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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6일자 수필 단편

"옛날 옛적에" 같은 관용구를 붙이지 못할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 없습니다.

불편한 분위기가 흐르던 마을엔 그 분위기를 연료 삼아 불이 번져기 시작하고, 사방에 연기와 재로 가득합니다.

내내 불편했음에도 피어오르던 기쁨의 웃음과 행복의 미소는 뚝 끊기고 그 자리엔 비명이 대신해 아비규환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단자들을 전부 죽이자!"

애매하게 머리가 벗겨져 흉측한 대머리를 가진 남성이 성난 민중들 한가운데 서서 그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피로 물들어있는 그의 사제복과 불타오르듯이 불거진 두 눈동자가 그가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총대주교 성하의 전언이 있으셨다. 우릴 배반하여 말도안돼는 교리를 내세우고 신을 등진 이들을 먹여 살릴 가치가 없다고. 온 나라에서 추방하시겠다고."

"형제 자매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다. 이 이단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자! 이는 곧 성전이다! 신의 뜻이다!"

"와아아아아!"

이단자들은, '형제 자매들'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편해하고 미움 받기는 했지만, 어제 까지만 해도 먹고자고 웃고 떠들고 대화 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형제자매들과 혈육인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베여서, 뭉개져서, 깔려서, 절단되서, 꽂혀져 최후를 맞이하고 아직 살아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마을에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놓치지마라!"

하지만 형제자매들은 결코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 두세요, 삼촌! 어제까지만 해도 제가 맥주를 서빙해드렸잖아요. 도대체 왜-"

"죽어라, 이 이단자야!"

낫으로, 식칼로, 날카롭게 부러뜨린 대걸레로, 날이 빠진 장검으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교리를 거역한 자를 난도질하기 시작합니다.

이단자들의 생명을 훼손하는 행위야말로 신에게 헌신을 바치고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에 믿어 의심치 않는 그들입니다.

그렇게 한바탕 그들만의 성전을 치루며 도망치는 이단자들을 쫓아 사냥하던 형제자매들은 문득 묘한 시선을 느껴, 하나 둘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군요.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동그랗게 모여 엉거주춤 서 있는 거한들. 아무데서나 주운 헝겊에 눈 구멍을 뚫어 뒤집어 쓰고 벗어재낀 상반신에, 웃기도록 펑퍼짐하고 헐거운 가죽바지, 커다란 도끼를 지고 있는 사형집행인들이었습니다.

집행인의 덩치를 보고 다가가길 꺼려 하던 형제자매들이었지만, 선두에 신을 향한 헌신의 길로 인도하는 대머리 사제가 있기 때문에 곧바로 공포를 떨쳐내는 그들이었습니다.

사제가 앞서가자, 형제자매들도 그의 뒤를 따릅니다.

"형제여-"

사제가 집행인을 형제라 부르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어 친밀감을 표하려 할 때

"저는 당신의 형제가 아닙니다."

집행인들 중 가장 젊은 목소리가 사제의 손길을 거절하며 형제자매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으앙 으아아앙"

"배고파아~"

"으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어린 아이들의 육성에 사제는 호기심을 가지고 사형집행인들 너머를 바라보려하는데, 젊은 집행인은 사제에게 끼어들어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라며 사제의 행동을 제지하였습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팔짱만 낀채 이 성전을 바라만보고 있소?"

사제는 눈웃음으로 사형집행인들을 비웃으며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 영주가 판단한, 그리고 법정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저희는 그들의 도구가 되어 죽음을 집행하고 목숨을 거둬가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 성전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이단자만도 못한 배교자라는 게 아니오?"

"섣불리 결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앞서 말했듯이 저희는 공적인 일을 맡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 일은 모두가 비웃고 멸시하며 원치 않는 일이지요. 신에게 헌신을 다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선을 넘지 않고 우리 자리를 지키는 것도 신에게 헌신하는 일."

"만일 그들이 사형대에 올랐다면, 저희는 망설이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저흰 참견하지 않습니다."

젊은 집행인이 논리정연하게 반박했으나 사제는 그들이 가소롭다는듯이 얼굴을 돌려 형제자매들에게 고개를 까딱였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넌 무고한 내 형을 죽였어! 그렇지 않나? 영주에 거스른다는 이유 만으로 누명을 쓰고 네 도끼에 목이 날아갔지. 그러고도 네가 신에게 헌신을 바치는 자라고 맹세할 수 있나?"

형제 자매들 중 하나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신의 형을 들먹이며 사형 집행인을 향해 한이 맺힌 탄원을 날렸습니다.

익명의 처절한 호소에 헝겊 너머의 젊은 집행인의 얼굴은 경직되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이미 과거로 돌아가, 그 때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군요.

[죽고 싶지 않아! 아무 잘못도 안했단 말이야!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집에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형수는 도끼에 목이 달아나는 그 순간에도 삶을 바라고 있었고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당시의 집행인도 영주가 말도 안돼는 이유로 누명을 씌운 것은 물론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집행인이 마주한 것은, 피를 뿜어내며 경련하는 몸뚱아리와 그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창백한 얼굴 뿐이었습니다.

"전제가 잘못되었소."

훨씬 굵고 듬직한 목소리의 반박이 젊은 집행인을 다시 현재로 인도하였습니다.

"['넌' 무고한 내 형을 죽였어.]"

목 아래에서, 가슴 위까지 이어진 세로로 긴 흉터가 인상적인 선임 사형 집행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가'?"

어깨와 양팔을 크게 펼치며 자신들을 가리키는데, 심지어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게 몹시 익살스럽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이단자들을 학살하는 당신들이야말로 우리 중에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소?"

"더러운 일을 하는 주제에 뭐가 어쩌고 저째?!"

"너흰 도구에 불과하니 이번에도 신의 뜻에 따라 쳐죽이면 된다. 우리가 신에게 헌신하니, 너희가 우리 지시를 따라라!"

형제자매들의 압박에 패닉에 빠져버리고만 젋은 사형집행관을 위해 선임 집행인이 그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했으나,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습니다.

"당신들 중에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명령할 권한도, 우리를 다룰 권한도 없소! 우린 법의 집행에 따라 생명을 거둬가는 도구일뿐!"

"모조리 죽여주마, 이 배교자야!"

"형의 목숨을 앗아간 주제에!!"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형제자매들을 멈춰 세운 것은, 그들의 맨 앞에선 사제였습니다. 사제가 조용히 해달라는 손짓하자 방금전까지 왁자지껄 아비규환이던 형제자매들의 아우성은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았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좀 흥분하긴 했소."

"당신들의 논리엔 무엇 하나 틀리지 않았소. 그대들이 죽어 마땅한 자들을... 처단해주는 덕분에 신에게 헌신하는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게 아니겠소?"

사제는 방금 전까지 선동과 증오를 울부짖던 입으로 사형 집행인들을 옹호합니다. 그는 둥글게 선 집행인들 주위를 크게 돌기 시작하는데, 그의 발언에 비해 그 발걸음은 몹시 오만해 보이는군요.

"물론 억울하게 죽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법의 도구라는 이름의 익명 뒤에 숨어사는 거겠지."

"하지만 그 법의 도구가 이단자의 자식들을 숨겨주고 있다니!!"

어떻게든 아이들을 숨겨주려던 사형집행인들이었지만, 아이 여럿을 데리고 형제자매들의 시선을 벗어나기란 시간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더는 방법이 없어 둥글게 모여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려주는 방법을 택했으나,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울음과 절규는 그들의 덩치로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배교자다! 지금 당장 저들을 죽이자아!"

사제의 명령에 따라 침묵을 지키던 형제자매들은 분노와 증오를 한번에 폭발해, 사형집행인들을 향해 쏟아냈습니다.

"그대들에겐 신념이 없소. 대의도, 정의도, 신앙도, 헌신도."

"신의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하시오, 이 배-... 교자?..."

배교자를 처단하기 전에 일장 연설을 늘어뜨린 사제에게, 말로 이룰 수 없는 싸한 기운이 그를 휘감았습니다.

"말씀대로입니다. 저희에겐 신념도 대의도 정의도 신앙도 헌신도 없는 살인 도구일뿐입니다. 심지어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만큼, 여기있는 그 누구보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알고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잠시 패닉에 빠져 의기소침해 하던 젊은 집행관이 사제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차가운 분노를 뿜어내며 앞으로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생명의 무게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알고있다 변명하시더라도,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당신들의 신념도 목숨도 존중하지 못합니다."

그의 차디찬 분노와 흘러넘칠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절제된 살의는 형제자매들의 몸과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이 선을 넘으신다면,"

젊은 사형집행관이 도끼 손잡이 끝으로 땅에 선을 그으며, 무미건조하면서도 싸늘하게 말합니다.

"저와 제 동지들이 법 집행 유무를 따지지 않고 스스로의 보호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도끼를 휘두를 것입니다."

이어서 선임 집행관을 비롯한 다른 집행관 역시 허리와 어깨를 피며 그의 말에 동의하듯이 젊은 집행관과 나란히 섭니다.

2m를 넘어가는 그들의 키와 덩치 탓에, 마치 철벽을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자매들은 사형 집행인들의 기세에 초조해져 피에 절은 조잡한 둔기와 날붙이들을 고쳐쥐어보지만, 사형집행인의 번뜩이는 도끼날에 비하면 흉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에게 헌신하며 이단자와 배교자의 생명을 해친다는 그들의 불타오르는 의지는 이단자의 목숨을 보호하겠다는 선언 앞에서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곧 고작 다섯 명의 기백이, 수백명의 증오를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 이...!!"

"이봐."

그저 볼멘 소리로 배교자 배교자 웅얼거리던 사제를 향해 선임 집행관이 어깨에 팔을 올려 체중을 실어 몸을 기울이는데, 마치 친구 대하듯이 털털하게 사제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제님, 친구여. 당신의 '친절한 협조' 덕에 이번엔 살려주는 것 같소."

"헛... 소리!..."

사제는 허리를 수구린채 선임 집행인의 체중을 겨우 버텨 눈알을 부라리며 의문을 표하자, 선임 집행인이 즉답했습니다.

"수백번이 넘는 처형에서 우리는 죽이기만 했지, 누군가를 구하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 사이 젊은 집행인이 선봉으로 배교자의 아이들을 인도하고, 나머지 동료 집행인들 역시 그들 곁을 호위하며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저 배교자들을 당장 죽이시오! 저들을..."

사제가 사형 집행인들과 아이들을 배교자라 부르며 저주를 날리며 죽이라고 명령 해보지만, 형제자매들은 사기를 잃은 채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져 그들에게 길을 내줬습니다.

"그럼 이만. 협조해준 민중들에게도 감사를 표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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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골이야."

서류의 산에 파묻힌 채, 머리를 싸매며 천장을 바라보는 한 남자.

지체 높은 귀족이자 영주임을 나타내는 제법 멋들어진 털옷을 입고있지만, 자세히 보면 오랜 세월에 여기저기 손떼가 타고 오리털이 빠져 볼품 없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고용인들이여."

영주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채 세수하듯이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사형집행인들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습니다.

"이단자의 아이들을 맡아달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

선임 사형집행인이 영주의 집무실이 큰 것도, 그렇다고 또 작은 건 아니었지만, 그들 다섯이 모여 무릎 꿇고 영주를 알현하고 있으니 무지막지하게 좁아보이는군요.

"흠. 그래. 나쁠 건 없지. 이단자들의 머릿 속에 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자고."

"저희의 요청을 바로 들어주신다고요? 그냥 이렇게?"

영주의 망설임 없으면서도 뜻 밖의 수락에, 젊은 집행인은 머리에 뒤집어쓴 헝겊을 뒤흔들며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은 문제도 아니란 말일세. 진짜 골이 아픈건..."

수많은 서류의 산더미 속에, 총대주교의 인장이 박힌 서류 한장. 동방으로의 성전을 위해 파병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뭐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란 말이 있지 않나."

서류 하나에 머리를 끙끙 앓던 영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창 밖을 바라 보는데, 그의 시선은 창 밖 너머로 향해 병사들에게 포박 당한 채 끌려 가는 사제에게 닿아 있습니다.

"이만 나가봐."

사형집행인들은 무릎은 꿇은 채 영주에게 목례를 전한 뒤, 엉거주춤 어색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밖으로 나왔습니다.

쿵하고 문이 닫히자 하나 둘 흩어지는 집행인들.

그 중에 젊은 사형집행인과 선임 사형집행인은 아직 퇴근하지 않고, 집행인들의 사무실에서 도끼를 연마하고 있군요.

매일 같이 근무하는 직장 동료지만, 오늘따라 그 둘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흐릅니다. 젊은 사형집행인은 뭔가 머뭇대며 뒤집어쓴 헝겊 너머로 입술을 꼼지락 대는데,

"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거라면 도로 집어넣게."

사아아악 사아아악 불똥을 튀기며 숫돌로 날을 가던 선임 집행인은 그가 말을 건내기도 전에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숫돌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갑니다.

"그전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며칠 전 패닉에 빠진 젊은 사형집행인을 보호해줬을 때 처럼, 익살스럽고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익명을 강조하는 그였습니다.

"... 네."

젊은 집행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선임 집행인의 말에 수긍했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을 처음 봤습니다.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그거면 됐다."

고작 몇 마디가 오간 뒤 침묵에 잠긴 둘이었지만, 그 공백을 도끼날과 숫돌이 허용하지 않고 다시 사아아악 사아아악 날이 예리하게 갈리는 소리로 가득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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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후 이틀 뒤, 먹구름이 낀 날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포박된 채로 병사들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바로 조금 전, 법정에서 그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말이 법정이지, 영주가 단독으로 법의 처벌을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적어도 네 형은 내게 불만이 있었을 뿐이었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난 사제님과 함께 성전을 치뤘다. 총대주교 성하가 허락한 일이자 신에 대한 헌신이다. 내 형도 저 하늘 나라에서 자랑스레 여길텐데, 무엇이 부끄럽다는 거지?"

"그래? 그렇다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단 말이군."

그의 죽음은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청년은 안도감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었기 때문에, 순교할 것이기에, 신에 대한 헌신을 바칠 수 있었기에.

지금 그는 지역의 풍습에 따라, 사형 집행 전에 형장 주위를 몇바퀴 돌고 있는 덕에 그런 기분에 도취되기 적절한 때였습니다.

마침내 병사의 인도에 따라 탑의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까마귀 떼가 새겨진 철문은 소름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열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청년의 고막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부 헛소리야, 헛소리라고. 총대주교 성하의 선언을 멋대로 해석했다고? 내가? 그럴리가 없어!"

"... 사제님?"

청년을 이끌어주고 신의 뜻을 받는 법을 가르쳐 준 사제가, 분노에 찬 비탄을 내뱉으며 병사에 의해 개와 같은 꼬라지를 한 채로 목에 칼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영주놈, 지옥에 떨어질 테다! 살점이 달군 칼날에 베일 것이고 내장은 악마들의 먹이가 될 것이야!"

그가 형제자매를 선동할 때도 분노를 뱉어내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습니다. 청년은 신의 뜻을 퍼뜨리던 사제의 입이 그저 무뢰배의 주둥아리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신의 사자다... 신의 뜻을 따른다고! 내 목을 베어내면 너도 지옥에 갈거야!"

사형집행인이 도끼에 어깨를 걸친 채 사제에게 다가가자 악담을 퍼붓는 사제.

도저히 순교를 앞둔 자라고는 입에 담기 힘든 저주에, 청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제가 속삭여온 신앙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여기서 죽을 수 없다고! 총대주교 성하의 뜻을 널리 퍼뜨리고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가야만 한다고!"

지나가던 아이가 들어도 알 수 있는 변명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주겠네, 살려주게!"

방금, 청년에게 남아있던 모든 것이 부숴졌습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

도끼가 바람을 예리하게 가르자, 바닥에 물렁둔탁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그 물체는 데구르르 굴러, 청년의 발치에 다다랐습니다. 떨어지면서 바닥에 상당히 세게 부딪힌 탓인지 이마에 멍이 들고, 청년이 알던 그 대머리 사제가 맞기나 한지 의심이 들정도로 잔뜩 일그러지고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습니다.

청년이 절망에 잠길 무렵, 다시 한번 형장의 철문이 끼이이이익 열리더니 수십 수백에 달하는 사형수들이 청년의 뒤로 줄지었습니다. 모두 청년의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모두 죽음의 공포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목숨을 구걸하거나 자신은 신의 의지를 행한다며 헛소리를 늘어뜨리는 사이, 영주가 그 모든 소음을 무시한 채 형장에 들어왔습니다.

"영주님, 영주님!"

청년은 절박한 외침으로 영주를 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양 옆에 있는 병사에 제지 당해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습니다.

"우릴 전부 죽이실 작정은 아니시죠? 우린..."

"판결을 뒤엎을 순 없다."

영주는 몹시 무미건조하게 답하며, 초라한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댔습니다.

"우린 세금을 낸다고요, 머릿 수가 줄어들면..."

청년은 애써 억지 웃음을 지으며 영주를 설득하려 들지만

"머릿 수가 줄어들면? 총대주교 성하가 요구한 파병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물자 지원도 할 필요 없지. 훨씬 이득이야."

"너희 '형제자매'들과 사제 덕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전쟁을 피하게 되다니 감사할 따름이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영지에서 살인, 방화, 약탈은 사형이다."

영주는 청년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습니다.

"파병... 전쟁?..."

청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듯이 바닥에 처박힌채 읊조렸고, 병사들은 그를 피에 젖은 사형대로 질질 끌고 갑니다.

"영주님, 잠깐, 영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평생을!"

"그런 건 저 높이 있는 신에게나 바치시고요."

영주는 청년의 구걸에도 냉소한 비웃음과 함께 거절할 뿐이었습니다.

청년의 목엔 칼이 채워지고, 마치 개와 같은 수치스러운 자세로 그의 허리가 굽었습니다. 방금 전 그가 목격한 사제와 똑같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사형 집행인이 준비 운동하듯이 도끼를 형장 바닥을 향해 크게 휘두르자, 사제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도끼날이 다시 번들번들해졌습니다.

이번에 청년은, 마치 자신의 형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죽고 싶지 않아! 난 아무 잘못도 없어, 살고싶어, 살고 싶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형 집행인의 두 손은 분노와 살의에 도끼를 고쳐잡았지만 뒤집어쓴 헝겊의 두 눈구멍 사이로 넘어오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그윽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집행인이었습니다.

도끼날이 높이 올라가고,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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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새벽이자 너무나 이른 아침, 여명에 다다르기 전의 어둠입니다.

그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해돋이가 지평선을 향해 달려오고 있지만 그 때야말로, 하루 중에 행성의 그림자가 가장 짙을 때지요.

하지만 그렇게 깜깜한 밤 중에도 재와 불의 향기는 잠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억울하게 죽은 이단자들의 혼이 구천을 떠도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단자의 유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희생자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영주는 이들이 누가 누군인지 구분하지 않고 간단하고 빠르게, 우격다짐으로 치룬 화장이었습니다.

재를 거둬내고 남은 그들의 뼛가루는 한 곳으로 모아 합장되었습니다. 수십 수백명의 흔적을 담았지만, 그 수많은 사람의 종착지는 고작 한 사람이 누울 정도 크기의 초라한 무덤이었습니다.

[이단자들의 무덤. 교리를 거부하였으며 우리의 믿음과는 그 끝이 다르다하여 이단이라 불렀으나, 같은 신을 섬겼기에 이에 영주가 은혜로이 영면에 들 무덤을 베풀다.]

이단자들의 무덤 앞에서, 누군가 묘비에 새겨진 문구를 읊조렸습니다.

허름하고 수수한 것이 농노가 입을 법한 복장이지만, 흙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데다 무엇보다 2m가 넘어가는 키에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커다랗고 굵직한 손으로 묘비를 쑥 훑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습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천천히 자리를 벗어나 길 위에 올라서는 그.

길의 양 옆으로, 이단자의 무덤 말고도 수많은 무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비싼 값의 묘비부터 새겨진 이름조차 없이 그저 나무 십자만 세워진 무덤까지.

모두 법의 심판에 따라 사형집행인의 도끼에 생명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이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시체에겐 더 이상 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신에 대한 헌신을 바칠 의무도 없었기 때문에 유족 또는 가까운 지인들이 시신을 거둬, 각자의 지갑 사정에 맞게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덤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잠시 가던길을 멈춰, 들판의 꽃밭처럼 솟아난 무덤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이었지만, 사형수의 무덤들이 많다는 것은 여명 전의 어둠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처음 보는 녀석인데. 너 뭐야."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던 남자에게 굵고 듬직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남자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매일매일 이 시간에 만나잖습니까. 게다가 우리 아직 출근 전이에요."

"이젠 농담도 안받아주는거야?"

목소리의 정체는 그와 마찬가지로 농노의 옷을 입은 거한이었습니다. 늘어진 목 소매 사이로, 목 아래로 길게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였습니다.

둘은 짧은 말을 주고 받은 뒤, 침묵에 잠긴 채 사형수들의 무덤과 지평선을 바라봤습니다. 지평선을 뒤덮었던 시커먼 어둠이, 점차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햇살의 광선이 넘실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둘은 약속했다는 것처럼,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깍지 낀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어, 무언가 읊주렸습니다.

"저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고 하물며 교리가 무엇인지도 무슨 말씀을 남기셨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저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고 하물며 교리가 무엇인지도 무슨 말씀을 남기셨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스스로 어리석다며 밝히고

"그럼에도 이 미천한 자가 매일 같이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에게 향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이 미천한 자가 매일 같이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에게 향해 기도를 드립니다."

조용하지만, 떨리는 간절한 목소리

"누군가에게, 또는 제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아픔은 물론이고 억울함도 괴로움도 없는 하늘 나라로 보내주시고,"
"누군가에게, 또는 제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아픔은 물론이고 억울함도 괴로움도 없는 하늘 나라로 보내주시고,"

그들이 그들만의 장황한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여명이 점차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죽임 당한 책임을 제게 물어주소서."
"그들이 죽임 당한 책임을 제게 물어주소서."

해가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광선을 뿜어내고

"악행을 저질러 그로 인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생명을 빼앗기는 벌을 선고받았으나, 악인의 죄는 저의 도끼로 씻겨 나갔으니 그들을 벌하지 말아주소서."
"악행을 저질러 그로 인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생명을 빼앗기는 벌을 선고받았으나, 악인의 죄는 저의 도끼로 씻겨 나갔으니 그들을 벌하지 말아주소서."

시커먼 어둠이 점차 푸른 하늘로 희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벌하시겠다면, 그들의 죄마저 짊어지고 하늘 나라의 법정에 설 것이니, 그들을 용서해주소서."
"그럼에도 벌하시겠다면, 그들의 죄마저 짊어지고 하늘 나라의 법정에 설 것이니, 그들을 용서해주소서."

두 거한이 기도를 끝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여명이 높이 날아올라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춤과 동시에 그들을 향해 따스한 빛을 쏟아냈습니다.



-Fin



중간의 선임 집행관 캐릭터의 대사는 이곳의 게시판지기 님의 첫 조언에서 따온 대사네요. 그때도 그렇고 매번 크고 작게 감사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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