을 푸는데 1주일 씩이나 걸린다는 거, 지난 천년 동안 그 마법을 가지고 다녔던 걸 생각해보면 이만한 가성비가 없을 겁니다."

살덩이들은 전사의 어깨를 빨아들이듯이 반쯤 삼킨 뒤에 추잡한 날개를 퍼덕이다 그를 의자에 살포시 앉혀놓는다.

"좋다. 그렇다면 그동안 뭘하면 되는 거지?"

"천년 전에 왕께서 이 마법을 걸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

"환상 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라고 했지."

불패의 전사는 부러진 왼팔을 겨우 휘둘러 모기 내쫓듯이 살덩이를 쫓아내며 왕자의 질문에 대답한다.

"난 그 환상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악마들의 왕도 내가 무엇을 볼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했지."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법이 걸려있었던 거고요. 이번에도 비슷할 겁니다."

푸른 피부의 왕자가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며 날라온 살덩이를 집어들고 반으로 찢더니,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붓처럼 휘둘러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나간다.

"환상 속에서 당신이 처할 상황은 제가 짐작은 못하겠지만, 뭔가 싸우게 될겁니다. 다들 그걸 못해서 영혼이 말소되버렸고요, 당신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채로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을 받았고요."

"악마들 사이에선 이런 마법은 손도 안댄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유가 있다니까요."

악마 왕자는 전사를 중심으로 불가해한 문양을 새겨 넣은 원을 그려넣고, 그 원 주위로 커다란 원 같은 것을 하나 더 그려낸다.

"그거 설마 뱀인가? 애매하게 생겼군. 그림 솜씨는 네 아비가 더 낫구나."

"제가 뱀이라고 생각해서 그려넣는 게 더 중요합니다."

왕자가 그린 꼬리를 물고있는 뱀은 뭔가 흐리멍덩한 게 뱀이 아니라 물고기의 머리처럼 보여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건 마법의 해제니까, 완성시킬 필요 없이..."

그는 발바닥으로 완성된 둥근 뱀의 허리를 슥 문질러 지워버린다.

"해제는 준비됐습니다. 당신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시작할겁니다."

"... "

전사는 뭔가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아니 뭔가 망설이는 것처럼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떨군다.

"아무래도 빨리 하시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을겁니다. 이쪽은 일주일씩이나 더 주민들을 대피처에서 살게 해야하고, 저 역시 당신이 지옥에 있다는 게 메스껍고요."

"너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이자 최후의 요청이다."

"마법을 푸는 일주일 동안, 그리고 내가 지옥을 떠나고 나서 지옥문을 닫는데 전념해라. 그래야만 할거다."

왕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벙찌다, 그대로 비웃더니

"자비라니요, 당신 같은 게. 우리도 그동안 안닫고 싶어서 안닫은 게 아닙니다. 정녕 저게 문인지조차 모르겠고요. 문이었다면 닫을 수가 있어야죠."

"나의 아버지는 항상 주술로 만들어낸 창문으로 지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지옥을 동경하던 인간일테니 최후의 순간에 그 사념을 담아 만든 것이겠지."

"그래도 여전히 그건 창문 같은 것일거다."

왕자는 잠시 비웃다 불패의 전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정보에 놀라 살덩이 하나를 잡아채 손톱을 휘갈기며 그들만의 문자로 메모를 새긴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정보네요. 지옥 입장에선 고대의 인간의 육신으로 만들어진 끔찍한 흉물이라는 것 밖에 알수가 없었다고요."

"참, 당신 혈육이라고요? 그렇다면 해제하는 동안 피를 좀 채취하겠습니다."

"좋을대로 해라."

불패의 전사는 숨을 들이마시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했던 맹세를 되새긴다. 숨을 내쉬며, 상실에 도달할 가여운 소녀를 떠올린다.

"이제 준비됐"








"... 다."

불패의 전사는 말을 마치는 순간 자신이 칠흑 속에 혼자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천둥이여, 그대에게 걸맞는 피뢰침을 보았으니, 나의 부름에 응하여 내리쳐라!"

불패의 전사는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커먼 바닥을 들어내어 하늘로 던졌고, 누군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전력질주한다. 그의 팔다리가 바람을 찢으며 내달릴 무렵 시커먼 하늘에서 시퍼런 빛 줄기가 전사의 정수리로 향한다. 그는 자세를 낮춘 뒤 도움닫기 하여 몇 초 전에 던졌던 바닥을 향해 도약했고, 그 바닥을 발판 삼아 힘찬 발구르기로 박살내버리며 외침의 근원을 향해 날아간다. 그의 등뒤로 수십 차례의 천둥이 내리 쬐니 시커먼 칠흑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불패의 전사가 허리를 틀며 무릎을 구부리다가, 너댓번 회전하다 쭉 뻗으며 바닥을 강타한다. 그가 소리의 근원을 깔아뭉갤 셈으로 내지른 공격은 전방의 바닥을 기울여 태산을 일으켰고, 주술을 외친 누군가는 그 반동으로 구름처럼 높이 뜬다. 전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태산을 뛰어오르며 도약한다.

"천둥이여, 나는 항상 그대의 재주에 우레와 같은 박수로 찬양하니, 이에 보답하라!"

"번개야, 너의 목소리는 나의 우상이니, 나의 주먹에 깃들어라!"

주술과 함께 누군가의 오른팔에 이글대는 푸른 빛이 감돌더니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며 그 얼굴을 비춘다. 불패의 전사는 그를 알고 있다, 그 주술을 기억한다. 추방자의 후예 더스틴의 주먹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주먹 중에 가장 강력하다. 190년 전에 더스틴과 자신의 주먹을 맞대었을 때, 천둥의 힘으로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사지를 박살냈으며, 추방자들과의 전쟁으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도시를 한눈에 볼 정도로 높이 날아갔다.

"두번은 안 통해, 더스틴."

전사는 태산의 정상에 도약하기 전에 높고 가파른 봉우리를 떼어내어 더스틴을 향해 던진다. 더스틴은 천둥의 힘이 깃든 주먹을 휘둘러 봉우리를 박살내고 다음 표적을 찾지만, 그 틈에 봉오리의 파편을 발판으로 딛고 따라올라온 불패의 전사가 던진 돌에 가슴을 관통당한다. 그럼에도 더스틴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고 주먹을 더욱 높이 치켜드는데

"날 이미 죽였잖나, 소원을 이룬게 아니었나?"

더스틴이 잠시 휘청하는 사이 잽싸게 더스틴의 뒤를 잡은 불패의 전사는 소용돌이 치듯 회전하면 주먹을 날린다. 더스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빠르게 뒤로 돌아 주먹을 뻗는데, 간발의 차로 전사의 주먹이 더스틴의 두개골을 깨부순다. 더스틴은 머리에서 피를 흩뿌리며 날개가 찢어진 새마냥 추락하는데, 불패의 전사는 놓치지 않고 쪼그린 자세로 강하한다.

"그래도 자네는 나와 맞붙었던 자들 중에 최강이야. 정말로 진짜 자네였으면 내가 또 졌을지도."

불패의 전사가 일으킨 태산은 화산처럼 정상이 깊숙히 패였고, 그의 발 아래 더스틴의 것으로 추정되는 육편이 나뒹굴고 있다. 그는 환상 속 더스틴의 최후에 어느정도 예를 표하고 난 뒤 태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정황상 더 있겠군. 나를 죽였던... "

전사는 저 멀리 희멀건 짐승의 형체를 포착하자 그는 그것이 다윗과 하얀 늑대임을 확신하며 도약한다. 도시가 마을이었던 시절 까마득하게 오래 전 그가 다윗을 처치했을 때, 하얀 늑대는 슬픔에 젖어 크게 울어 재끼며 세상을 수천만번 뒤흔들었고 그 혼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전사는 그대로 늑대에게 상반신을 먹혀 최후를 맞았다.

"짐승을 먼저 잡아야했던 거지."

불패의 전사의 늑대에 두개골에 정확히 착지함과 동시에 다윗에게 달려들고, 다윗은 착지의 충격에 휘청이다 어영부영한 자세로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전사의 돌려차기 한번에 머리가 터져버린다. 그는 뒤돌아서 머리가 뭉개진채 혀와 눈을 내민 늑대의 주검을 보며 잠시 주머니를 뒤적대다,

"우리 도시의 풍습은 아니긴 한데. 어디서 들었거든. 자, 받아라 늑대야. 네 주인과 함께 나눠먹을 노잣돈이나 해라."

도시에 유통되는 은 동전을 엄지로 튕겨 늑대의 주둥이 언저리에 던져둔다. 그러자 그는 날카로운 향기를 느끼고 주위를 돌아본다.

"아우라."

숫사슴 같은 뿔을 가진 회색머리의 여인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서성이며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머리가 휘날릴 때 마다 숲 속의 나뭇잎이 머리카락 틈 사이로 휘날리고 상당히 멀리 있는데도 숲의 내음이 전사의 코를 찌른다.

"네 마법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고."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칼날을 수천개 씩 깔아버리고, 또 그게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지."

"너는 내게 그게 세상에 뻗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라고 귀뜸했지만, 내 머리가 그리 명석하진 못해서."

전사는 마녀를 처치할 방법에 고민을 하며 너스레 수다를 떨어보지만, 마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한다.

"전에는 좀 더 정의로웠던 거 같은데 말야. 네가, 내게 도전했던 이유도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는 이유였지."

폭정과 굶주림에 못버텨 전사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던 시절, 그저 간편하다는 이유로 반항하는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부정을 저지른 가족들을 추방시키던 폭정의 시대. 혹한이 지나고나서, 어느 봄 날 숲 속의 마녀 아우라는 그에게 폭정을 그만두라며 목숨을 걸고 도전했고, 불패의 전사는 모든 것을 자르는 예리한 칼날에 당해내지 못했다.

"아우라, 너는 정말로 올바른 사람이다. 그런 올곧은 사람이기에 나를 처단해 마땅하지. 그런 널 마녀 따위라고 불렀던 걸 후회한다. 내게 도전해줘서 정말 고맙다."

전사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뜯어내며 아우라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하지만 진짜 아우라는 영악하기도 해서, 지금 이 순간에 숲 속의 무언가로 변장했는데 말야. 안타깝게도 여긴 숲도 없고, 널 모방한 이 무언가는 똑똑하지도 않군."

"그래도 덕분에 뭔가 마음이 차분해졌어. 고맙다, 아우라."

불패의 전사는 사람 머리만한 돌덩이 두개를 아우라를 향해 던진다. 바닥에서 뜯어낸 돌덩이들은 아우라의 보이지 않는 칼날에 조각조각났으나 그것만으로도 아우라의 머리를 뚫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아우라가 쓰러지자 그녀의 회색 머릿결이 피웅덩이로 붉게 물들어간다.

"이제 슬슬 됐을 텐데."

불패의 전사는 자신과 맞서 싸웠던 강적들 중에 자신을 죽였던 자가 누가 있나 고민하던 차에 발치에서 비늘이 땅을 기는 소리에 흠칫 한다.

"실뱀이로군. 꼬리를 물고 있는."

명주실처럼 곱고 가느다란 실뱀이 스스로를 문 채 비늘과 근육을 수축시키며 바닥을 돌고 돈다. 불패의 전사는 그 뱀을 집어 들어올려,

"마법은 악마들의 왕이 걸어줬지만, 마법의 주인은 너란 거지?"

양손으로 잡고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완벽한 원을 이루었던 뱀은 점차 타원형으로 쳐지는데 전사가 온 힘을 다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가 자세를 잡고 더 거세게 당기자, 바닥이 균열이 일어나 주변을 무너뜨린다. 실뱀이 쳐지고 늘어나자 그 굵기가 점차 얆아지는데 힘을 주면 줄 수록 주변의 칠흑이 걷혀간다. 칠흑의 세상이 다 걷혀 눈이 부실정도로 새하얗게 될 무렵

전사는 손 끝에서 톡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왕자. 이 의족은 대체 뭐지?"

"전하, 그것은 정복자가 추가로 요구한 물건입니다."

"쯧. 그건 그렇고 놈의 정보를 토대로 지옥문을 닫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정복자의 혈액으로부터 시각적 기억을 되살려, 지옥문 만들어낸 주술사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아직 확인 중이지만, 만일 주술사의 영혼이 지옥에 도달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면"

"아직 그 영혼이 육신에 속박되어 있다는 거군. 그 지옥문 말이야."

"맞습니다. 지옥문을 열게 된 이유나 원리를 둘째 치더라도, 그건"

"지옥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희소식이군."

악마들의 왕과 왕자는 서재에서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희열이 묻어난 대화를 나눈다. 왕은 이전에 불패의 전사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전부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슬슬 정복자가 깨어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법 해제의 실패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우선은 가능성 자체를 우리가 분석할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전하께서 처음 정복자에게 마법을 걸었을 때보다 더 힘든 시험을 치루고 있을 거란 겁니다. 하지만 아직 마법이 걸린 상태로 해제 주문에 '패배'하게 된다면,"

"최악이군."

"무슨 최악? 아, 그래. 왼다리하고 오른팔이 없는 현실로 돌아오다니. 최악이군."

악마들의 왕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펄럭이며 뒤를 돌아보자, 불패의 전사가 의식을 되찾은 채 왼팔로 오른 다리의 무릎을 두들기고 있었다.

"다 나은 건 아니지만 뼈는 대충 붙었군.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정도라니. 하긴, 이렇게 까지 됐는데 예전처럼 팔다리가 다시 나진 않겠지."

"자네가 돌아오니, 아주 살짝 안심이군. 이제 그만 꺼져주게."

왕은 전사를 고깝게 내려다보며 그가 얼른 지옥에서 나가줄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제가 의족을 인계하고 지옥문으로 인도해드리지요."

"부탁하지, 왕자. 난 그동안 주민들의 대피령을 끝낼 준비를 하겠다."

악마 왕자가 붉은 의족을 전사의 무릎에 끼워맞추자 접합부에서 추잡한 촉수가 절단부를 빨아들이듯이 흡착한다.

"으악, 도대체 이건 뭐냐?!"

"이 의족이 당신의 왼다리라고 여기고 움직여보세요."

전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어서길 바라자 오른 다리, 그리고 의족 하나로 곧게 일어선다.

"영 기분이 찝찝하긴 한데, 이것도 네가 부리는 추악한 사역마인가?"

"사역마는 아닙니다, 가축을 가공한거에요."

"더 끔찍하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 요구는 정확히 들어줬다."

"담소는 그걸로 충분하겠지. 자네가 오래있으면 있을 수록 주민들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하나만 더. 악마들의 왕, 내 영혼이 이 지옥에 오는 것을 기대해도 좋다."

악마들의 왕이 그 말을 듣자 이마를 매만지며 실소한다.

"아무 의미도 없네만."

"뭐라고?"

"자, 정복자여. 우리가 인간의 영혼을 고문하고 그것을 행하는 관습과 사업이 발달하기 했지만, 인간의 영혼은 제 육신을 떠나는 순간 이미 자아를 잃어버려. 지옥에 도달했을 때 그 영혼을 들여다 봐도 그게 어떤 자의 영혼이었는지 밖에 알 수 가 없어. 고통을 가해도 의미가 없단 말일세."

"내가 왜 그렇게 살아있는 자네를 죄인이라며 온 힘을 쏟아부었는지 이제 알겠나?"

"허."

전사가 그 말을 듣고 잠시 어이를 잃은 사이, 푸른 피부의 왕자는 이전처럼 날개달린 살덩이를 불러내 불패의 전사를 반쯤 삼키게 한다.

"이거 제법 불쾌한 거 아나?"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살덩이에 휩싸인 전사와 그 옆에 나란히 날개를 펄럭이는 왕자는 붉은 대기를 날아다니며 지옥문을 향한다.

"일주일 전에, 왕과 다투실 때,"

"당신과 왕께서 나눈 대화를 이후에 다 들었습니다. 처음엔 후회를 고백했지만, 전투가 시작했으니 그런 적이 없었던 것 마냥 왕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죠."

"... 그렇다."

"그럼에도 지옥문을 닫으라는 당신의 충고 덕분에 어느정도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당신 같은 잔혹한 괴물이라도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 질문에 불패의 전사는 길게 침묵하다가,

"그렇다면 애송이, 너는,"

"왜 싸움을 그만두고 마법을 풀어준거지? 그대로 방치했어도 난 마법을 풀지 못했다."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그곳 심연은 어머니의 봉인을 겸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주먹을 내리치려던 그 순간 막지 못했다면 어머니는 고통 받는 그대로 깨어나셨을겁니다."

"어머니께서 봉인에 풀려나서 처음 목격하게 될 것은 기억 속에서, 악몽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이 무자비하게 남편을 내리치는 광경이었겠지요. 그게 싫어서입니다."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다소 무례한 일에 악마 왕자가 자신의 마음을 거침없이 밝히며 대답하자, 불패의 전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올바른 일을 했다."

"당신한테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칭찬이네요. 자, 지옥문 가까이 왔습니다."

악마 왕자와 전사를 품은 살덩이는 추잡한 날개짓을 고귀하게 흔들더니 천천히 지면으로 향한다. 이전과 다르게 살덩이는 전사를 패대기 치지 않고 부드럽게, 발바닥 부터 지면에 내려놓는다.

"아까 그 질문에 대답이다. 너희에게 저지른 짓을 후회한다, 아주 명확히. 하지만 네게 그런 충고를 한 건... 혹시나, 브렌다가 꼭지가 돌아버려서 내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해낼까봐 걱정되서 그런 거다."

"괴물은 괴물일 뿐인 거군요. 이기적이긴."

악마 왕자는 전사의 대답에 뻔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럼 작별이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정복자."

"반드시 지옥문을 닫아라, 왕자."

불패의 전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옥문을 넘어선다.

"하! 이제서 애송이 취급은 그만두다니,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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