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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소설] 죽지 못하는 사람들


"이 괴물!"

내 옆에 있던 군인 하나가 재빠르게 총을 들어 겨누려 했지만 내가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렸을 때 그의 눈에 군용 단검이 처박힌 채 쓰러지는 중이었고, 그런 중에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당기고 있었는지 총구에서 섬광이 멈추지 않았다

"으... 으아아아악"

봉팔이가 엎드린 채 비명을 지르자 나 역시 반사적으로 엎드렸지만 고개를 반쯤 올려 태세를 살폈다.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린 김민철은 시체에서 단검을 뽑고 내 앞에 무전을 치던 군인의 어깨 위에 양발바닥을 대고 올라탄 채 허리를 굽히고 삭아빠진 권총을 갈겼고 그 주검이 땅에 닿기도 전에 박차고 나아가 반파된 출구로 향했다

"갈겨! 갈기라고!"

김민철이 출구를 향해 몸을 내던지자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총성이 울려퍼졌고 그 사이로 작게나마 인간의 단말마가 새어나왔다. 전신이 전기 그릴 요리가 되고 손가락 발가락 여럿이 바스라져도 그 전설의 김민철이라면 구식 권총 한자루와 단검 만으로 저들을 차례 차례 죽여나갈 것이다.

문틈에 살짝 기대어 주변을 살피니 이미 주변에 머리통이 터지거나 경동맥이 베인 군인 여럿이 널부러져있고 남은 셋이 대열을 유지한 채 총을 겨누는데, 그 사이 김민철은 군용 차량의 보닛 위를 슬라이딩하고 착지하기 무섭게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정면으로 전력질주하는 것이다.

"씨.. 씨발 정면에 저 저거 쏴! 쏴!"

김민철이 아무리 빠르고 강할지라도 무모한 선택이다. 그가 상당히 흥분해서 비전술적인 행동을 택했다는 결론이 나오려던 순간 그는 이미 포화를 뚫고 맨 앞에 있던 군인의 배에 칼을 푹 찔러 넣은 상태였다, 그 군인이 방탄복을 포함한 보호장구를 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대로 칼을 쭉 올렸고 덤블링 하듯이 뽑아낸 뒤 후방에 있던 군인에게 단검 투척과 동시에 다른 군인의 미간에 총알을 선사했다.

이 광경을 보고 이게 바로 진정한 국가 공인 킬링 머신인가 혀를 내두루고 있을 때.

"미.. 미미 민철 씨!"

"봉팔이, 야 잠깐!"

봉팔이가 어리석게도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직 뭔가 남아있을 지 모르는데. 봉팔이는 피가 흥건이 고이고 뇌 파편이 굴러다니는 모래밭을 히익 대며 어설프게 뛰는데,

"허.. 허억!! 밟았어... 저저 저 뇌 밟아서 미안해요 그그그 먼저 가볼게요"

누군가의 뇌 일부를 밟고 기겁하며 어영부영 사과하고 민철에게 마저 다가간다.

"민철 씨... 그.. 허억.. 덕분에 전부 살았어요."

"오냐 팔복아. 이 새끼들 뭔 담배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제가 나중에 얼마든지 사다드릴 어 어어 조심 좀 해요! 이거 받고 총알 나갔으면 어쩌게;"

"어차피 빈 총이야 인마"

민철이가 낡아빠진 권총을 휙 던지고 봉팔이는 그걸 받느라 거의 자빠질 뻔한다.

"손맛이 나쁘진 않았어. 그거 손질 좀 해둬라."

그러던 중에 불현듯 강철문 너머 우리를 회유하던 그 확성기가 머리에 스쳐지나간다.

"김민철, 확성기 그 놈은 어쨌어!!"

"아. 걔라면 지금 저기"

김민철의 손 끝을 가리킨 곳에 목이 베이고 자기 피웅덩이에 빠져 하얀 와이셔츠를 피로 흠뻑 물들인 요원이 쓰러져 있었다. 불쌍한 자식

[2205. 2205. 상황 보고하라. 인질은 확보했나?]

당장 위기는 넘겼어도 산 넘어 산인가

"야 빨리 좀 들어와. 당장 여기 터트리고 떠야해."

"시발 쉴 틈도 없네."

"들었죠? 기지 폭파 시간이에요!"

봉팔이는 방금 전까지 널부러진 시체를 봤던 사람 같지 않게 미소를 띄우며 중절모를 푹 눌러쓰며 똥폼을 잡는다.

"봉구야 넌 그 중절모 자꾸 어디서 나는 거냐. 똥폼은 누구한테 배웠냐?"

"봉팔이라니까요."


 



아예 처음부터 폭발물을 제조했다면 벙커를 터트린다는 계획 따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봉팔이라는 소시민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두 눈으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광인적인 면모 덕분에 그럴 여유가 생겼다. 

 

"비밀 기지, 자폭 버튼, 폭발물. 제가 아버지에게 효도하겠단 마음 가짐이긴 했지만 로망 정돈 있어야죠. 이 벙커에 있는 폭약은 다 가져왔어요. 도화선만 연결하면 되요."

"봉만이 이새끼... 이걸 그냥 팔렛트에 쌓고 온다고? 이 정도면 벙커를 날리고도 주변은 휩쓸어버리겠는데."

봉팔이가 핸드카에 폭약을 쌓은 채 끌고 오는 꼬라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이 미친 새끼;"

"저 고물 차는 여기 둘 거에요. 타이머는 한 2분... 정도면 될까요? 지하 쪽으로 내려가면 새 삥 한 대 있어요. 죽여주는 놈이라 시간안에 빠져나갈겁니다."

진짜 내 팔자야. 틀림 없이 계획은 계획이지만 안전 수칙 같은 게 왜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하고 행동하다니.

"지금 내가 태클 걸고 싶은게 한 두개가 아니긴 한데, 너 다른 기지도 다 이래?"

"뭐가요?" "핸드카에 있는 거 말야." "제가 세운 곳은 전부 폭발물은 있죠!"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 치곤 사고방식 자체가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 거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기지를 폭파하는데 로망에 물들고 그걸 실제로 준비할 실행력을 가졌는지

"아 씨발 그래서. 갈거야 말거야? 버튼만 누르면 타이머 시작이야"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미 폭약을 여기로 모아두고 도화선을 설치한 것으로 시간은 충분히 소모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이번엔 후속 병력이 우릴 죽이러 올 것이다.

"손가락은 괜찮냐?"

"벌써 났어 새끼야."

"눌러."

삑하는 소리와 함께 01:59 99를 시작으로 빨간 숫자가 흘러간다. 봉팔이는 그걸 보고 신나서 우스꽝스럽게 뛰어간다. 나와 김민철도 그를 따라 뜀박질을 한다

"히히! 폭파다 폭파!"

"하아..."

"성민호 왜, 명줄이 길어져서 그리 아쉽나? 한번 죽었으니 이제 됬잖아?"

쇼트음과 탄내를 삼도천 삼아 넘어간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조차 없었다.

"... 내가 죽음을 바랬던 건 원치 않은 인생을 강요 받았기 때문이야."

"그럼 지금은? 국가 전복을 꾸미는 지금도 너 성민호가 바라는 인생이야?"

"아니. 역시 아니야. 그래도 가능성은 좀 보이거든"

그래, 가능성이 보인다. 내가 내 자신으로서 삶을 되찾을 가능성이

"빨리 빨리 오세요. 신나서 작동하긴 했는데 엑셀 존나게 밟아야 한다고요! 하. 하하핫"

그런 말을 하면서 기쁨에 목소리가 떨리는 걸 숨길 마음이 없는 봉팔이의 재촉에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고,

"저희 동네로 모시죠. 속된 말로 제 나와바리랍니다. 출발!"

봉팔이가 박차를 가하듯 액셀을 밟아대자 새 삥 차량이 굉음을 내며 전속 질주한다




"특별관리 대상자 김민철, 성민호가 실종된지 벌써 3일 쨉니다"

"이 사태가 이지경이 되었는데 R동 연구소 소장 당신은 사흘동안 도대체 뭘하고 있었던 거에요?"

"본명 언급은 자제하세요. 공식적으로 각각 김미미, 오연희입니다."


"애초에 고작 소대급 병력을 파견한 게 누구요?"

옅은 조명 사이로 연구 가운과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12인이 원탁을 둘러싸 앉은 채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다.

"그만."

원탁에 앉은 사람 중 가장 풍채가 좋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발언권이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침묵이 이어졌다.

"사태가 심각한 건 알겠지만 여기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장병들과 요원 여럿이 희생 됬음에도,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음에도"

"저는 국가특별관리자원에 사살 허가를 내리는 데 반대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말씀 하셨다시피 당장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습니다. 게다가 대상은 스스로 한번 죽는 걸로 위치 추적기를 고장냈고요. 이대로라면 백 명이 죽을지 천 명이 죽을지 모르는데요?"

"설령 만 명이 죽을지라도. 네 그렇습니다."

천명이 죽느니 만명이 죽느니 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그에 이어 덧붙여 말한다.

"어쩌면 인구 소모 정책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게 제일 큰 문제에요. 그들이 탈주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국가특별관리자원에 대한 정보가 퍼지고 그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면,"

"그 망할 인구 소모 정책으로 자살을 강요했으면서 천재들은 살려뒀다며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저를 포함한 12인이 국가특별관리자원 대처에 미흡했던 것을 인정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 비밀 정책을 시행 했을 때 부터 도박이었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요?"

"당신도 동의한 바였습니다. 만장일치로. 우린 그 대가를 아직 다 치루지 않았고요. 여전히 기회는 있습니다."

원탁에 정적이 돌았다.

"안그래도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연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먼저 우리 통제 하에 있는 국가특별관리자원에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텐데요"

"그동안 너무 안일했어요. 보통 특별관리 자원이 서로 만나더라도 제법 건전한 토론을 이어나가는 바람에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번 건도 만났을 때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두고 있다가 그들이 사막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갈 때 쯤 되서야 병력을 보냈죠."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 핵융합 발전소에는 세 명 씩이나 있잖아요. 일단은 각자 독방에 격리하지요."

"도청 장치도 삽입하고 말이죠."




딸랑딸랑. 도어벨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선다

"아재요. 봉팔이 저에요."

"그래. 돈은 가져왔고?"

"여기. 현금으로 종이봉투 꽉 채워서."

그 현금은 '오연희'로 알려진 여성에게 택시 대금으로 받았던 돈

"희안한 일이야. 술 담배도 안하던 네가 이런 골동품이나 찾고 말이야."

"전략적 물품이죠. 기호 식품도 중요해요."

봉팔이가 중절모를 쓰며 똥폼을 잡자 가게 주인은 호쾌하게 웃어댄다.

"가는 길에도 진짜 재밌게 해주는 구먼! 다음 주에 안락사하는데 말야! 하하하!"

봉팔이는 그 호탕한 웃음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아저씨의 사정이 제법 딱해서. 봉팔이는 예의상 주인장을 존대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노화 역행 의무 시술 이후의 세대. 즉 봉팔이보다 연하다. 자연노화로 진짜 나이도 들었고, 마침 딸에게 도움이나 보태고 가자는 마음에 이번에 지원금과 주택을 약속 받고 안락사할 예정이었다. 봉팔이는 잠시 사색에 잠겨 생각을 하던중 가게 구석에 붙은 벽걸이 티비가 눈에 띄어 그걸 보더니,

"흠. 오늘도 그제도 가게 보면서 허구헌날 티비 보셨나요?"

"그런데? 왜."

"혹시 뉴스에 사막 국도 쪽으로 무슨 소식 없었어요? 제 친구가 그 쪽에서 중요한 물품을 분실했다던거 같던데."

"아니. 딱히?"

[해안가 핵융합 발전소에 대형 화재가 발생한지 22시간 째입니다. 더불어 발전소 주변에 통신 역시 먹통이 되었다는 의혹도 있어 EMP를 동반한 테러가 아니냐는 군사 전문가의 의견도...]

"쯔쯔쯔. 이번에 또 전기값 오를 모양이구먼"

'핵융합 발전소... 거기 지난번에 미ㅁ... 민철씨가 가려던 데 아닌가'

 

불현듯 기억나던 운명의 그 순간. 봉팔이는 10살 짜리 꼬마아이가 자신을 죽이려고 봉팔의 목에 칼을 대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목이 따끔따끔해져 목 주변을 어루만진다.

 

'그냥 사고겠지.'

 

"어쨌든 고마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딸랑딸랑. 그가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도어벨을 울리며 가게를 떠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ㅁ... 민철씨 여기 담배요."

"앰비벌런스(ambivalence). 드디어."

"아버지가 자주 피긴 했는데. 그래도 20년 전에 단종된 걸 찾느라 돈 좀 깨졌어요."

봉팔이가 철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품에서 담배갑을 와르르 쏟더니 민철은 그 중에 한갑을 집어 코 주변을 쓱 훑으며 감탄한다. 민철이가 곧 실내 흡연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어... 저기... 연희씨? 언제까지 여기 짱박혀 있을거에요? 뭐 안해요? 국가 전복? 비슷한 거라도?"

"상황을 보는 거야."

"저기 이렇게 눌러 앉을 거면 우리 식구들한테 인사라도 하는 건..."

"안돼. 계속 경계 태세는 유지해."

"네.. 네 그거야 경비원 삼촌이 늘 하고 있긴 한데"

봉팔이의 마을에 온지 5일 째.

첫날 저녁 봉팔이가 그대로 차를 몰고 입구에 들어서며 자기 친척인 경비원에게 인사라도 하려는 것을 막고, 봉팔이를 시켜 마을 사람 전부 집 안에 들어가게 한 뒤 마을 지하에 3층 씩이나 되는 벙커에 폭약을 전부 해체하고 나르게 한 뒤 벌써 5일 째.

"제가 그동안 얼마나 비웃음 산지는 알기나 해요? 다들 여태 말은 잘 들어줘도 맨날 웃음거리로만 보잖아요!"

"심지어 아흔 살 먹고 아다 떼는 게 아니냐며 의심 받은데다 동정 졸업하는 게 쪽팔리냐며 놀려댔다고요!"

5일씩이나 되는 시간에 정부의 접촉은 커녕 낌새 조차 없었다. '봉팔이 패밀리'에게 조차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은 덕인지, 우리가 전혀 별다른 행동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냅두는 것인지

"다른 소식은 없고?"

"제가 아는 한 없어요. 사막 국도 쪽으로 얘기도 별로 없고. 큰 불이 나긴 했는데..."

"그럼 말고"

방송사나 기자와 접촉해서 이 사실을 폭로하는 것만으로 파장이 클 것이고, 동시에 봉팔이가 가용 가능한 인력을 모두 무장시켜 선동과 반란을 도모한다면 이 국가를 뒤집어버린 다는 결과도 상정해봤지만 역시 나나 김민철의 목숨이 당장 위험해질 것이다. 게다가 분명 그 과정에서 수만명이 희생 될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자살을 권장하는 국가가 바라는 그림일 것이다.

"혹시 특별관리자원 찾으라고 시켜봤어?"

"일단 시키긴 했는데 그걸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진짜. 자꾸 어떤 사람을 찾느냐고 묻잖아요. 그래서 대충 언행불일치한 인간을 찾으랬더니 그게 저래요."

다른 특별관리자원과 접촉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들에게 한치의 정보도 내주지 않고 특별관리자원을 찾는 일이란 불가능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들은 봉팔이의 명령에 따르나 그 사상에는 진지하게 대질 않아서 만에 하나라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와 김민철이 그냥 탈주한 것도 아니고 요원과 특수부대원을 죄다 몰살해버린 바람에 특별관리자원에 대한 감시 역시 삼엄해졌을게 뻔할테니 일상적으로 어쩌다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 가명하고 새 신분도 필요하잖아요! 일단 만들어 뒀으니까 이따 보여드릴게요. 집돌이처럼 굴지 말고. 뭐라도 좀 해보라고요."

"전부 변명이야. 그냥 좀 쉬려고"

"아잇 싯팔 진짜; 천재라매요. 성민호라면서요!"

"조급하게 굴지마. 너도 몇년은 기다렸잖아."

당장은 상황을 좀 지켜보자. 내가 생각해도 안일한 결과지만 지금 당장 뭔가 까닥 희생하기엔 리스크가 크다.

"얼씨구. 거 집콕해서 잘 지내보세요. 난 정비나 하러갑니다."

봉팔이는 내 변명에 질려버린 듯 허리띠에 찬 파우치에서 렌치를 꺼내 흔들더니 설렁 설렁 복도를 걸어간다.

"요즘 배관 쪽으로 쥐 돌아다니거든요. 절벽 쪽으로 나온 배수구가 제법 커ㅅ 아아아아아악 뭐야"

"놈들인가? 공격이야?"

굉음과 함께 봉팔이가 향하던 벽면이 무너지고 민철이는 철문에 발바닥 자국 새길 정도로 발로 뻥차며 나왔다. 그 철문을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철문에 들이받혔고 철문에 내 얼굴 자국도 남았다.

[성민호는 어디지.]

"이.. 이 새끼 샤워실을 헤집고 벽을 뚫고 왔어... 저 새끼가 내 벙커를... 내 벙커를!..."

저건... 로봇인가? 드럼통 같은 몸체에 얇은 다리. 샤워기를 잇는 선 같은 것이 목, 구시대 콘솔 게임 컨트롤러에 박힌 카메라 노즐이 아마도 대가리, 고전 영화 스□□더맨에서 닥터 옥토퍼스를 본딴 듯한 촉수 하나에 고속으로 회전하는 회전톱날.

[성민호는 어딨냐고 물어ㅅ]

"에라이 싯팔;"

봉팔이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민철에게 뛰어간다.

"그 딴 걸 대답할 거 같으면 여기까지 안왔다고! 받아요!"

봉팔이가 슬라이딩 하며 민철에게 렌치를 던져주자 민철이 바로 렌치를 쥐어잡고 로봇 비스무리한 것에게 풀스윙으로 던졌다. 깡 하는 굉음과 함께 로봇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민철이 빠르게 간격을 좁혀 렌치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회전톱날 달린 촉수를 베어버린다. 힘차게 위잉 소리를 내며 공포를 조장하던 촉수는 바닥에 떨어져 콘크리트를 갈아내다 멈추고, 바닥에 떨어지려던 렌치를 잡아채 힘껏 휘둘러 다시 한번 로봇을 가격한다. 이번에는 완전히 눕혀버린 채 종이 찢듯이 다리를 찢어 분질러버린다.

마지막으로 벽이 무너지면서 튀어나온 철근을 뽑아던져 곤충을 박제하듯이 목에 박아넣자 로봇이 파지직 대더니 스피커에서 아우성이 세어 나온다.

[이 씹새끼. 그렇게 죽고 싶어서 환장 했어?]

[김민철 저 새끼는 몰라도 넌 그냥 뒈지고 싶은 거였잖아! 지금 당장 아가리에 총 처넣고 쏘던가! 우리한테까지 피해 끼치지 말라고!]

[노화역행시술도 지가 먼저 받고 특별관리자원도 지 먼저 되더니만..]

조잡한 퀄리티의 로봇, 말투, 그중 하나는 질투와 열등감이 희미하게 섞인 꾸짖음에 대충 견적이 나왔다.

"노화 역행 시술까지 받은데다 죽음을 위장하고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기계공학 같은 건 제대로 안파봤어? 벙커까지 침입한 건 좋은데 모양이 왜 이래?"

[이.. 개새끼!] [너도 한번 쓰레기 장에서 여섯 시간 안에 5 대를 뽑아 보던가] [시간과 예산이 충분했으면 이 꼴은 아니었어!]

"물리학자 트리오, 핵융합 발전의 권위자. 강민준, 정도윤, 심유나.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어. 내가 김미미 양을 시켜서 먼저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오셨구먼."

김미미 ㅋ 는 혀를 한번 차더니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애꿎은 데 화풀이 하듯이 로봇 대가리를 두 어번 밟았다.

그 아기자기한 운동화 아래 짓밟힌 로봇 대가리에서 퍼지던 아우성은 전보다 혼란스러운 도가니로 변했다.

[오만한 새끼가 다 아는 체 하고 자빠졌어!] [씨발. 이제 다 끝났어.] [내가 이래서 말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다 됐고. 네가 죽으려고 별 짓을 다한 덕분에 이 꼴을 본 거 잖아. 너 때문에 지금 우리 권한이 축소됬다고! 애초에 정부가 우릴 감시하긴 했지만 정도가 더 심해졌어!]

[그것 뿐만이 아니야. 너하고 김민철이 군인들을 싹 다 죽여버린 덕분에 다른 애들은 지금 독방 신세를 지고 있다고. 네가 이쪽에서 얼마나 얘기가 나돌았는지 알긴 해?]

"어 저기요. 말씀하신걸 종합하면 지금 세 분이 같이 있으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야 넌 입방정 좀;]

대충 알겠다. 특별관리자원이 전부 나와 같을리가 없겠지, 나만 자살하려고 난리를 쳐서 격리시켜둔 거나 마찬가지였나.

"혹시라도 너희랑 만나게 된다면 생과 사 조차 국가에게 관리당하는 마당에 서로 차나 마시면서 협상이나 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네."

[나도 몰라서 당하긴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계속 살고 싶다고!] [난 애초에 자격미달이었지만 다른 애들 꼬시는 걸로 거래했단 말이야!]

[난 안죽고 싶거든! 뒤지고 싶은 거 너뿐이라고 이 병신아. 뒤질거면 혼자 뒤져!]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민호가 아닌 오연희로 강요받는 삶,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는 변화를 겪으면서 느끼던 그 고통... 하지만 지금은

"야... 이미 한번 얘기가 끝난 걸로 아는데 네가 죽으려고 했든, 지금도 그러려고 하든지 간에... 한번 쯤은 죽었으니 숙원은 이룬 거 아냐?"

"어쨌든 죽으려고 하면 내 손에 죽는다. 지난번에 전기 충격이랑 다르게 엄청 고통스러울걸"

"연희씨, 저도 미미 양 의견에 동의하ㅂ"

김민철은 뭉개진 로봇 대가리를 의자 삼아 앉은 채 험악한 말로 날 설득하려 했고, 봉팔이는 괜히 오지랖을 부리다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민철의 심기를 건드리고 명치를 한대 얻어 맞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헤엑... 헉... 똑똑한 사람들은... 헉... 혈액형 성격설... 헉 그런 거 싫어한다면서요... 켁"

"제가 곁에서 자꾸 유사과학을... 헉... 지껄일테니깐요... 당신을 꽁꽁 묶어두고... 한편에서 미미 양이 당신을 고문하면ㅅ 꽯"

이번에는 김민철이 로봇 대가리를 추진력 삼아 밟고 뛰어올라 봉팔이를 덮친 채 구타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벙커의 환풍 시스템이 작동되더니 송풍구에서 바람이 분다. 들판의 가을 바람을 대신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 머릿결이 찰랑인다. 파도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정말 오랜만에 진심을 담은 미소를 띄웠고

"못 죽어."

[아니 아니 아니 너. 넌! 죽어야 해!!] [뭐?!] [못 죽는다고? 그럼, 그럼 우린? 우리는 이대로 붙잡혀서 독방에 갖히라고?]

"슈퍼사이즈 버거세트를 시켜 먹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생겼거든."

"그래서 이제 못 죽어."




 

 

일단 개연성 같은 건 잘모르겠고 미리 작성해둔 메모 같은 게 도움이 됬네요.

 

그리고 제 주관이지만 왠지 모르게 1부 끝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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