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황후 아르메니아의 필리파(Philippa of Armenia)
사이의 소생으로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Constantine Laskaris)라고 불리는 1215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고 그는 1149년에 Duke of Thrakesion이었다고 한다.
필리파의 모계 조상들
https://en.wikipedia.org/wiki/Philippa_of_Armenia
모친 : 예루살렘 왕국의 토론의 이사벨
외숙부 : 예루살렘 왕국의 토론의 영주 험프리 4세 (+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의 첫 남편)
이사벨 1세의 이복오빠가 보두앵 4세였으며, 이 결혼은 보두앵 4세가 내린 결정
Baldwin's first concern was to make the succession more secure by arranging the marriage of his eight-year-old half-sister, Isabel, to Humphrey IV of Toron, who was about fifteen. ... Isabel and Humphrey were solemnly betrothed in Jerusalem in October 1180. The religious marriage did not take place for another three years, presumably because the princess had not yet reached the canonical age of twelve and the king did not want any impediment to be urged against the legality of the marriage.
보두앵의 첫 번째 관심사는 8살 난 이복여동생 이사벨과 15살쯤 된 토론의 험프리 4세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후계자 자리를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 이사벨과 험프리는 1180년 10월 예루살렘에서 엄숙하게 약혼하였다. 아마도 공주가 아직 12살이 되지 않았고 왕은 결혼의 합법성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이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결혼은 3년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Baldwin IV and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24310
외조부 : 토론의 험프리 3세
외조모 : 예루살렘 왕국 울트레주르뎅의 여영주 밀리의 스테파니
외증조부 : 토론의 영주, 예루살렘 왕국의 ‘Constable’ 험프리 2세
https://en.wikipedia.org/wiki/Humphrey_II_of_Toron
Constable?
Constable은 국왕 휘하의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군 기록을 보관하는 일을 담당했다. 용병들을 고용하고 돈을 지불하였으며, 군사 작전 동안 계엄령을 집행할 책임이 있었다.
1153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가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이때부터 Constable이 되었고 이 자리는 3대의 왕(보두앵 3세 - 아모리 - 보두앵 4세)을 거치면서 3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1174년에는 보두앵 4세가 미성년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보두앵 4세의 섭정이 되는 과정에서는 군권을 장악한 험프리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당시 왕국의 정세와 더불어서 중요했다. 또한 초기 재위에서 군사적 경험이 아직 쌓이지 않았던 보두앵 4세가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도 그였는데, 보두앵 4세가 친정(親政)과 친정(親征)을 시작한 1176년에 수행한 최초의 두 차례의 성공적인 군사 원정은 여러 조력 중에서도 특히 험프리 2세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다. 1177년에 살라딘이 왕국에 대한 전면적인 강력한 공세를 벌인 몽기사르 전투 당시에서도 그가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이 십자군 전력의 약화 요인으로도 지적되기도 했다. (다만 그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했고 이 전투는 십자군이 승리했다.)
1179년, 바니아스에서 이슬람 군을 공격하기 위해 보두앵 4세와 동행했는데, 위기에 빠졌던 보두앵 4세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4월 22일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살라딘의 조카는 프랑크 군대와 마주쳤고, 우연히 왕의 말이 전장에서 튀어나와 있다는 찬스를 확인하였는데, 그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토론의 험프리가 치명상을 입었다. 왕은 무사히 도망쳤지만 험프리는 며칠 후에 죽었다.”
“His name was byword for bravery and courage in battle. He was a kind of affliction unleased by God against the Muslims.
그의 이름은 전투에서 용맹과 담력의 대명사였다. 그는 무슬림들에 대한 신의 가호가 없는 일종의 질병이었다.“
- 험프리 2세에 대한 Ibn-al-Athir(이슬람 역사가)의 평가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Baldwin IV and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24310
여담) 험프리 2세의 아내 필리파의 자매가 콤니노스 왕조 마누일 1세의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로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였다.
여담) 테오도로스 1세가 태어난 약 1175년은 보두앵 4세의 재위 1년차의 해였고 보두앵 4세와 테오도로스 1세는 14살 정도의 나이차가 난다. 테오도로스가 10살 정도가 되었을 때 보두앵 4세가 죽었다. (고로 두 인물은 10년간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odore_I_Lask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