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 구독자 27명 | 파블로프의자명종

매일 밤 뒷산에 무언가 나타난다


약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 문풍지와 대나무로 이어붙인 조잡한 창문 너머로 낙엽과 거친 흙에 발자취를 남기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항상 머리를 창문을 향하여 잠을 청하는데 매번 그 시간대에 그 바스락 대는 소리에 번뜩 잠에서 깬다.

앵앵 대는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모기처럼 짜증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 그 발소리에 귓바퀴가 저절로 고개를 숙여 경청한다.

대나무 사이를 타고 거니는 듯하면서도, 낡고 삭아 떨어진 무수한 대나뭇잎과 짙은 갈색의 산흙을 밟는 이 소리

그저 한 여름에 갑자기 내 방 뒤의 능선에 터를 잡은 철새 혹은 텃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당히 묵직하게 땅을 짓밟는 소리를 새가 내기 힘들다.

그냥 재수없디 재수없는 한반도의 요정 고라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라니는 때때로 제멋대로 비명을 질러 바로 분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강의 해수 멧돼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용히 킁킁대거나 코로 땅을 훑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놈들은 죽순을 좋아해 봄에 자주 들락날락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쩌면 반달가슴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진작에 국립공원 측에서 우리집을 찾아왔겠지.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이미 저 얕은 능선에서, 사람이 다니기 힘들정도로 빽뺵한 대나무 숲에서 내 방 바로 뒤에서 발소리를 내며 걷는 생물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 불편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저 뒤에 있는 그것의 모습을 복잡한 도형 그리듯이 일부러 피하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 결론이 내 마음 위로 떠올라 그것은 이것이다 외치기도 전에 내 얕은 마음이 메말라버려 똑바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저것은 틀림없이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이 불분명함 때문에 내 머릿 속에서 불편하다 못해 강한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한창 나는 중에도 조잡한 대나무 창문을 벌컥 열어봐도 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깊은 밤 저 어두컴컴한 곳에서 창문을, 나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고 그저 바스락바스락

그렇다보면 아 사람이 아니구나 안심하기도 전에 그전에 맞춰보았던 생물 중에 그 어느 것도 일치하지 않아 너무나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저 바스락 대는 소리에 열중하는 인간이라면, 내 행동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말이 된다.

뒷길을 타서 능선에 올라 그 정체를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난 내 마음 속에서 돋아난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런 인간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렵다.

이제 곧 있으면 바스락 대는 소리가 들릴 시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삭아빠진 대나뭇잎과 짙은 갈색의 산흙을 불쾌하게 짓밟는 소리가 내 고막을 두드릴 것이다.

자연과 인간사회의 경계에서,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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