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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파렌 지방의 여름은 뜨거운 햇볕으로 유명하다.
중부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인 만큼 그 일조량은 상당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도 없는 뜨거운 여름날의 오후,
석회가 발라진 2층 저택의 발코니에 두 명의 남자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토박이라면 누구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무너질 듯 썩어가는 발코니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등을 기댄 나이든 남자가 중얼거린다. 남자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흘렀다.
“주인어른, 시간이 너무 지체 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요?”
상대를 걱정하는 듯 한 말투와는 달리 중년인의 표정은 오히려 지루함과 피곤함이 가득했다.
우직하면서도 강건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다부진 어깨에는 악명 높은 몬트델 해군의 낡은 견장이 부착되어 있었다.
독수리의 발톱과 닻이 그려진 그 견장은 만들어진 지 최소 10년은 지나 보이는 오래된 물건이었다.
“자네는 그게 문제야, 팔먼. 사건이라는 건, 적당히 익어야만 풀 수 있는 경우도 있다네.”
팔먼이라 불리는 늙은 전직 해병의 질문에 면박을 준 젊은 귀족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나무잔에 가득 찬 무언가를 벌컥 들이켰다.
알싸한 향기가 늙은 해병의 코를 간질였다.
“그건 확실히 잘 익었구만요.”
“그래. 그러니 제발 입 좀 닥치고 이거나 같이 드시게.”
팔먼은 청년이 내민 나무잔을 그대로 받아 들이켰다.
알싸한 사과주의 향기가 강하게 목을 타고 올라간다. 혀를 굴려 입 안의 술을 강하게 씻어내고 그는 다시금 질문했다.
“이미 다 해결하신 것 아닙니까요? 그렇게 어려운 사건입니까요?”
청년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층을 힐끔 바라봤다. 다행히 사람들 중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청년은 눈을 부릅뜨고 늙은 해병을 노려봤다. 눈치껏 입 좀 닥치라는 소리다.
삽시간에 늙고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팔먼은 입을 삐죽이며 조용히 사과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좀 낫군.”
“하다못해 저 아래에서 마시지 그러십니까요. 쪄 죽고 싶으신 건 아니실테고.”
상하관계를 은근히 넘나드는 팔먼의 말투에도 청년은 별다른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한 듯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아예 사과주 궤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펑-. 잘 익은 사과주의 주향에 둘의 시선이 하나로 모인다.
청년이 웃었다.
“사실 자네 말대로 퍼즐은 거의 풀렸어. 허나 아직 하나가 남았거든. 우리는 그걸 기다리는 중이고.”
테이블 위에 노트가 펼쳐졌다. 대충 그려진 그림들은 남작가의 주요지점들을 가리키는 지도임에 틀림없었다.
청년이 그 중 붉게 원이 그려진 지역과 남작가의 성채를 검지로 주욱 그어 표시했다.
“살해 현장이 여기였지. 과수원. 그리고 이곳이 남작가. 그리고 그 한가운데인 이곳이...”
“우리가 있는 여기입죠. 양조장.”
“그래. 그럼 우리가 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겠군.”
“모르겠는뎁쇼.”
팔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능청스레 대답했고 청년은 그런 그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장미가 그려진 펜던트를 만지작댈 뿐이었다.
어느덧 햇살이 발코니 끝자락에 걸쳐 숨을 고르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는 궤짝 째로 비워진 사과주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해 햇살처럼 푹 익어버린 팔먼이 도롱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골이를 시작할 무렵,
남작가의 늙은 행정관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어제와는 달리 낡은 킬트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앉으시죠.”
청년의 말에 행정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말 수가 없었다.
청년이 사과주가 담긴 병을 슬쩍 들어보이자 행정관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테이블 아래로 행정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고, 청년의 발달된 오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작께서는 이 사건을 묻고 싶어 하십니다.”
“흠. 영지에 살인사건이 났는데 범인을 잡고 싶지 않으시다?”
“농노 몇이 뒈진 것 뿐 입니다. 빈대 하나 잡으려다가 온 집을 다 태워 버릴 순 없습니다.”
청년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행정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노는 생명이 아닌가?”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농노든, 아니면 공작의 서자이든.”
얄팍한 입술사이로 새어나오는 허세 가득한 말투, 시골귀족 특유의 잰 체 하는 행동이 여실히 드러난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농노가 죽은 것처럼 너도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골이라 그런지 수도 귀족들보다 표현이 직설적이었다.
짜증이 확 끓어오른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협박을 하다니.
엎어져있던 팔먼이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슬그머니 일어나 청년의 뒤에 섰다. 엉거주춤한 태도였지만 기세만큼은 강렬했다.
행정관의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서자를 따라다니는 한량인줄 알았더니 기사급 무인이었다. 팔먼의 입 주위는 침과 사과주로 범벅이었지만 그것이 조금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한 기도가 느껴졌다.
이것이 청년이 이 주정뱅이 전직 해병을 항상 데리고 다니는 이유였다.
청년은 씨익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공작의 서자도 목숨은 하나지. 근데 농노 몇 뒈진 사건을 덮는게, 아무리 서자라지만 공작가의 일원인 나에게 이빨을 들이밀 만큼 가치가 있나?”
“아니, 아니.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저희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행정관의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역시 이놈들은 약육강식에 철저하다. 약하다 싶으면 그게 아무리 대귀족의 핏줄이라도 물어뜯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들보다 강한 것 같으면 순식간에 협상을 하려고 든다.
수도 귀족들보다 더 비열한 놈들이야.
그건 그렇고...
입이 바짝 말라 고개를 돌려 혀를 적시는 도중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작의 용병들이었다. 용병이라지만 실제로는 산적이나 다를 바 없는 놈들.
기강이나 훈련도 없는 형편없는 놈들이지만 무시하기엔 놈들의 수가 꽤 많았다. 난전의 눈 먼 화살에 죽은 황제나 장군이 얼마나 많았는가.
가죽 갑옷조차 챙겨 입지 못한 지금, 녀석들과 부딪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저 팔먼이야 문제없겠지만 자신은 전혀 칼을 다룰 줄 모르는 문관이므로.
이쯤 하는 게 좋겠다. 퍼즐은 얼추 맞춰진 것 같다.
“좋아. 남작의 자치권에 본 공자가 무리한 간섭을 하였나보군. 이만 돌아가겠네. 본가에 기별을 넣어주게.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말이야.”
행정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런데 말이야. 하나만 남작께 전달해주시게. 내 형제들이 여기에 너무 많더군. 난 그게 좀 불만이야. 그 점 꼭 명심하라고 전하게. 알겠나?”
늙은 행정관은 청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청년은 자세히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팔먼, 돌아가세.”
“엣, 갑자기 말입니까요? 지금, 이제 곧 해가 넘어 갈 텐뎁쇼?”
“빠르게 이동한다면 공작령 끄트머리까지는 오늘 내에 도착할 듯 싶은데.”
“흥, 말이란 생물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쇼. 그것들이 배처럼 하루 종일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아, 팔먼. 이렇게 투닥 거릴 시간에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나?”
팔먼은 부리부리한 눈매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말, 이동, 일몰, 공작령.
이 단어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행정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팔먼은 뭔지 알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젊은 주인에게 대답했다.
“네. 지금 당장 출발합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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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애충 봄 기운에 취해 써보겠습니다. 생각나는대로, 키보드의 정령이 원하시는대로 써내려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