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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글쓴이의 무지로 인하여, 실제 역사와 고증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 부탁드립니다.

PC 환경에서 작성한 글이라, 모바일 환경에서는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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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지 수백 년이 넘게 흐른 어느 해, 많은 생명체가 태양이 떠오르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시각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선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한 늙은 황제가 밤을 새워가며 정무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져 잿빛을 띠었고, 눈과 입 주위에 생긴 주름살은 그의 깊은 시름을 드러냈으며, 젊었을 적 볼 수 있었던 눈동자 속 뜨거운 불꽃은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물결치는 머릿결과 치켜 올라간 다소 두꺼운 눈썹,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하여 황제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시종들이 황제에게 다가가 잠을 청할 것을 권하였으나 황제는 점잖게 사양했고, 시종들에게 이만 물러가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그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한 여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테오도라."

 

  그랬다. 젊었을 적과 마찬가지로 잠을 자지 않으면서까지 일하는 황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였다. 아내와 사별한 뒤에도 여전히 국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는 진심이었다. 그저 그가 신경 쓰는 국사(國事)의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긴 하나 때때로 침습하는 복잡미묘한 감정 앞에서는 철인(鐵人)처럼 보이는 그 역시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었다. 이번에도 세차게 밀려오는 그리움과 번뇌 앞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배우자, 분신이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과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그녀는 몇 년 전에 그의 곁을 떠나 영원한 안식을 맞았다. 그런 그녀를 떠올린 황제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고, 그 안에서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끌어모았다.

 

  첫 번째로 확인한 기억의 조각은, 테오도라와의 첫 만남과 그녀와 결혼하기 이전의 추억이었다. 아직 그가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양부를 보좌하던 시절,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차 경주를 관람하는 겸 녹색당의 동태를 확인하러 히포드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날 히포드롬에서 그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자신의 계획을 온전히 실행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테오도라에게 저절로 시선이 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드러진 미모가 관심을 집중하게 된 첫 번째 요인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어조, 그리고 본연의 지성과 지혜가 묻어나는 메시지가 그의 마음을 더욱 큰 폭으로 뒤흔들었다. 그녀에게 접근하려 하는 남자들에게는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치기 어린 질투심을 의식하기까지 했다. 주체할 수 없던 강샘을 억누르고 마침내 테오도라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때 그는 다소 냉담하게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였으나, 그러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보려는 듯 던진 농에 당혹스러워 안절부절못하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발언을 최대한 경청하고 그녀를 존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런 유스티니아누스를 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귀족은 식자층이란 사람이 비천한 계집에게 마음을 단단히 빼앗기다니 소작농 출신이란 근본은 어쩔 수 없다는 둥,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둥 저마다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그러한 구설이 자신의 긍지에 수많은 칼자국을 내긴 했으나, 그는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인고의 노력은 테오도라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당시의 고백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백이 그의 순정을 그녀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당신 정말로, 이런 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의 과거나 신분은 전혀 상관없어. 중요한 건, 당신이란 사람의 본질과 마음이야. 진주에 흙먼지가 묻어 있다고 해도, 그 아름다움은 불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생성된 무겁고도 뜨거운 덩어리가 그녀의 목구멍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남자가 있었던가? 설령 입에 발린 표현이라 해도, 귀족 중에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남자가 있었던가? 게다가 자신이 그를 시험하는 농담을 몇 차례 던졌어도, 몇몇 사람이 그와 자신의 지속적인 만남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분명해 보여도 꾸준히 자신을 아껴주며 동등하게 대해준 사람은 눈앞의 그 남자밖에 없었다. 사랑! 그랬다. 테오도라의 창백한 얼굴은 핏기가 돌아 발그레해졌고, 심장의 박동은 점차 뚜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고조된 것과 별개로, 현실적인 걱정거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하지만 고위 관리인 당신이 저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 지금 당장은 우리의 관계가 만인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지. 그래도 난 당신을 단순한 정부(情婦)로 취급한다거나, 당신과 영영 이별하고 싶지는 않아. 혹시, 일단 나와 같이 살아보는 건 어떻게 생각해? 당신과 내가 같은 보금자리에서 지내면서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 그리고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양부가 로마의 통치자라는 그의 입지를 염두에 둔 제의였다. 그 점에서도 확실히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의 이전 애인들과는 달랐다. 허황된 낙관에 젖어 테오도라에게 그녀를 계속 사랑할 거라 큰소리치다가 결국 결별한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처지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런 범부(凡夫)와는 전혀 다른 그의 성격을 확인한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고, 그렇게 그들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몇 년에 이르는 동거 기간에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아예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 사람은 그 어떠한 시련도 잘 버티어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두 연인의 관계가 적법하다고 공인받던 순간, 유스티니아누스는 여느 때보다 더한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엄숙한 의식 속에서 무표정을 유지하긴 했으나, 고양된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히고 가슴을 쿵쿵 뛰게 하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간에서 그와 그의 아내에 대한 근거 없는 낭설이 빠르게 퍼져나가긴 했지만,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테오도라와 자신의 영혼이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의 풋풋한 추억에 젖어, 황제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 이후의 기억을 서서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떠올린 기억은 황제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와 연관된 단편이었다. 단독 황제로 정무를 본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았을 시기에 그는 제관과 목숨을 한꺼번에 잃을 뻔했다. 그때 밤하늘은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뒤덮여 기기괴괴한 빛을 띠었고, 폭도들로 돌변한 시민들의 음성은 고막을 찢을 듯했다. 누군가가 먼 곳에서 수도가 불타오르며 재와 모래가 이리저리 흩날리는 광경을 보고는 유황과 불이 도시를 덮친다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생존에 대한 절박한 욕구 때문이었는지 유스티니아누스는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항구로 몰래 도망치고자 하였다. 그런 그를 만류하며 명예와 위신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람은 테오도라였다. 그녀의 질타 섞인 격려에 용기를 낸 그는 시민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원로원의 권력을 다소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분노가 훑고 간 도시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까지, 그리고 그들의 고조된 감정이 다소 가라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황궁의 정원에서 머릿속으로 이러한 사실을 곱씹던 황제의 곁에 황후가 살며시 다가갔다.

 

  "폐하, 시종들도 옆에 두지 않고 같은 곳을 오랫동안 서성이고 계시더군요. 무슨 생각을 하시고 있었는지 감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내가 신에게서 진실로 어떠한 소임을 받은 것인지, 그리고 시민들의 의사를 그들의 피로 잠재운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그랬군요."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어떠한 연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신분을 밝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농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근위대에 있었던 숙부이자 양부 덕택에 일반적인 귀족 자제와 다름없는 교육을 받아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부 대신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뚜렷한 공적도 세웠다. 그러나 지체 높은 기성 귀족들의 시기심과 열등감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을 자지 않는 황제'라는 이명을 얻을 정도로 밤낮 구별 없이 국정에 몰두하였지만, 돌아왔던 건 원로원 의원을 위시한 귀족들의 냉소와 야멸찬 시선이었다. 그러한 외부적 요인에 굴하지 않기 위해선 흔들리는 영혼을 다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터였다. 이런 점을 토대로 그의 기저 심리를 추측해보자면, 황제는 '신에게서 선택받은 자'로서의 소명감 하나로 지금까지의 번뇌를 떨쳐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 반란으로 인해 그 소명 의식이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군중들의 반기, 그리고 기성 귀족들의 술책으로 말미암아 유스티니아누스의 내면세계에 큰 흉터가 남았고, 그 흉터가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강인하고 냉정하게 보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하면서도 심적으로 남몰래 괴로워하는 그를, 황후는 최선을 다하여 위로하고 싶었다.

 

  "확실히 작금의 반란은 이 도시와 폐하의 마음에 깊디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죠. 그렇지만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폐하의 심지가 정말로 굳세다면, 폐하께서 작금의 반란이 남긴 상흔을 극복하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죽음도 불사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지 않기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사람은, 결국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아직 방황하는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기 위해, 테오도라는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신께서 당신에게 어떠한 사명을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자줏빛 예복과 제관을 버린 채 이 도시에서 달아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당신은 지금 자줏빛 예복을 걸치고 제관을 머리에 쓰고 있죠. 폭도들과 몇몇 귀족의 동란을 마침내 이겨냈다는 건, 신께서 특별히 당신을 눈여겨보고 계신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폭력에 대한 당신의 대응을 신께서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봅니다. 만약 신께서 당신의 조치를 수긍하시지 않으셨다면, 현재 우리가 이렇게 한가로이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

 

  어느새 그녀는 유스티니아누스를 '폐하'라 호칭하지 않고 그가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살며시 남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설령 신께서 당신을 외면하신다고 해도, 저만큼은 당신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당신은 '신분' '과거'라는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저를 구원하고 당신의 진정한 벗이자 분신으로 인정해준 사람이니까요.“

  "테오도라."

 

  황후의 따뜻한 말에 황제는 두려움과 불안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가녀린 손을 맞잡고 황후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근까지 검붉은 빛을 머금었던 밤하늘은 본연의 검푸른 색상을 되찾았고, 오색찬란한 별과 새하얀 달이 저마다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해낸 황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면을 지배하던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신과 테오도라의 관계를 재확인한 기억 자체는 가치 있는 추억이었지만, 이후에 떠올릴 기억들이 내포한 불길함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하기만 해도 정신을 헝클어뜨리는 기억이 제멋대로 솟아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나쁜 기억 중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황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 웅얼거리는 음성, 전신을 불태워 없애는 듯한 고통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역병이 온 세계를 뒤덮던 시기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많은 시민이 고열에 시달리거나 각혈하고, 제대로 거동하지 못한 채 착란 증상을 호소하며 죽어갔다. 살아남은 시민들 사이에선 신이 로마에, 그리고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에게 천벌을 내린 것이라는 풍문이 자자했다. 유스티니아누스마저 병마에 시달리자, 그 소문은 단순한 낭설로 치부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침실에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고, 때로는 피를 울컥울컥 토하며 살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시중드는 자들 대부분은 황제가 얼마 못 가 승하할 것으로 짐작하여 황제를 단념하였으나, 황후만은 예외였다. 테오도라는 자신의 반려 대신 밤낮으로 정무를 돌보았고, 그 시간 동안에는 시종들과 시녀들 일부에게 황제를 극진히 보살필 것을 분부하였다. 그리고 공무를 보는 틈틈이, 그리고 업무가 끝난 이후 남편에게 달려가 그를 손수 간호하였다. 한참 황제가 역병과 사투를 벌이던 어느 날 한밤중에, 그녀는 사경을 헤매는 황제의 곁에 바짝 다가갔다. 시녀들은 그런 황후를 필사적으로 말렸으나, 황후는 시녀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연인의 옆에서 나직하게 무어라 속삭이면서, 때로는 불덩이 같은 그의 뺨과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신과 성인들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듯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올렸을 전구(轉求)가 신과 성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태양이 침실에 그 빛을 드리우자 황제는 가까스로 눈을 떠 황후를 바라보았다. 비록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으나, 죽음이 그의 목숨을 거둬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분명했다.

 

  "폐하, 드디어 죽음과의 악전고투에서 승리하셨군요. 역시 신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지친 기색이 완연해 보이는 테오도라를 가만히 응시하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말았다가 하던 나날을 떠올리려 애썼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았다네. 아니, 그저 꿈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했어."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병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난 그저 세차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소. 살이 썩고 뼈가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느낌이었지. 영원히 그런 고통에 시달릴 것만 같았고. 하지만."

 

  오랜만에 입술을 뗀 그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심상 속에서 아련하게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네. 처음에는 그저 환청인 줄 알았소. 그러나 그 음성은 점차 또렷해졌고, 마침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점차 눈부시게 빛나는 형상으로 구체화하더니, 내 얼굴을 매만지며 쓰디쓴 괴로움을 덜어주었어. 깊디깊은 내면에서 나를 치유해준 당신이 했던 이야기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있네. 이렇게 말하더군. '유스티니아누스, 제 말이 들리시나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등지고 신마저 당신을 버리신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기력과 활력이 쇠해도, 그리고 저의 생명이 위협받을지라도 저는 영구히 당신의 편에 서겠습니다. 언제라도 당신이 돌아오리라 믿어요. 그때를 기다릴게요.'라고……."

 

  놀랍게도 그가 기억해낸 말은 테오도라가 밤새도록 유스티니아누스의 곁에서 읊조렸던 구절과 거의 똑같았다. 이는 황후의 염원 덕분에 황제의 피폐해진 심신이 어느 정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기적과도 같은 일에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황제의 손을 꼭 잡았고, 반짝이는 이슬이 그녀의 손등 위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때 황후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똑똑히 본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밖에 없었으리라. 그 순간을 떠올린 황제는 죄책감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고, 이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내면에서 마지막으로 솟아난 기억은, 이제까지의 기억 중 가장 비참하고 애써 억누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와 함께할 것 같았던 테오도라가 숨을 거두는 상황을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그가 전염병에 걸렸던 때처럼 황후는 생령(生靈)의 반짝거림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달리, 낮과 밤이 여러 차례 바뀌어도 그녀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황후의 의식이 없거나 황후가 참을 수 없는 극한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로서 정무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반려자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길 때마다 침실에 누운 황후 곁에 머물렀다. 병세의 차도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그저 머리가 꽉 막히고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었다. 몇 년 전 그녀가 그랬듯 신과 성인들에게 간절히 기도도 드렸지만, 이번에는 신이 황제의 절실한 소원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인간의 염원과 초월자의 뜻이 그렇게 줄다리기를 벌이던 어느 날, 의식이 없던 테오도라가 잠시나마 희미하게 눈을 떠 유스티니아누스를 찾았다. 실낱같은 목숨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그녀는 괴로움 속에서도 그녀 자신보다도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벗이자 배우자에게 어떠한 전언을 남겼고,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이 그녀의 목숨을 거두어갔다.

 

  "황후 전하!"

  "황후 전하께서 승하하셨다!"

  "어서 사제님을 불러! 빨리!"

  "……."


  시종들과 시녀들이 황후의 죽음에 대경하여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하는 동안, 황제는 그저 멍하니 시신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듯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표정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의 유언을 곱씹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을 만나 지금껏 함께 살았던 것이, 저에겐 지고의 행운이자 행복이었어요……. 그리고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신의 가호를 받아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를……."

 

  "테오도라……, 나는 나는, 내가 과연 잘해나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정말로 나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께서 정말로 나를 선택하신 것인지, 그것도 알 수 없소. 부디 가르쳐주시오. 나는 어떻게 해야……."

 

  독백을 마저 끝내지 못한 채, 그의 눈에서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뺨을 타고 왈칵왈칵 흘러내렸다. 이 순간, 그는 광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며 위엄을 갖춘 황제가 아니었다. 그저 늙고 병든,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의 인간일 뿐이었다. 황제가 깊숙한 내면세계에서 외부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태양이 자신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아침노을이 그의 눈물을 반짝였고, 제관의 보석들과 어깨의 브로치는 둔탁한 빛을 냈다. 일찍이 기상한 새들은 공허 속에서 지저귀었고, 나비 한 마리는 날갯짓하며 황궁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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