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티오스가 루스인의 콘스탄티노플 습격 과정에서 동로마인들의 피해를 줄이고 니콜라오의 특사를 아무런 손해없이 돌려보내는데 성공하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서 입지를 강화해 나갔던데 반해 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테레빈토스의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다시 고초를 겪은 끝에 돌아온 테레빈토스의 수도원을 공교롭게도 루스인이 습격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루스인이 물러간 뒤에는 다시금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와 그가 그토록 강경하게 배척하던 성상파괴론자의 거두인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석관에 묶인 채로 감금되어 총대주교 자리에서 자진퇴위하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이그나티오스의 고초는 이그나티오스의 전기에서만 나오는 내용이기에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오스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선선선선대 황제 미하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황제에서 자진퇴위한 후 거세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어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냈으며 성상파괴론자들이 다시 득세하던 기간에도 꿋꿋이 성상옹호를 견지하던 인물이었다. 아마 이그나티오스는 이번 시련 또한 자신이 마땅히 극복해야 하는 시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시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이그나티오스라는 인물과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그나티오스는 은밀히 포티오스를 향한 반격을 준비했다.
이그나티오스의 친구 테오그노스토스가 로마에 도착해 교황 니콜라오를 방문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테오그노스토스는 교황을 찾아가 자신의 친구이자 전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오스가 겪고있는 고초에 대해 설명하고 이그나티오스가 교황에게 쓴 편지 - 자신의 부당한 퇴위와 포티오스 세력에 의해 당하고 있는 고초에 대해 설명한 편지- 를 전해주었다. 그렇지않아도 지난번 특사가 포티오스의 교활한 술수에 넘어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하지 못한 채 포티오스의 총대주교 임명만 승인해버리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에 니콜라오는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그노스토스의 방문은 니콜라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해준 것이다.
니콜라오는 콘스탄티노플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승인이 없이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될 수 없다는 메세지를 보냈으며 이에 대한 콘스탄티노플측의 반응이 없자 863년, 로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하게 총대주교에서 해임되고 포티오스가 적법한 절차 없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음을 명분으로 하여 포티오스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을 승인하지 않았음을 선언하고 이와 더불어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에 복위시키지 않고 포티오스가 계속해서 총대주교직을 수행할 경우 포티오스를 파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니콜라오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포티오스는 니콜라오의 공세에 반격을 취하지 않았다. 어차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서 자신의 입지는 굳건해졌으며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지지는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 포티오스에게는 니콜라오를 향한 반격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바로 슬라브족 선교였다.
니콜라오가 포티오스를 향한 공세를 취하기 1년 전, 대 모라비아 왕국의 왕 라스티슬라프가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포티오스는 라스티슬라프의 선교사 요청 요구에 화답해 메토디오스와 콘스탄티노스 - 훗날 키릴문자의 창시자인 키릴로스로 더 유명한 - 형제를 선교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모라비아 선교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여기에는 크게 2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이자 주된 요인은 모라비아 왕국이 동로마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었던 것이고 두 번째 요인은 메토디오스-콘스탄티노스 형제가 모라비아 선교를 위해 준비한 기도문과 성서가 모라비아 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아닌 마케도니아식 슬라브어였던 것이었다.
반면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불가리아가 급속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동프랑크와 동맹을 맺어 모라비아를 압박하던 사이 동로마가 역으로 불가리아의 후방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예상치도 못한 동로마의 공격에 위기를 맞은 불가리아의 칸 보리스가 위기를 타개하고자 동프랑크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정교회의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기독교화 과정에서 니콜라오와 포티오스의 대립이 급속도로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