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전사가 악마 왕자를 따라 지옥문을 넘어가자 온 시야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옥의 대기는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비틀어지는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뜨겁고 건조했으며 사방에 펼쳐진 무한한 지평선을 가로막는 것은 왕궁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처음 지옥에 발을 들였을 때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보로 이동하지요. 가면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란 걸 뻔히 알지 않나."
악마 왕자가 어색한 분위기에 질린 나머지 대화를 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불패의 전사가 방금 날개를 펼친 독수리의 날개를 바로 부러뜨리듯이 뚝 잘라버린다. 하지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작인거지? 아무리 지옥이라도 이정도로 황량하진 않을텐데. 네 백성들은 어딨는거지?"
"내 질문에 대답해라, 애송아. 천년 전에는 이미 입구부터 사방에 악마와 불쾌한 살덩이로 이루어진 소굴들이 깔려있었다고. 그 높고 기다란 성벽은 또 어디로 가고?"
적진 한가운데 순수하고도 의심이 많은 불패의 전사의 질문 덕에 대화는 끊기지 않고 이어지자 악마 왕자는 이런 방식도 괜찮겠거니 싶으며 입을 연다.
"당신이 처음 지옥을 방문했을 때,"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옥의 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었고 그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폭력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이웃을, 친구를, 가족을 살해했지요."
"대충 알겠군. 전부 대피시켰단 말이지. 어디로? 천년 만에 되돌아온 정복자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지금이라면 그럴겁니다. 왕께선 당신의 침공 이후 착실하게 대피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후 매일 모든 지옥의 주민들에게 마법을 걸고 모든 거주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에 한번씩은 대피훈련을 진행했고 바로 오늘, 당신이 설산을 타는 동안 주민의 재산과 거주지, 그리고 목숨까지 지옥의 경계 끝자락으로 전송 보냈습니다."
불패의 전사는 그 말을 듣고 인정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극정성이로군. 그렇게 멀리 보냈다면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면 어떨까? 지옥의 모든 악마들이 매복한거라면? 너희 악마들은 항상 상대를 기만한다."
그는 악마들에 대한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않는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들어줄테니 멈춰달라며 울부짖던 왕의 눈물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불패의 전사는 왕비를 짓밟은 채 어린 악마 왕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부숴버릴 기세로 움켜쥐던 자신과, 그 반대편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그만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악마들의 왕을 떠올렸다.
"아니."
"명백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제 말을 믿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당신은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악마 수천 명을 학살한 괴물입니다. 왕께서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악마래도 당신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겁니다."
"좋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걷다가, 이번엔 악마 왕자가 불패의 전사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지옥을 정복하던 그 날 셀 수 없이 많은 악마들이 가족을 잃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께선 매일 악몽 속에서 몸부리치던 끝에 왕의 곁에 있기를 거부하고 궁정 깊은 곳에서 영원한 숙면에 들어섰지요. 친애하던 신하들도 당신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저희에게 저지른 짓을 후회한 적이 있으신가요?"
불패의 전사는 왕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지만
"너희는 영혼을 고문하는 걸 업을 삼는 악마들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너희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 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난 정의 같은 게 아니야. 인간의 정의였다면 너흴 멸종 시켰을 것이고 만물의 정의였다면 그러지도 않았다. 단지 이기심으로 가득찬 인간이지."
예, 아니오가 아닌 두루뭉실한 자기 주장.
"후회 한 적 없으시냐고 재차 묻겠습니다."
"그... 네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다고?"
"악몽. 매일 당신이 지옥을 헤집고 수천명을 학살하며, 자신을 고문하는 악몽에 지쳐서 지옥 깊은 곳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다고요. 그리고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다시 지옥에 돌아온 이유를 알고 있나?"
불패의 전사가 자꾸 뚱딴지 같은 말로 대답을 이리저리 피하자 악마 왕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훑으며 곤란한 표정을 자아낸다.
"그건 왕에게 말씀하세요. 사실은 우리 둘의 대화를 다 듣고 계시지만, 저까지 그걸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
"제가 악마 중에 최초로 당신과 이성적인 대화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봅니다."
"맘대로 생각해라."
어느덧 왕자와 불패의 전사는 황량한 대지를 가로질러 어둡고 칙칙한 왕궁에 이르렀다.
"제가 안내하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꽤 구조가 단순할겁니다, 복도를 지나면 바로 왕좌로 이어질겁니다.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왕께서 급하게 마법으로 바꾸었지요."
"그것 참 편리하게 사는 족속들이군."
악마 왕자는 푸른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올라 점차 멀어졌고, 불패의 전사는 시커먼 복도를 한걸음 한걸음 걷다...
"이봐! 지옥을 정복한 자가 돌아왔는데 언제까지 걷게 하는 거지? 이게 바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인가?"
그가 불평하자 그의 시야가 확 넓어지며 앞에 보이던 복도들은 그의 시야 뒤로 넘어가듯 질주했고 커다란 대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틈으로 불패의 전사를 비집고 우겨넣는다.
"넘어질 뻔했군. 이런 마법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 악마들의 왕"
"자네가 지옥에 공포를 떨친 뒤로 천년만이군."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친 채 정장을 차려입은 악마가 왕좌 앞에 선채로 불패의 전사를 경계하며 그를 환영한다.
"그 손가락."
악마들의 왕이 고개를 잠시 까딱이며 불패의 전사를 부상을 언급한다.
"다친지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완치되지도 않았군. 한동안 육신을 갈아치우지 않았나 보군."
"그러는 넌 얼굴에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군."
"내가 걸어준 마법이 부족해서 온건가?"
불패의 전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하지 않았다. 다윗을 죽이고 놈을 따르던 커다란 늑대에게 물려죽었을 때, 나는 그날 그 늑대가 되었다."
"나는 짐승인 채로 한동안 지내다 내게 반항하던 마녀 아우라의 사악한 마법에 걸려 몸이 조각조각 나버렸지. 나는 그렇게 마녀의 몸을 차지했다."
"더스틴은 내 팔다리를 날려버리고 지축을 흔들며 내게 번개를 내리찍었다. 더스틴은 자신의 선조를 추방한 나를 죽이겠다는 목표를 이루고 영원히 사라져버렸지. 오직 나만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했다."
불패의 전사는 자신이 살해당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악마들의 왕이 걸어준 마법이 얼마나 요구사항을 잘 충족시켜줬는지 부연설명한다.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 자네에게 도전하거나 자네가 도전한 대상에게 패배하면 승자의 인격과 영혼까지 말소되고 자네가 승자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거지."
"그래. 내가 불패라는 건 진실이면서도 거짓이다."
"진실이 된거지."
"이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지. 좋은 마법이다."
불패의 전사가 불만은 커녕 칭찬을 하자 악마들의 왕은 고개를 갸웃댄다.
"알 수 없군. 그렇다면 왜 온거지?"
"당연히 요구할게 있어서 왔지. 그전에, "
"폭력을 행사하러 온 거라면, 천년 전과 다르게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또, 자넬 죽이지 않으면서도 제압할 방법은 있어. 내가 건 마법에 내가 당하진 않아."
불패의 전사가 양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를 취하자 악마들의 왕은 자세를 낮추고 주위에 징그러운 커다란 눈알들을 소환한다. 소환된 눈알의 동공 끝에선 붉은 번개가 꽃 피는 것처럼 파직댄다.
"죽지 않을 만큼 패서 요구할까 했지만, 지금의 나로선 널 이길 가능성은 적다. 네 말대로 네가 걸어준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에 네가 당하진 않겠지. 게다가, "
"네 아들이 말한대로라면 날 막아낼 의지는 충분한가 보군."
"그 말대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을 거다."
악마들의 왕은 손가락을 오므린 채 양손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타원을 붉게 밝히며 두 눈에서 굳센 결의를 보인다.
"나도 널 보고 배운 게 있지."
불패의 전사는 양손을 들어올려 투구를 벗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한쪽 무릎을 낮추더니 양 무릎을 꿇는다.
"지옥을 정벌한 전리품으로서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을 받은 뒤로,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뤘다."
"나는 내 백성들을 주먹 아래에서 다스렸고 어디까지나 내 백성으로 남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내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됬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반항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지옥에 처들어가서 네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처럼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왕이 아니라 전사라고 불렀다. 나를 두려워했다. 지옥이 날 바라보던 것처럼"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후회한다. 내 백성이든, 네 백성이든."
악마들의 왕은 그의 태도에 놀라 손바닥을 이마를 훑는다. 불패의 전사는 잠시 침묵했다 말을 이은다.
"뒤늦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했고,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반드시 백성들을 지키고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리고 오늘날, 브렌다라는 아이는 내게 도전하려고 든다. 그녀는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내가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면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에 의해 그녀는 말소 되고 내가 브렌다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맹세를 어기는 일이지."
"반대로 그녀를 죽인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렇다고 그녀의 도전을 피할 순 없다. 도망다닌다고 해도 나는 나날이 약해지고 있고, 언젠가 그녀와 마주할테지."
악마들의 왕은 어느새 한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다른 한손을 턱에 괴며 불패의 전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자네 입으로, 결론을 듣고 싶군."
"나는 맹세를 어기고 싶지 않다, 악마들의 왕! 나를 도와다오! 내게서 이 마법을 거둬다오! 네게 이 모든 후회를 증명하겠다!"
불패의 전사는 구걸하듯이 양손을 왕에게 뻗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네. 아주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어. 놀랍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자네는 이기심으로 가득찬 괴물일 뿐이야. 자네가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역겨워."
그의 주변에 소환된 눈알들이 일제히 붉은 광선을 내뿜어 궁전 일대를 날려버린다.
"자네의 사과도,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 말과 동시에 악마들의 왕이 크게 손을 휘젓자 피어오르던 먼지들이 걷혔고 악마들의 왕은 불패의 전사를 살핀다.
"피했군. 어디로?"
악마들의 왕이 고개를 위로 올리자 뻥하고 뚫린 천장을 발견했지만, 이미 불패의 전사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가 고함을 외치며 낙하하는 동안 궁정의 모든 유리재들이 부숴진다. 불패의 전사가 착지와 동시에 두 주먹을 지면에 내리치자 궁정을 넘어서 광활한 붉은 빛 황무지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난다. 뒤이어 악마들의 왕이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악마야! 그렇다면 나도 내 맹세를 지켜야겠다! 넌 내 마법을 거두게 될 것이다!"
불패의 전사가 투지를 불태운다.
글쓰기 | 구독자 27명 | 파블로프의자명종
불패의 전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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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7 (04: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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