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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어두운 폐허 속에서 들리는 건 오직 세호의 힘없는 목소리 뿐.
그는 안간힘을 쓰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무언가에 부딪쳤는지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호는 그제야 주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온통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파편으로 가득한 폐허 속에 그는 서 있었다. 지옥과도 같은 모습에 세호의 심장이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걸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세호는 자주 가는 마트에 들러서 저녁 반찬 재료를 사고 간식거리를 사려다가 갑자기 들려온 대피 방송을 듣고 지금껏 받았던 민방위 훈련이 무색하게 앞다투어 도망치는 사람들에 섞여 대피소로 도망치다가 괴성이 상가를 덮쳤고 거기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세호는 눈을 바닥으로 주위들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파나 고등어를 비롯한 자신이 마트에서 산 식재료들과 떡볶이가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맞다, 그 애는?!’
콘크리트에 눌려 쓰레기가 되어 버린 떡볶이를 내려다보던 세호는 방금 떡볶이 가게에서 자신과 만났다가 함께 대피소로 도망치던 은발머리 소녀를 떠올렸다.
“야, 어디 있어?”
-히야아악!!
-키이이에엑!!
소녀의 인기척 대신 들려온 날카로운 괴성.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세호가 긴장하기엔 충분했다.
“뭐, 뭐지?”
-캬아아아아악!!!!
칠흑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해골처럼 앙상한 체격을 가진 괴인 무리가 이빨을 드러낸 채 세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양손에는 갈고리처럼 위협적인 손톱을 단 채로.
도망치기엔 늦은 상황. 괴인이 손톱을 세워 세호에게 뛰어들자 눈을 질끈 감는 세호.
“젠장....... 젠장!”
그 순간,
샤아악!
살을 무참히 찢어발기는 소리.
-까아아악......
그리고 힘없이 꺼져가는 괴인의 괴성.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 세호는 천천히 눈을 떴고, 반사적으로 세호를 놀라게 했다.
“허억...!”
세호의 눈앞에 한 소녀가 눈부신 은빛 기운이 서린 장검을 든 채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괴인의 몸뚱이가 세로로 갈라진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너... 살아있었구나…?”
허리까지 오는 은빛 머리카락, 넝마에 가까운 카키색 파카. 떡볶이 가게에서 세호와 만난 그 소녀였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세호는 방금까지의 공포와 피로감을 잊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신비하고도 뜨거운 은빛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호는 그 기운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이형력자...”
18년 전, 공간을 넘어 침략해 온 괴물, 인트루더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존재인 ‘이형력자’. 세호는 지금 이형력자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키야아아아아!!
-캬악!! 캬아아악!!
아직 남아있는 두 마리의 괴인이 창칼처럼 솟은 이빨을 드러내며 동시에 소녀를 향해 도약했다. 소녀는 백은빛 검을 양손으로 굳게 잡았다. 그녀의 검은 눈부신 은빛 광휘와 함께 불가사의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 가녀린 은발 소녀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소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괴인 한 마리의 갈고리 손톱을 피하고 백은빛으로 빛나는 칼날에 홀린 듯 괴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히아아악!
검이 은빛의 궤적을 그리며 무자비하게 괴인의 목을 갈랐고 머리를 잃은 괴인은 목에서 보랏빛 액체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져갔다.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칠흑색 괴인에게 시선을 두는 소녀. 괴인은 난폭한 기세로 갈고리처럼 솟아난 손톱을 마구 휘둘렀지만 은발 소녀는 괴인의 손톱을 어렵지 않게 피하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한 번 굽히고 맹수 같은 기세로 튀어 올라 양손으로 검을 내질렀고 어두운 지하 한가운데 눈부시게 번뜩이는 도신은 무자비하게 괴인의 가슴팍, 심장에 파고들었다.
-캬아아아악!!! 하아악!!!
심장을 꿰뚫린 괴인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부림이 점점 약해지더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무심한 듯 괴인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내고 지긋이 세호를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멍하게 생긴 흰머리 여자애가 나타난대.」
세호는 오전에 현모가 한 말을 떠올렸다. 누더기 진 옷을 입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을 한 하얀 머리카락 소녀, 딱 지금 눈앞의 소녀의 모습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걸까? 세호가 느끼는 건 공포가 아니었다.
허리까지 닿는 은빛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 비록 잔 흉터가 남아있었지만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으며 어쩐지 신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어 세호는 자신이 무슨 상황이었는지도 잊은 채 넋이 나간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정신 나간 얘기로 들리겠지만 세호에게 있어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기 위험하다. 떨어지지 마라.”
소녀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방금까지 야수 같은 기세로 괴인들을 베어 넘기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 지킨다.”
짧지만 분명한 목소리.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세호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투성이인 상황 속에서 이거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눈앞의 소녀는 자신을 해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쿠르르르륵.....
그 순간, 걸걸한 괴성이 들려옴과 함께 지하 주차장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세호는 애써 공포를 숨기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소녀는 검을 쥐어 싸울 태세를 취했다. 괴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그리고.......
-쿠르르르르륵!!
5m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의 거인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잿빛의 철갑으로 온몸을 무장한 그 모습과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과 위압감은 소녀가 쓰러뜨린 괴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악!!!
모든 것을 뒤흔드는 포효! 세호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거인의 포효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으, 으아악......!”
세호는 알 수 있었다. 이 거인, 자기네들을 사냥감으로 간주한 것이다!
-크아악!
“우왁!?”
거인이 체중을 실어 굵직한 오른쪽 주먹을 날리자 은발 소녀는 온몸으로 세호를 밀치며 가까스로 피하는 데 성공했다. 방금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엔 큼지막한 크레이터(Crater)만이 남아있었다. 만약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파앗!
소녀가 다시 뛰어들자 거인 역시 그녀를 첫 번째 사냥감으로 간주했는지 그녀에게 묵직한 주먹을 날렸으나 소녀는 마치 거인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도약해 주먹을 피하고 섬광 같은 기세로 거인의 주위를 종횡무진 움직였다. 거인을 도발하는 것처럼.
-쿠와아악!!!
은발 소녀가 계속해서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거인은 점점 인내심을 잃은 것인지 포효하며 소녀가 있는 지면에 주먹을 꽂았으나 소녀는 이미 몇 걸음 물러나 거인의 주먹을 피한 뒤였고 그 자리엔 무의미한 크레이터만 생길 뿐이었다. 소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인의 주먹을 발판 삼아 딛고 맹수 같은 기세로 높이 뛰어올랐고 그녀의 검이 눈부시게 빛나면서 거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를 비웃듯 돌연 그녀에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
“조심해!”
그녀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세호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소리쳤지만 소녀가 눈치챘을 땐 이미 그녀는 거인의 우악스러운 왼손에 붙잡힌 지 오래였다.
“윽......”
소녀가 거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거인은 그녀가 빠져나올 기회조차 주지 않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콘크리트 벽에 던져버렸고, 거인의 손에서 던져진 소녀는 쏜살같은 속도로 벽과 충돌했다.
콰직!!
그녀와 충돌한 벽은 벼락같은 굉음과 함께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고, 그 자리에 있는 건 예상치 못한 공격에 표정을 찡그리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거인은 걸걸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구석에 몰린 소녀에게 다가갔다. 살기등등한 그의 눈동자는 소녀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만둬!”
그때, 소년의 목소리와 함께 한 그림자가 거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거칠 것 없는 이 거인에게 맞서는 어리석은 이는 누구인가?
-쿠윽?
방금 전까지 소녀에게 보호받던 소년, 세호였다. 겁을 상실한 것인지 그는 잔뜩 눈가에 힘을 준 채 거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쿠아아아아악!!
세호의 무모함에 주차장이 떠나갈 정도의 포효로 대답하는 거인.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을까. 기세 좋게 끼어드는 것까진 좋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여기서 계속 서 있다간 세호는 물론 소녀의 안전 역시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호의 머릿속은 죽음에 대한 절망감이 가득해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되게 만드는 거야.」
스스로의 무모함을 순간, 한 여자의 목소리가 세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어째서인지 혼란스러운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세호의 머릿속이 맑게 개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말이 맞겠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세호.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거인을 노려보았다.
“위험해. 도망...”
세호의 등 뒤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 다시 세호를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소녀였지만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세호한테서 일어나는 일을...
“괜찮을 거야.”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세호. 등 뒤의 소녀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거인의 앞에 섰을 때부터 그의 온몸에서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용암처럼 솟구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감각....... 그랬었지?’
-크르르르르.....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가운데 세호의 몸속에서 흐르던 기운이 점점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래, 이판사판이다!”
소년의 온몸에서 불꽃처럼 솟아나는 푸른빛의 기운!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거인이 반사적으로 세호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콰아아아아!!!
한순간 강렬한 섬광과 함께 굉음이 지하 주차장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