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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3부 해설(1) -자유주의와 샌델의 비판

예전 독서토론회에서 본 책 중 하나인 마이클 샌델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를 읽은 토론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1,2부는 쉽게 읽히는데 3부에서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과연 맞는 말이다. 철학 전공인 나조차 1,2부는 바로 글을 쓸 수 있었지만 3부는 이해만 했을 뿐 글로 적을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 서평에도 그런 흔적들이 깊게 남아 있다.


[책을 읽고]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피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 | 글쓰기 | RULIWEB


지금 다시 보면 이 서평은 3부에 한해서는 정확하지도 못했다. 공동체의 부활을 염원한 게 아닌, 가치에 대한 적극적 판단을 염원한 게 샌델의 바람이었으니까.


여하간 이제 3부를 세 번째 읽어보고 이제서야 글로 조금은 풀어볼 수 있을 듯하여 적어보고자 한다. 책의 내용 중 덜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가차없이 걸러냈기 때문에, 정확한 지식이라기보단 대략적인 이해로서 이 글을 봐 주면 감사하겠다.




- 포함 챕터: 자유주의의 이상과 공동체주의의 충고, 절차적 공화정과 무연고적 자아 -



3부는 현대적 자유주의자가 가진 프라이드에서 시작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자기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상대 의견에 대한 존중'을 제시할 것이다. 풀어 쓰면,


 

난 자유와 공정한 절차를 중요하게 여길 뿐, 특정한 기호에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정도 되겠다. 그들에게 자유와 공정한 절차(판단 과정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가치중립적 태도는 신줏단지와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들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대원칙이 바로 그들, 자유와 공정한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신줏단지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제작자를 보면 신줏단지라고 모실 만하다. 처음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독일의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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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경험으로 흔들 수 없는 준칙을 탐구한 근대철학의 거인






칸트는 철학 탐구의 범위를 신에서 인간으로 축소하면서 신에게 내맡겼던 '불변의 진리'를 인간적인 범위 내에서 정의하려고 하였다. 신이 아닌 인간에게서 '절대적 원칙'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신의 보증' 아래 진리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혁신적인 시도였고, 그렇게 진리의 영역을 인간으로 가져옴으로써 칸트는 근대철학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칸트와 자유주의자가 받드는 신줏단지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의 철학이 추구한 '절대적 원칙'이 바로 신줏단지의 가장 중요한 재료라는 점에서 관련이 깊다 하겠다.


보통 '자유'라는 단어를 제시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쓰이는 사례도 대개 그런 방향이고. 하지만 칸트에게 자유는 그런 '욕구나 감정에 기반하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유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였다.


 

진정한 자유는 '이성이 나에게 스스로 부여한' 도덕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에게 자유, 정확히는 자유의지는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는 근거인, 인간 이성 그 자체였고, 절대 원칙이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에 한 마디를 더 붙인다.


 

'행위'나 '의사의 자유'는 도덕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한 정당하다

[=권리를 가진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한 자유와 이를 통해 나오는 권리는 취향에 따라 갈리는 '좋음'이 아닌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옳음'의 영역이었고, 따라서 권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권리가 다른 가치에 우선하다보니 칸트적 자유주의는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가진다.



 


1. 권리(옳음)는 좋음(선)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

2. 권리에 대한 정의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특정한 좋음을 반영하지 않는다)



복잡해 보이지만 둘 다 권리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기 때문에 가치가 권리에 간섭할 수 없다는 얘기다.약간 거친 비유지만 직장에 빗대면 사장이 직원에게 지시는 할지언정 직원이 사장에게 지시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되겠다.


이처럼 인간세계에서 도덕 법칙을 정립한 칸트의 권리 이론은 공리주의를 이기고 널리 확산됐으나, 복잡오묘한 진리의 세계는 칸트의 철학이 그대로 정착하도록 두고 보지 않았고, 그의 철학은 많은 논박을 마주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거센 의문은


옳음이 좋음에 우선함을 뒷받침하는 도덕 법칙은 무엇인가?



였다. 이는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옳음이 좋음에 우선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옳음에 속하는 자유와 권리는 좋음에 우선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칸트의 윤리체계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었다.


칸트의 윤리체계는 분명 큰 의미를 지니나, 옳음의 우선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경험에서 가져올 수 없었기에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칸트의 답은 '도덕 법칙은 순수 이성을 실천하는 초월적인 주체가 행하는 행위이다'였지만, 대개 명쾌한 답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칸트가 만들어놓은, 경험을 초월하여 만든 자유와 권리의 윤리체계는 철학자들에게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자연스레 이를 계승하고 지키려는 시도 또한 여러 방향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칸트가 설명이 부족했던 '옳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하여 설명하는 시도 또한 있었고, 마침내 20세기 중반에 들어 존 롤스에 의해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칸트가 빚기 시작한 자유주의의 그릇이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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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 오직 정의만을 탐구한 미국의 철학자

 




롤스가 제시한 '옳음이 우선함을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칸트와는 방향이 사뭇 다르다. 칸트는 도덕 법칙을 행하는 자유로운 순수이성을 '제시하고 끝냈다면', 롤스는 '정의'를 상정하고 정의를 부여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원초적 입장'이다.


원초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성향, 이해관계, 호불호 등 경험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아예 모르면서 다른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무연고적 자아' 상태에서 자신들을 지배할 정의의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 칸트처럼 '좋음(능력, 이해관계, 호불호 등)'을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걸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롤스는 칸트의 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칸트는 '이성'의 존재로 '옳음의 우선함'을 규정하고 끝냈지만, 롤스는 '옳음이 우선시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조화하였다.


 

무연고적 자아를 존재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는 자아가 선택하는 좋음이 아닌, 좋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무지의 베일'에서 좋음이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므로 선택 또한 우연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음을 선택할 '자유'와 선택에 따라 가지게 되는 '권리'는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며, '좋음'에 우선하게 된다. 이에 따라 본질적인 '자유'와 '권리'는 모두가 똑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의의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이제 제1원칙에 따라 무연고적 자아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초적 입장에서 능력과 성향, 이해관계, 호불호 등은 모두 자아에 부차적인 좋음에 속하고 무지의 베일 속에서 '우연히' 얻을 수 있을 뿐이므로, 분배 전에는 누군가가 독점하지 못하는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공동의 자산들을 분배하려고 하면 무연고적 자아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은 가장 적게 받는 자가 가장 큰 이득을 보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이 정의의 제2원칙인인 '차등의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적 지위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며, 설사 불평등한 상황이 벌어져도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의의 제 2원칙 내에 있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다.)

 



이처럼 롤스는 "자유와 권리가 왜 옳음에 속하는가?"에 이어 "옳음이 왜 좋음에 우선하는가?"를 구체화하여 칸트 철학의 약점을 보완하였고(정의의 제1원칙), 칸트가 경험을 초월한 윤리체계를 제시한 것처럼 경험을 초월한 정의로운 사회 원칙을 제시하였다(정의의 제2원칙). 이것이 롤스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롤스의 원칙 중 '차등의 원칙'은 정의론이 나온 직후에도 숱한 비판에 마주할 만큼 논란이 되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강력한 근거가 생기는 걸 달가워할 리가 없었고(자유지상주의자), 다른 한편으로는 좋음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법칙을 제시하는 게 어려우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 만했기 때문이었다(공동체주의자).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의 저자 마이클 샌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 역시 차등의 원칙에 문제가 있으며, 이 이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의 주장은 자유지상주의자나 공동체주의자의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그는 차등의 원칙의 난점을 오로지 논리적인 관점에서 다가간다.


그가 비판하면서 가장 중심으로 내세우는 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좋음을 왜 공동의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다. 그는 좋음이 우연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연적인 좋음을 공동의 것으로 볼 논리적 연결고리가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약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우연히 놓여 있는 자산에 대해 우선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아닌 그저 가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만약 사회에 우연히 놓인 것이라면 그 사회도 우선권을 주장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논리구조를 연결하기 위해 우연적 좋음을 공동의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개인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추가하려 하면, 원초적 입장에 의해 규정된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면 방법은 하나다. 제1원칙과 제2원칙 중 하나는 손을 대는 것이다. 샌델은 무연고적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제1원칙에 손을 대고자 했다. 그는 사람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보려면 가족·공동체·국가·민족·역사와의 얽힘(충직과 확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들이 부정된 자유주의적 자아는 자신을 이해할 기회도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얽힘이 있음을 자각한 자아는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얽혀있는 공동세계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연히 놓여 있는 자산에 대해 내가 주장할 수 없다면 그 자산을 내가 얽힌 공동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며, 차등의 원칙의 결함은 보완된다.


그는 자신이 세상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우연에 의한 좋음을 공동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롤스의 무연고적 자아에 연고를 끌어들임으로써 제1원칙을 보완하고 제2원칙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의 이후 이야기는 얽힘에 대한 샌델의 예시문들과 이론 전개인데, 이 부분은 시간날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예정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외 자료참고


존 롤스,『정의론』, (서울:이학사, 2008)

백종현, 「칸트에서 선의지와 자유의 문제」, 『인문논총』제71권 제2호,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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