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교육과정 세대의 핵심 모토는 '한 가지만 잘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특기가 있다면 대학에 입학하여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토를 믿고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갔고,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당시 공고생 및 상고생)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특성화고등학교(당시 공고 및 상고) 졸업생들에게 서울에 있는 주요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처음으로 부여되었다. 당시 공업 계열 학과에만 입학할 수 있었던 많은 고등학생들이 일반학과(순수과학 계열)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비록 문턱은 있었지만 인문계 학생에 비해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례로 경희대의 경우 인문계는 내신 1~3급이나 지원 가능한 곳이었는데 공고생은 내신 등급 기준이 아예 없었다. 고려대 역시 공고생은 수능 2등급이면 합격(지원이 아니라!)할 수 있었을 정도이다.
덕분에 학교와 선생들의 전폭적 지원 하에 많은 학생들이 특별전형을 통해 꿈도 꿀 수 없는 유수의 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특성화 고등학교들은 앞다투어 대학교 입학 현황을 정문에 대문짝만하게 현수막으로 게시하였다. 물론 여기서 약간의 꼼수는 있었다. 일부 입학자들은 당시 분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를 본교 여부를 명시하지 않는 식으로 홍보를 한 케이스가 많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특성화고는 원래 직업적 기초능력 배양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문에 인문계의 교육과정과 판이하게 다르고, 가르치는 내용도 극단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다르다. 예를 들어 36시간이 고 3의 1주일 교육시간으로 편성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6시간의 국영수 시간을 제외하면 기타 시간은 모두 특성화 교과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중 거의 대부분이 취업을 위한 실기수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니 일반대학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도, 선생들도 이 특별전형 이후에 대학 생활에 대해서 대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입학하기까지 펼쳐질 장밋빛 미래-개인의 영달과 학교의 네임 밸류-에 집중하였지 그 장막 뒤에 드리워진 미래, 즉 각지에서 모인 유수의 인문계, 더 나아가 외고 및 과학고의 학생들과 상대해야 한다는 어두운 미래는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암석에 던져진 계란이었다.
선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를 바위에 던졌고, 우리는 그 견고한 벽을 뚫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첫 학기가 시작되었고,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 역시 개강에 참석하였다. OT를 가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술을 마시고, 동아리 생활을 만끽했다. 유수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에 황홀경에 빠져 있었고, 동기들이 모두 즐겁게 놀고 있으니 자신도 놀아도 된다는 환상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은,
대학은 경쟁으로써 우열을 철저하게 가린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인문계생과 경쟁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중간고사가 시작되었고, 특성화 고등학생들의 반이 갈려나갔다.
기말고사가 시작되었고, 나머지 반이 갈려나갔다.
원인은 간단했다.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은 경쟁할 실력이 되지 않았다. 더불어 대학 입학이 구성원의 수준이 동등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야 고만고만한 수준을 가진 사람들끼리 경쟁했지만, 대학교에서는 현격한 수준 차이를 가진 인문계, 더 나아가 외고 및 과학고 학생들과 '정당하게' 경쟁해야 했다.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은 타 출신에게 손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특성화고등학교에서 다소 등한시되었던 국영수 분야였다. 일부 고등학교들은 추가 학습 기회와 별도의 강의를 편성하여 교육하려 노력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인문계 학생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던 미적분 연산도, 네이티브 토킹도 특성화 고등학생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문제는 그것 뿐만 아니었다. 과학, 사회, 역사 상식의 부재로 인해서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은 전공 뿐 아니라 교양에서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모든 수업이 그들에게는 가시와 함정으로 가득 찬 죽음과 고난의 길이었다.
어찌어찌 학업을 따라간다 해도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각 대학은 졸업생의 학업수준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할당되어 있는 졸업 요건이 있었다. 최소한의 졸업 학점 뿐 아니라 별도의 졸업 시험(또는 논문 심사), 영어 성적, 기타 등등의 요건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2009년 경희대 수학과의 경우 학업과 별도로 토익 650점 이상(또는 영어 필수교양 성적 B+ 이상), 3개과목의 졸업시험 통과, 전산교양 이수 등의 요건을 요구했다.
결국 매 해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대학 입학 1년이 지나지 않아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은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극소수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동안 나머지는 늪으로 끝없이 침전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자퇴를 하고, 다수의 학생들이 휴학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는 뒷짐 지고 방관했다. 출발선상이 다른 학생들을 같은 경쟁체제로 내몬 결과에 대해서 아무도 분석하려 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경쟁 여건을 갖출 수 있도록 추가 커리큘럼을 구성하지 않았다. 최소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시행했던 특별전형 대학 입학자에 대한 추가적인 보완 정책은 없었다.
이후 서울의 대학들은 자체적인 연구 조직을 결성하여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의 졸업자 수를 분석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입학했던 특별전형 인원 중 졸업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이 중 학사경고 없이 졸업한 인원은 단 한 명. 다른 인원들은 졸업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경쟁은 공정한 조건을 갖추지 않을 경우 약육강식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책을 추진할 때는 사전 연구를 철저히 수행한 가운데 이 정책으로 인한 리스크가 얼마나 심대할지 평가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 않으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피해가 나오는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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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공고출신 졸업자이기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