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 전소
"흐어억, 헉, 헉, 느, 늦어서, 헉, 죄송, 합니다, 말을, 처음, 타봐, 서, 요, 후우우..."
"아닙니다, 자문관님. 이런 몬순[주:장마를 가리킴. 비가 말 그대로 멈추지 않고 쏟아진다.]철에 말을 처음 타셔야 한다니 자문관님도 말도 피차 고생 많이 했겠지요."
"어, 그런 거 같나요?"
"당신이 치안대감 직속 적색 연금술 자문관이지 무슨 골렘이 아니라면, 그렇게 진흙투성이가 된 사람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삼척동자도 눈치를 챌걸죠. 얼른 들어갑시다."
***
"아, 먼저 들어가십시오. 잠시 옷 좀 털고 가겠습니다."
"빨래할 동안 입으실 옷은 적당히 준비해 놨습니다."
"하하, 잠시면 됩니다."
자문관은 오른손 검지를 한 번, 왼손 중지를 한 번씩 뚜둑 소리나게 꺾는다. 두 손가락이 맞닿았다 떨어지자 손가락 사이에 거미줄같은 얇은 실이 늘어진다. 검지가 검지 끄트머리를, 중지가 중지 끄트머리를 가볍게 스치다 떨어지자 그 사이에도 얇은 실이 뽑혀나온다. 무명지에 약지까지 중지와 검지가 찍으며 지나가는동안 실이 늘어나며 점점 굵어지자 번득이며 자신의 정체가 불이라는 걸 방금 깨달았다는 듯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엄지를 찍고 자문관이 두 팔을 갑자기 확 벌리자 스무 가닥이 넘는 실들이 손가락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공에 둥실 떠오른다. 이내 비 섞인 바람이 춥다는 듯, 서로를 끌어안듯, 공으로 뭉쳐서 털실뭉치처럼 자그마한 공이 되자 자문관은 그것을 마치 귀한 보석처럼 손으로 감싼다.
그리고 갑자기 박수를 치자, 자문관의 손바닥에 불이 잔뜩 묻는다. 자문관은 불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온 몸에 잔뜩 묻은 진흙을 닦아낸다. 불이 근처에만 가도 진흙은 0.5초만에 다섯달은 가물은 땅처럼 말라비틀어져서는 쩍쩍 갈라졌다. 자기 가방을 싹싹 문지르며 밀봉이 잘 되어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다가, 입을 쩍 벌리고 자기를 지켜보던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시장님? 죄송합니다만 시장님 옷을 같은 방식으로는 말려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옷은 제 15공방에서 제게 선물한 건데, 돌과 유리로 "
"그거 불 아니오??"
자문관은 뜨악한 눈빛으로 시장을 마주했다.
"그렇죠? 적색 연금술사들이 이걸로 생업을 이어가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다고 해서 몸에 불을 바르는 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말이 되죠."
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그럭저럭 멀끔해진 코트를 탈탈 털어 말라빠진 흙덩이를 털어내며, 자문관은 잠시 빗물에 먼지가 흐르도록 밖으로 나섰다.
저 멀리 번개가 산꼭대기를 후려치고 있었다.
"아. 이거 아직 붙어 있었군."
빗속에서도 아직 번쩍이며 타던 불을 다시 손가락을 우둑 꺾어 끈 뒤 시장에게 돌아선 자문관은 짐짓 빙그레 웃어보인다.
"상당히 염치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요깃거리 있습니까?"
***
도시 사람들 사이엔 정글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손님 대접이 부실하다는 편견이 퍼져 있다. 하지만 이는 초원과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들이 너무 손님 대접을 융숭하게 해서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일 뿐이라고 반박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정글은 보이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곳이다. 문제는 못 먹을 것이 더 많아서 급하게 주워 먹다가는 단숨에 조상님 뒤를 따르기 십상이라는 것일 뿐이다.
자문관의 주관적인 평가로는 시장이 대접한 식사는 확실히 맛이 정말 죽여주는 수준이었다. 한 그릇이면 조상님 얼굴이 훤히 보일 것 같았다. 정말 한 그릇만 더, 아아, 이거 진짜 죽인다. 그 자식은 정글에 대체 무슨 원수가 졌길래 그런 씨알도 안 먹힐 악의적인 거짓말을
"으흠."
자문관은 박박 긁던 그릇을 수줍게 내려놓으며, 갑자기 문명인의 혼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짐승같은 자신의 추태를 돌아본다. 국물이 평소보다 많이 튄 것만 제외한다면 학생 때랑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저와 제 집사람 음식이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물론 그 먼 거리를 익숙하지도 않은 수단으로 급하게 달려오셨으니 소모한 기력을 보충해야한다는 입장은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이제 빨리 가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문관은 그가 비운 그릇들을 마주하며 약간의 가책을 느끼고는 일어난다.
"이거 죄송합니다. 힘을 좀 많이 써서 그만...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
"이야기가 빨라서 정말 좋군요. 젊을 때 봤던 연금술사들은 정말 대화가 힘들었었습니다."
"뭐 저도 원래는 그런 놈들과 큰 차이 없는 수준으로 사회생활을 합니다만, 사건이 워낙 심각해서 말이죠. 본부 배급식사만 먹다 이런 별미에 눈이 도는 바람에 그만 민폐를 끼쳤으니, 저도 예의를 차리는 게 맞는 거겠고요."
식탁에서 일어난 시장이 밖으로 몸을 돌리지만 자문관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님,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달이 조금 저물면 갑시다. 잠시 쉬어도 크게 차이는 없을 겁니다."
"아홉 명이요."
"네?"
"아홉 명이 자기 마체테 자루에 자기 피를 묻혔소. 세 명만 피를 묻혀도 그걸 놈이 들으면 소름이 돋을 일인데 말이지. 아홉 명이 생업을 때려치우고 자기 마체테 날에 그놈 피를 묻히겠다고 맹세를 했소, 자문관. 빨리 그놈의 꼬리를 잡는 편이 좋을 거요. 최대한 빨리."
***
자문관은 가방의 죔쇠를 풀고 안쪽을 뒤적거린다. 빗소리만 그득하던 방갈로 안에선 작은 소음도 너무나 분명히 들린다.
"보안관이 초동처리를 잘 해놔서 다행입니다. 괜시리 복잡하고 쓸데없는 추리를 할 수고를 덜었어요."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보안관의 표정이 순간 누그러졌다. 하지만 다음 숨을 들이쉬는 동시에 다시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가서 그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방갈로 안이 빗소리만 그득하던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 사람이 얼마 전까지 매우 활발하게 살았음이 분명한 방갈로의 구석에는 노인의 시체가 웅크리고 있었고, 그 주변의 책장과 서랍장을 포함해 완전히 새카맣게 타 버렸던 시체는 덥고 습한 정글의 날씨로 끔찍하게 부패해 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시신을 수습조차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을이 통째로 저를 시장직에서 끌어내려서는 몽둥이찜질을 하려고 했습니다. 보안관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살인범 놓치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놈은 알아서 마체테를 뽑으라고 으름장을 놨기에 뼈가 부러지진 않았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수사가 끝난 뒤에는 제가 수습을 돕도록 하죠. 저도 의술의 은혜를 베푸는 분들을 존경하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두 벽과 바닥에 말뚝을 박고 일어난 자문관은 오른손 검지와 왼손 검지를 다시 뚜둑 꺾어 실을 뽑아 말뚝을 잇는다. 한 변이 1미터를 좀 넘는 수준의 큰 삼각형이 그려지더니, 말뚝에서 검지로 실이 이어져 피라미드 비슷한 사면체를 이룬다.
"시동. 공급. 충전. 가속."
실이 마치 심장에 이어진 핏줄이 된 듯 맥동하며 조금씩 굵어져 간다.
"보안관. 당신 차례입니다."
그게 가능한 줄은 누구도 예상 못한 듯 했지만, 보안관의 얼굴은 거기서 더더욱 구겨져 있었다. 품에서 비눗방울이라도 꺼내는 것처럼 천천히 꺼낸 구슬을 살짝 손톱으로 긁어 틈새를 찾더니, 살짝 엄지와 검지로 붙들고 비틀어 연다. 순수한 광채의 덩어리가 튀어나와 세 말뚝으로 작은 번개를 뿜는다. 그리고 삼각형이 색깔을 띄며 진해져서 주변에 찬란한 빛을 뿌린다. 썩고 주저앉은 피부 위에 한 꺼풀 빛이 덮이자, 노인은 조금 더 살아있는 모습에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덜 끔찍해진 건 아니었다. 자세는 여전히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고, 선혈은 오히려 선명해졌으며, 얼굴의 표정에서는 인류 최악의 악몽으로도 이끌어내지 못할 법한 표정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시커멓게 불타 있었다. 자문관의 귀에는 노인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끔찍한 단말마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산발적으로 통곡 소리가 터졌다가 뚝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보안관은 눈을 비비며 딸꾹질하다 겨우 내뱉는다.
"이건 듣던 것보다도 엄청난 물건이군요. 수도에는 그게 널려 있는 겁니까?"
"이건 오히려 수도에도 거의 없습니다. 아직 연구 중인 물건이기도 하고, 시범적용을 전문 치안인력이 적고 시신보존조차 어려운 오지, 그러니까 도서지역, 고산지역, 밀림지역을 대상으로 했거든요. 무엇보다 이 재현장치의 놀라움은 단순히 고인이 죽은 직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문관은 광채의 덩어리를 슬쩍 문지르며 입 안에서 몇 마디 중얼거린다. 파스슷 소리를 내면서 빛나는 삼각형이 새로운 광경을 비춘다.
"재현장치의 마술이 적용되었을 당시 모든 원소의 흐름입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수많은 선이 흐른다. 어느 한 지점에서 출발해서, 각자의 곡선으로 궤적을 완성하고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은하수가 통째로 흐르는 것 같다.
그 은하수가 가장 찬란히 빛나는 곳은 노인의 피다.
"놈은 화족 원소에서도 전소, 그러니까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라면, 번개를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놈들은 굉장히 난폭한 원소입니다. 원래는 어디에나 조금씩 있을 정도로 매우 엷게 흩어져 있죠. 사람이라도 누구나 몸 속에 약간씩은 전소가 있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정상인 인간도 피에 전소가 흐르지는 않습니다. 피에 가득한 전소와, 곳곳에 터진 혈관들, 특히 심장이 완전히 박살난 상태로 보면, 단박에 죽인 것도 아니고 겉으로는 혈관 내부에 전소로 착화반응을 일으켜, 다시 말해, 핏줄 안쪽부터 불로 지져서 고문한 다음,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머리를 꿰뚫었습니다."
무겁기만 하던 한밤중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다. 누군가 재채기만 해도 공기가 터질 것 같다. 어둠 너머의 시선은 이글거리며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 자문관은 어렵게 입을 뗀다.
"이자는 십중팔구 매우 숙련된 솜씨로 마술을 휘두르는 녀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화 족 원소를 모으는 쓸데없는 짓을 해서까지 피해자를 고문하는, 취향이 상당히 더러운 녀석입니다. 아마 이만큼 작은 마을에 이런 녀석이 있었다면 진작에 두각을 드러냈겠지요."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진작에 유학을 갔을 테고, 오랫동안 외부인이 여기를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정기적으로 외부인들이 오기는 하지만, 순회무역상들이라든가, 우체부라든가, 전도사 등 항상 정기적으로 와서 안면을 튼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목록을 마련해 주십시오. 지금은 그 사람들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인심 좋은 장사꾼들은 인맥을 넓히기 위해 빈 마차에 나그네들을 태워 주는 일이 잦습니다.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겁"
"왜 죽인 겁니까!!"
구겨진 얼굴의 틈새로 폭포를 쏟아내던 보안관이 사자후를 토한다.
"이분은 그저 밥 조금 얻어먹는 대가로 우리네 촌놈들 병을 밤새도록 돌봐주셨단 말입니다! 방앗간집 아저씨가 늘그막에 얻으신 막내는 진짜 모두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밤을 꼬박 새며 그 어린 것을 괴롭히던 벌레들을 남김없이 뽑아주셨습니다!"
"나는…"
"그러다 진짜 쓰러진다고 말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쓰러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여기서 수도의 왕궁과 탑과 원로원 노친네들이 무슨 싸움을 벌였는지, 벌이고 있는지 주절거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시간조차 없지. 지난 왕조까지 치면 사백년도 넘은, 지루하고 신물나는 권력투쟁의 역사니까. 나조차 이해 못 했어. 하지만. 하나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분은 꽤나 힘있는 신하 하나와 척을 졌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하시겠지. 맞아요. 난 너무 늦었습니다. 중간에 여기저기서 시간을 끌어대서, 전쟁소식이라도 전하는 파발마냥 말을 바꿔가며 달려야 할 만큼 늦었단 말입니다."
"───"
"…이 의사를 전소로 죽였던 이유는 아마도 마침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던 놈이기 때문일 겁니다."
문득, 언제나 치던 번개가 마을 근처에 떨어졌는지 엄청난 천둥을 뽐내며 자문관의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늦게 도착했어도 시장님의 달력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몬순철, 앞으로 최소 보름은 더 가죠?"
시장이 눈을 번득인다.
"이번 몬순이 늦게 시작했으니 한 달을 더 가도 이상하지 않소."
비가 마을을 가두고 있었다.
"아무리 변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녀석이라고 해도 몬순철에 정글을 헤치고 갈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았을 겁니다."
누구라도 감시탑이 지켜보는 포장도로를 거치지 않고는 중앙국도 검문소에 닿지 못한다.
"마을 문지기도 그런 짓은 엄두조차 못 냅니다. 이 계절에 함부로 나갔다간 여기저기 생겼다가 사라지는 급류에 휘말려 죽는 건 상식 아닙니까?"
놈은 몬순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갈 심산이었겠지.
"그동안 번개가 여러 번 후려쳤으니, 전소가 땅에 엄청 쏟아졌을 겁니다. 그리고 보통이라면 흩어졌을 그 전소는 금속의 광맥에 달라붙었을 겁니다. 이 근처에,"
보안관이 함성을 지른다.
"철광이 있지, 서쪽 산봉우리 너머에!"
그 말을 남기고 거대한 무언가가 사라진다.
"사람들을 모아 주십시오."
시장은 이미 자신의 지팡이를 거꾸로 쥐며 날카로운 심을 뽑아 보이고 있었다.
"밖에 소리 들었습니까? 얼른 뒤쫓아야 할 겁니다."
+ 어지간히 다듬을 만큼 다듬었습니다. 볼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인 걸 보니 꽤 만족스럽게 쓰긴 한 모양입니다.
++ 사실 이야기는 어떻게 완성이 됐지만 전소 자체에 대해서 소개한다는 목적은 그냥 묻혔네요. 의도도 그렇지만 이거 그냥 전자 아닙니까? 하면 맞는데…조금은 다릅니다. 예. 솔직히 불자면, 이게 어디가 다른지는 쓰면서 윤곽이 잡히겠죠.
+++ 보안관 명칭을 넣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모티브가 오버 더 시리즈인데, 이젠 너무 티나잖아요. 어쩔 수 없죠. 적절한 게 떠오르질 않는데. 진짜 그냥 사또에 형리로 했어야 했나.
++++ 사소하게 조금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