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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3부 해설(2) - 샌델이 원하는 인간상

이 내용을 보기 위해서는 이전 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의 사상과 이에서 비롯된 롤스의 정의 도출 과정을 대략적으로 알아야 왜 그런 소재들이 나오는지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샌델은 자유주의 사상의 발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롤스의 사상에 허점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롤스의 정의원칙이 가진 기본적인 틀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바늘처럼 약점을 조심스레 파고든 것이다. 정의의 제1원칙(평등한 자유의 원칙)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보이고 이를 보완함으로써 제2원칙(차등의 원칙)을 더 탄탄하게 만들고자 한 그의 생각은 롤스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규정한 자유지상주의나 공동체주의와는 결이 또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점을 조심스레 접근했던 그는 해결법 제시도 과감하게 바로 개념을 소개하기보단 예시를 통해 자유주의의 난점과 대안을 차근차근 접근해 나아간다.


- 공동체 구성원 자격과 분배 정의 -


샌델이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것은 난점이 아닌 '지향점 중 일부'로, 공동체주의 철학자인 마이클 왈저의 분배 방식이다. 왈저는 자원을 분배할 때 자원마다 분배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돈으로 많은 것을 교환할 수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돈으로 사려는 게 부적절하듯 "재화마다 각자 분배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롤스식 분배정의 세우기(특정 원칙에서 분배규칙을 만들기, 이를테면 평등한 자유의 원칙에서 차등의 원칙을 추론해낸 것처럼)를 거부하고 영역에 따라 분배 기준이 다름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부는 자유교환에 따라, 복지는 필요에 따라, 권력은 자격있는 기준에 따라 분배기준이 다르다고 제시한 것이다.


왈저는 예시 또한 독특하게 드는데, 롤스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논리학적 설명 대신 유추를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치료받을 권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과거 영혼의 치료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기에 "영혼을 치료하는" 교회 등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처럼, 건강하게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지금은 "몸을 치료하는" 병원 등이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공동체마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다르기에 인정되는 가치 역시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가치가 통하는 영역은 공동체 내에서 그 가치가 인정받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왈저의 해설은 공동체가 인정받는 가치에 충실하다 해도 일관성이 있을 뿐 정의로운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샌델은 이러한 주장에 왈저가 취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자유주의의 윤리적 판단을 논하면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확장해 나간다.



- 핵과 멸종에 관한 개인주의 관점 비판 -


과거의 전쟁과 달리 핵무기는 인류 전체의 절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기존 전쟁과는 차원이 다름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핵의 유무에 따라 전쟁의 도덕적 차이가 있게끔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직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유주의자 조지 케이텝은 핵전쟁을 막아야 하는 이유로 개인의 권리 침해를 들었다. 정통성 있는 정치체계의 궁극적 목적은 개인의 권리 보호이며, 핵전쟁이 이러한 권리를 침해하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핵전쟁이 기존 전쟁과 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 명이 죽건, 수백만 명이 죽건, 나라가 소멸하건 결국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건 똑같고, 핵전쟁이 아닌 그냥 전쟁이라도 권리가 침해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사회를 상정하고 이를 논하면 쉽게 설명이 된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공동세계'의 소멸에 호소할 수도 있고, 공동사회가 가진 가치(언어나 생활방식 등)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핵전쟁을 더 위험하게 느낀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샌델은 후자를 강조하는 듯하다). 핵무기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을 빗대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동사회 등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윤리적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이 말은 공동사회가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듀이의 자유주의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 -


처음 읽었을 때 내가 붕 뜬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이 장이었다. 존 듀이가 실용주의 철학자에 교육학의 거장인 건 아는데, 그런 그가 실용주의도 아니고 자유주의로서 샌델이 언급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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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보다는 교육학자로 기억되는 존 듀이




샌델이 듀이에게서 주목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와 자유주의로(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이는) 대변되는 진리관이었다. 일반적으로 진리라 하면 인식이나 경험, 믿음과 상관없이 있는 '궁극적 실재 또는 형이상학적 질서'(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메타 개념)가 있음을 전제로 삼았으나, 듀이는 이런 진리관을 거부하였다. 듀이의 실용주의에서 진리는 경험이나 행위에 유용함을 주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듀이의 아래 인용처럼 그는 일반 이론으로서의 진리가 아닌 개별 행위마다 각자 진리가 있다고 본다.


철학은 궁극적 실재와 특별히 관계가 있다는 모든 허식을 버리고,

실재에 대한 그 어떤 일반이론도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실용주의적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듀이의 자유주의는 이러한 실용주의를 기본 모토로 삼고 있다. 보통 자유주의라 하면 자유와 권리라는 근본 원리나 토대를 두고 주장을 하기 마련인데, 듀이의 자유주의는 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공동생활에 참여해서 각자의 역량을 실현하는 것이 자유의 근원이라 보았고, 따라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인의 역량을 길러내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샌델은 이러한 듀이식의 시민 자유주의를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티의 듀이를 왜곡한 자유주의 주장은 책 내용 자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넣지 않음)



-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잘못인가? -


듀이가 붕 뜨는 느낌이었다면 이 장은 뜬금없다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여기서는 하트만이라는 랍비이자 종교학자를 인용했던 터라 그 위화감이 더한데다, 칸트와 밀의 자유주의적 감수성으로 유대교를 쇄신했다 하니 더 의문이 컸다.


"지금까지 칸트적 자유 신랄하게 까놓고 왜...?"


그래도 읽어보니 그 이유는 알겠더라. 칸트와 결이 다른 듀이의 자유주의를 얘기했듯이, 하트만도 칸트의 감수성을 인용했다지만 지향하는 바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샌델이 현대 사회와 시민적 역량의 조화를 도모하듯, 하트만의 사상이 향하는 방향은 유대교와 현대적 다원주의의 조화였다.

하트만은 해석적, 윤리적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는데, 해석적 다원주의는 탈무드 논법의 해석은 랍비에 따라 다르며 소수의 의견도 이단으로 탄압받지 않고 보호하는 개방적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샌델이 인용한 미드라시의 구절은 해석의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하늘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 미드라시 -


이 말인즉슨, 탈무드의 해석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신은 이에 개입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트만은 칸트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인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 다원주의는 유대교 내 해석을 넘어 타 종교와 세속의 도덕 역시 진지하게 고려함을 강조했다. 해석적 다원주의를 통해 인간에게 자율성이 부여되어 있음을 보였고, 따라서 신의 계시가 아니더라도 윤리적 규범을 위한 합리적 토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하트만의 윤리가 자연스레 현대적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트만의 이론은 인간의 능력과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한계를 제시하는데, 인간의 유한성 인식, 안식일, 우상숭배 거부를 다루면서 어떻게 '오만함을 제어하는지'(=윤리적 한계를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유한성은 신과 인간을 구분하여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고 인간의 수명을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 된다. 6일 일하면 하루 부여되는 안식일은 인간의 자연 지배욕구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으로 수면을 필요없게 하는 과학기술 역시 오만한 도전으로 제한해야 하며, 소비주의와 엔터테인먼트, 과학에 대한 맹신은 현대적 형태의 우상숭배로 역시 신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샌델은 하트만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고리타분할 수 있는 종교이론을 어떻게 현대사회와 조화시켜서 세련되게 소화했는가를 보이고 싶은 것이었다.



-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


롤스를 앞에서 봤는데 왜 또 여기서 나오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롤스는 『정의론』을 낸 이후로 수많은 평과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내면서 관점 일부를 수정했는데, 이 중 '옳음의 우선성'에 대하여 설명을 바꾸었다. 초창기에 무연고적 자아를 전제로 둔 것을 다음과 같이 바꾼 것이다.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주장은

개인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


그가 주장을 이렇게 수정한 것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대체로 좋음에 대한 지향점과 의견이 다른 점이 반영된 것으로, 다원주의의 색채가 묻어나는 부분이다. 그의 견해가 바뀌면서 자유주의 방향도 바뀌었는데, 『정의론』의 자유주의가 포괄적 자유주의로서 정의 원칙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찾았다면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의 원칙에 대한 합의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원주의 사회를 반영할 수는 있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의 본성이 고려 대상이 아니면 정의원칙의 시작점인 원초적 입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즉, 원초적 입장이 '무연고적 자아를 가진 개인'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구현했는데, 이조차 전제로 두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 정의원칙을 구성하냐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정치적 인간관은 칸트의 인간관과 유사하나 정체성의 범위가 공적 영역으로 한정된다. 개인적인 정체성에서 분리할 수 없는 좋음(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신념 등)이 있다 하더라도 공적 영역에서는 연고성을 배제하고 판단하는, 정치적 범위에 한정된 무연고적 자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다원주의적 개인과 정의의 원칙 성립 과정을 병립할 수 있게 된다고 롤스는 보았다. 그러면서 왜 공적 정체성이 구분되냐는 의문에는 '민주주의의 특수한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개인에 대한 정치적 관념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다른 특징과 마찬가지로 민주사회의 공적 문화에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물론 샌델은 내재된 근거는 또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정치적 자유주의』 이와 같은 수정에 대하여 샌델은 강하게 비판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옳음이 우선한다는 주장은 구했겠지만, 다른 취약점을 또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의론』에서 조심스레 접근하고 비판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는 롤스의 수정된 주장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취약점을 세 가지 제시하였다.


1.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포괄적인 도덕적·종교적 주장을 배제하였을 때 중요한 정치담론을 논할 수 없다.

2. 한 가지 정의원칙에 대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가가 분명하지 않다.

3. 공적 이성의 지나친 담론 제한은 오히려 도덕적 잘못을 용인할 수 있다.


우선 2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면, 롤스는 정치적 인간관을 이야기하면서 '합당한 다원주의에 대한 사실', 즉 좋음(도덕적·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사람들은 합당하나 타협에 이를 수 없는 사실들을 가치관으로서 가지고 있고, 옳음은 정의의 원칙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고, 설사 이견이 있어도 실행 방법에 대한 것으로 정의 자체에 대하여는 합의에 이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샌델은 자유지상주의가 차등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들면서 정의의 원칙 자체에 대하여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이견이 있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롤스는 이에 대해 차등 원칙이 정당한 근거를 보이며 차등원칙에 대한 논쟁이 '합당한 다원주의에 대한 사실'에 해당하지 않음을 보이나(샌델도 이에 동의한다), 샌델은 이 문제가 좋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즉 도덕적·종교적 문제 역시 정의의 원칙처럼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예: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부당한가에 대한 논쟁.). 그렇다면 옳음이나 좋음이나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고 볼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


1과 3은 예시도 같고, 비슷한 부분이 많아 묶어서 쓴다. 샌델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적 좋음에 해당하는 관념(도덕적·종교적 주장)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낙태, 노예제 논쟁을 예시로 들어 난점을 파고든다.


낙태 논쟁에서 기독교의 생명존중 주장을 아예 배제하면 논쟁이 성립할 수가 없으며, 미국에서 연간 150만명 이상의 죽음(또는 150만건 이상의 낙태)도 논의가 불가능해진다고 샌델은 보았다. 또한 이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논의하려면 태아의 지위(어디서부터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논증은 좋음(도덕적 주장) 없이는 옳음을 판단할 수 없게 되기에 옳음이 꼭 좋음에 우선할 수 없게 된다고도 하였다.


롤스에 대한 샌델의 반박은 1858년 링컨과 스티븐 더글러스의 노예제 논쟁을 통해 정점을 찍는다. 당시 링컨은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한 판단을 각 주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에서야 보면 더글러스는 비겁하게 정의를 회피하는 것이고 링컨의 노예제 폐지 주장이 당연히 '옳은' 것이지만, 당시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노예제는 '좋음'에 해당하는 영역이었고, 정치적 인간관으로 이를 보면 더글러스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정치적 인간관은 중요한 정치적 담론을 논하지 못하게 하고, 잘못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버린다는 게 샌델이 주장하는 바이다.


샌델은 정치적 인간관의 소극적인 공적 이성의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공적 이성을 확대하여 정의를 논할 때 종교적·도덕적 이상도 들여놓아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렇게 하면 자유주의적인 이상(상대방의 신념에 관여하지 않는다)에 따른 상호존중은 위협받겠지만, 상호존중은 토론이나 경청 등으로도 실현될 수 있고 이런 방식이 오히려 현대적인 다원주의에 걸맞는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 롤스를 기억하며 -


여기에서 샌델이 롤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정확히 나와 있다. 앞서 『정의론』은 조심스레 접근했지만 『정치적 자유주의』는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처럼 그는 『정의론』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도덕 상대주의와 언어분석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영미 정치이론에 정의를 다시 한 번 중심으로 내세움으로써 살려냈다고 보았다. 그 외에는 롤스에 대한 그의 기억과 추모가 이 장의 주요 내용이다.



- 공동체주의자라는 오해에 대한 해명 -


마무리를 지으면서 샌델은 자신에게 공동체주의자라는 꼬리표가 영 마뜩찮은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단지 옳음에 좋음이 연관될 수 있다고 볼 뿐이라고 하면서, '공동체주의자'라는 꼬리표가 정당화되려면 '정의 원칙이 공동체의 가치를 반영함으로써 정당화된다'고 보아야 하나 자신은 '정의 원칙은 인간의 중요한 선(좋음)을 존중하거나 증진시킬 때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예시로 들어 설명하는데, 종교의 자유에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종교가 장려하는 인격의 특징이나 훌륭한 시민이 되는 습관 또는 성향을 배양함에 있다고 하였고(당연히 배양하지 못하는 종교는 정당성이 약해진다고 샌델은 보았음), 언론의 자유에서 기준이 되는 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인정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1965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셀마-몽고메리 구간의 고속도로 행진에 대한 프랭크 존슨 판사의 행진허가 판결을 이야기한다. 존슨 판사는 고속도로의 행진은 '헌법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점에 도달한 행위'임을 인정했으나, 행진이 표방하는 대의에 근거하여 허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속도로에서 집회를 갖고 시위를 하고 평화행진을 할 권리의 범위는 항의와 청원의 대상이 되는 잘못의 극악함의 비례해야 한다. 이 경우, 해당 잘못은 막대하다. 따라서 그러한 잘못에 항의해 시위할 권리 역시 막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 프랭크 존슨, 1965년 판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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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몽고메리 행진.세 번째 행진에서야 육군의 보호로 몽고메리까지 갈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은 자유주의적 결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실질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권리의 근거를 찾는 샌델의 방식에는 부합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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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샌델은 처음 제대로 접한 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당시에 상당히 좋은 내용으로 기억해서 긍정적으로 보던 차에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번에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가 깊어졌다는 면에서 꽤 가치있는 읽기였다 생각한다. 다섯 번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조금씩 이해가 깊어지고 읽히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흥미로웠고 말이다.


다만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3부는 나름 배경지식 없이 읽히게 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칸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거기에다 추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다보니 보통 사람에게는 더욱 낯선 책이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해한 샌델을 요약하며, 글을 마친다.


1. 샌델의 철학 기본은 롤스의 『정의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를 현실적인 범위로 확대하고자 한다(정의에 중요한 좋음을 포함).

2. 일상적인 가치 중에서 정의의 판단 근거가 되는 가치가 있으며,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의 중요한 선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있다.

3.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도덕상대주의에 기반한 회피가 아닌 가치의 적극적인 교류(토론, 논쟁, 숙의 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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