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하는 책 모임에 오랜만에 참여하였는데 책을 투표로 고르면서 제목이 맘에 쏙 드는 건 없더군요. 그래도 나름 관심사 쪽이겠다 하고 고른 책이 선정되었고 그래서 다 읽은 후의 느낌을 써 봅니다.
도서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주제: 과학
저자: 칼 세이건/1995년 초판 발간
저자인 칼 세이건은 천문학자이자 명저 <코스모스>로 알려진 작가이고, 동시에 사회운동가로서도 핵무기 감축 운동 등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많은 활동을 했지만 그의 모든 활동은 과학이 중심에 있었죠. 이 책 역시 그러한 활동의 연장선으로,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간세상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학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보면, 과학자로서 그가 지닌 프라이드를 잘 엿볼 수 있죠.
과학에서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이 없다. 너무 민감하거나 미묘해서 증명하기가 어려운 문제라도 상관없다. 과학에는 신성 불가침의 진리 따위는 없다.
- 본문 62페이지
거침없이 질문하고 회의하고 성찰하며 오로지 사실을 향한다는, 그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과학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과학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으면 그것을 지지하겠다는 저자의 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오류를 찾아 도전하는 과학자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과학적 태도 등 그가 언급한 과학자의 행동과 자세는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범으로 비추어지고 있죠.
세이건은 과학의 대중화를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습니다. 비과학적인 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입고 죽어나가는 것을 극히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실은 과학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유사과학과 사이비, 상업적 유혹과 미신들이 책의 제목마냥 악령처럼 사방팔방에서 출몰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는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묵사발로 만들어 줍니다.
< 너의 용은 차고 안에 있느냐? >
그는 유사과학과 사기 등을 비판하기 위한 예로 '차고 안의' 용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누군가가 불을 뿜는 용이 차고 안에 산다고 주장한다.
보여달라고 하니 '어이쿠 얘 투명해서 안 보여요'라고 한다.
불의 열이라도 재보자고 하니 '얘는 투명해서 열도 안 나요' 라고 한다.
차고 안의 용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리저리 말만 빙빙 돌리고 아무런 결론이 안 나온다. 당연히 확인할 방법 따위도 없다.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미 '차고 안의 용이 있다.'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요. 반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저 주장이 되는 말만 맴돌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것이 되어 버리고, 이는 분명 과학적 사고와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 차고 안의 용 중에서 세이건이 가장 비중을 할애하는 것이 UFO 체험기입니다. 체험한 사람들이 얘기하는 외계인의 말과 행동이 지극히 지구인의 중심적임을 지적하고 있죠. 외계인들이 지구의 운명과 도덕에는 굉장히 관심이 많지만 지구의 기술과 자신들의 문명을 얘기하는 데 인색한 부분은 기초적이고 흔한 사례입다. 그것도 그렇지만 외계인을 접했다는 사람들이 화성이나 금성 탐사 전에는 외계인이 금성인이나 화성인이었는데 둘이 불모지인 게 알려진 후로는 은하 밖으로 거주지가 바뀌는 것도 세이건이 하는 비판의 주요 포인트가 되고요.
외계인 외에도 마녀 사냥 역시 그가 많은 지분을 할애하며 비판합니다.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마녀를 만들면서 엄밀히 고찰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마녀로 정해놓고 모든 것을 시작했죠. 고문하여 자백하면 마녀임을 인정한 것이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마녀이니 인정할 리가 없다는 논리로 말이죠.
차라리 크아아앙 울부짖으면서 다 뚜까패는 투명드래곤이 실체가 있겠다고 느껴지는 이 개념을 통해 칼 세이건은 이미 정해진 결론에 끼워맞추는 억지 퍼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강조합니다.
< 모두에게 있는, 모두를 위한 과학 >
책의 후반부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는 과학적 성향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발현하기만 하면 모두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차고 안의 용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칼라하라 사막의 쿵 산 족은 사냥감의 흔적과 변수를 철저히 분석하여 사냥꾼들의 의견을 모으고 합의하여 사냥합니다. 지극히 과학적으로 보이는 생각이나, 그들이 어디서 과학을 배웠을 리는 만무하기에 칼 세이건은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 이 부족을 제시하지요.
그렇게 다들 과학적 성향을 담고 있으니,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사고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과학 얘기를 TV에서 더 틀어준다던가, 과학 행사를 한다던가, 체험관을 더 만든다던가... 순수하면서도 나름 깊은 칼 세이건의 고민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이 단락은 조선시대 유교정치의 본질이었던, 백성을 교화하여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얘기가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론에 가장 충실했던 게 조선 최고의 과학군주 세종이었으니 어떤 의미로 통하는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책임있는 과학을 향하여 >
칼 세이건은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강하게 강조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25장의 제목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25장 제목-
그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 비과학적인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드워드 텔러라는 물리학자가 책임의식 없이 수소폭탄 같은 대량학살무기를 적극적으로 만들려고 한 것을 비판한 것이야 과학 분야이니 당연히 자기 분야겠지만, 자민족 중심주의, 제노포비아, 국수주의가 발호하는 세상도 같이 비판하며 과학의 방법으로 사회, 경제, 정치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죠.
미국 제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그의 그런 생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로, 과학을 애호하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정치가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주의를 정착시킨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인구가 100배 늘었는데 제퍼슨 같은 사람이 100명은 있어야 할 텐데 도무지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제퍼슨이 과학적 기치 아래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권리 장전,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통로가 되어 주는 표현의 자유 등 과학적 사고를 이어가야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 좋은 건 다 과학이냐 >
이제 세이건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제가 왜 제목을 저리 적었나를 한 번 써 보고자 합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동시에 꽤나 참아가며 읽었고, 유익하면서도 할 말이 많은 이 희한한 책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위화감'이었습니다. 특히나 이 책 자체가 과학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전파하려는 것이다 보니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로서는 '전도당하는' 느낌을 너무 강하게 받았습니다. 교양 수준으로나마 과학을 접했고 관심도 많기에 공감이 많이 갔음에도 그런 감정이 든 것이죠.
위화감의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의 범위가 이리저리 넘실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설명할 때 과학이 꼭 들어갑니다. 쿵 산 족의 사냥법, 노예제 논쟁, 위에서 언급한 권리 장전, 표현의 자유 등 인류를 발전시킨 개념에는 일단 과학을 넣고 보았고, 철학으로 일평생 살아온 데카르트는 물리적 업적이 있다는 이유로 이 책에서 졸지에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이유는 ‘과학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가 초능력의 허구를 밝혀낸 것도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반증 가능성'을 통해 미신을 타파하고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하면서 말이죠.
사실 책에서 쓰는 과학의 정의가 모호한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언어가 아닌 물질을 보는 사람이니 굳이 언어를 정확하게 쓰려 신경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정확히 쓰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괴력난신(기이한 이야기나 설화, 미신 등)을 철저히 배격하는 유교적 사고방식도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불교 역시 과학과 연결될 겁니다. 하지만 보통 이들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그저 합리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인정될 뿐입니.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봐도 예시는 많습니다. 그가 유사과학과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활동했던 CSICOP에서도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법 있었죠. 유명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있지만, 언어철학의 대가 놈 촘스키, 마술사이자 초능력 사냥꾼이었던 제임스 랜디도 그 단체 관련자긴 해도 칼 세이건은 이들의 모든 비판적 행위를 과학으로 묶어버린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저 회의적으로 접근한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CSICOP와 관련된 유명인들: (좌)철학자 촘스키 (중)마술사 랜디 (우)과학자 도킨스
위에서 썼듯이 과학자는 언어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니 정확하게 말을 쓰는 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건 다 과학으로 넣고 나쁜 건 다 과학 밖으로 몰아내는 건 의도도 의도지만 세상의 다양성을 너무 얕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더군요.
< 그의 용도 차고 안에 있었다 >
하지만 단순히 말을 혼란스럽게 쓰는 정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면 아마 이 서평은 단순한 아전인수에 대한 불만제기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중요한 명제가 '차고 안의 용'과 다를 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인간 본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누구나 과학적 성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일 텐데 정작 이 주장은 과학적 사고의 예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칼 세이건이 지칭하는 ‘과학적 성향’에 대한 증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는 쿵 산 족의 사냥 방식이 이를 증명한다 했지만, 이 주장은 언어적 장치와 물질의 증명 방식이 교묘하게 뒤섞여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연구 방식은 같은 성질의 표본을 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표본 하나로 일반화를 해도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정말로 같다면). 그는 쿵 산 족이 어디서 과학을 배운 것이 아님에도 과학적 성향을 '발현'하였으니 모든 인간이 이를 타고났을 것이라 과학적 방식으로 일반화하였죠. 얼핏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증명의 함정은 '성향'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성향은 보통 발현되지 않은 성질을 지칭하므로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사람이 인지할 수 없거든요. 따라서 이 성향이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야 증명이 완성될 것이고, 방법은 아래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1. 모든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발현한 사례를 보이거나(연역적 증명)
2.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담아 짜임새 있게 설명하거나(정신에 대한 논리적 증명)
3. 과학적 성향이 담긴 유전인자가 인간 공통으로 있음을 보여야 한다(물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
그러나 1은 인구수는 둘째치고 사람이 계속 새로 태어나고 바뀌는 이상 증명할 수 없는 방식임이 명백하고 2는 인간 본성도 제대로 규정 못 하는 마당에 표본 하나로 증명이 어려운 게 매한가지며 3 역시 드러난 바가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그게 없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있다는 증거 역시 될 수 없겠죠. 어떤 식으로 봐도 '누구나 과학적 성향이 깊게 자리고 있다'는 명제 자체가 증명 불가능한 차고 안의 용인 겁니다.
딴 건 다 물질주의로 보면서 왜 과학적 성향만 마음속에 둘까?
< 땅을 디디는 한 있어야 하는 그것은 과학 >
비록 책 자체는 '과학적이지' 못하나, 과학의 중요성을 열변하고 미신을 비판하는 그의 자세가 마냥 잘못되었다고 비난만 받을 감인가 생각해 보면 그건 애매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관 또한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중에 그가 중심으로 두는 개방성과 비판을 열어두는 모습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미신을 이용한 악의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지침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식에서 윤리나 법처럼 과학이 들어가지 못 하는 영역이 있음에도, 이 책은 오로지 과학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요. 제가 서평 제목을 '유용한 과학 성경'이라고 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차피 사람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살기에 인간의 지식체계는 너무 방대해졌다고는 생각합니다. 얻을 수 있는 지식에 한계가 있다면 도덕 다음으로 얻을 가치가 큰 지식 중 하나가 바로 과학이기에 이 책은 발간된 지 20년이 되었음에도 과학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책으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군요.
사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때때에 비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많이 발전하였고 초전도체, 기후변화 과학적 관심도 대단히 증가했습니다. 그 동안 과학도 많은 발전을 거듭했을 것이기에 이 책을 두고 뒤늦은 비판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당연한 생각을 반복해서 적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적고 마음 속에만 두기에는 너무 답답하여 한 글자 적어내려가 보았네요.
읽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책을 참고하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