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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오스 분열: 동서교회 갈등의 절정 (1)

포티오스 분열은 아마 1054년의 상호 파문 이전의 교회사에서 가장 큰 동서교회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자 정교회의 성인인 포티오스는 원래대로라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아닌 동로마의 고위 관료로 활동하고도 남을 지위와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의 동로마 제국과 역사적 흐름은 그에게 단순한 관료의 직위가 아닌 동방 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서의 역할을 요구했고 이는 곧 수백년 간 켜켜이 누적되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위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 포티오스는 본래 교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오히려 그는 학자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대학에서 수사학, 문법, 철학등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의 집안도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지냈던 타라시오스의 형제였으며 그의 외삼촌이 당시 동로마의 태후였던 테오도라의 여동생과 결혼했던 것으로 미루어 나름 동로마에서 유력 귀족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친한 친구로 황제의 외삼촌이자 태후의 오빠였던 바르다스가 있었고 그 바르다스로 인해 포티오스는 역사 속에 발을 내딛게 된다.


태후이자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실각시키고 동로마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된 바르다스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제국 동부의 국경을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고 정벌했다. 가장 먼저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파울리키아파 이단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한 멜리테네(현 터키 말라티야)의 아미르 오마르 이븐 아브둘라를 공격했다. 이것은 856년, 오마르가 아르메니아콘 테마와 아미소스를 공격한 것에 대한 정당한 반격이었다. 해당 전쟁에서 동로마군은 오마르를 포함해 수많은 아랍인들을 죽였으며 오마르의 아들을 비롯해 생존한 아랍인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고 왔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다시 아랍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곧 아랍인들과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 - 기존의 방어 위주에서 공세 위주로 전환 - 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이 시기는 100여년 가까이 동로마의 국력을 소모한 성상파괴주의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맞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레온 3세가 촉발한 성상파괴논쟁은 여제 이리니가 주재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를 정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리니의 실각과 다음 황제인 니키포로스 1세의 전사,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제로 등극한 레온 5세는 다시금 성상파괴주의를 전면에 - 그러나 이전보다는 훨씬 약화된 상태로 - 내세웠고 이로 인해 다시금 등장한 성상파괴주의는 843년이 되어서야 완벽하게 종식되었다.


842년,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테오필로스가 죽고 그의 아들인 미하일 3세가 황제에 올랐다. 테오필로스의 아내이자 미하일의 어머니인 테오도라는 이듬해인 843년, 공의회를 소집해 성상파괴주의를 이단으로 선언하며 성상파괴주의를 신봉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안네스 7세를 해임하고 성상옹호론자였던 메토디오스를 새로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비록 메토디오스는 성상옹호론자이긴 했으나 기존의 성상파괴주의자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온건파였던 메토디오스가 4년 뒤 세상을 떠난뒤, 후임 총대주교로 임명된 인물은 니키타스 이그나티오스였다. 그는 총대주교에 임명될 인물에 걸맞는 신앙과 성품을 보유한 인물이었으나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대해 강경한 탄압을 주장하던 완고하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이그나티오스는 자신과 결을 달리하는 온건파 주교들, 다시말해 기존의 성상파괴주의자들을 정통 교회에 복귀시키려는 인물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실제로 그는 온건파 성향을 지녔던 인물들의 지도자였던 시라쿠사의 대주교 그레고리우스에게 지속적인 공세를 퍼부었으며 그 결과, 그레고리우스를 파문함과 동시에 대주교직에서 해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오스의 강경한 성상옹호론은 당시 로마 교황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또한, 선선선선대 황제의 아들이라는 그의 혈통 또한 그의 권한 행사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제국의 실권자였던 바르다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이그나티오스는 자신이 실각시킨 테오도라의 사람이었기에 결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따라서 바르다스가 교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 대신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반면에, 이그나티오스의 입장에서도 쿠데타를 통해 태후를 실각시킨 바르다스는 결코 좋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교권의 지도자와 속권의 실권자 사이의 관계가 터지기 일보 직전의 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실권자인 바르다스가 그만 자신의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아내를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그나티오스에게 이것은 좋은 공격 소재였다. 이그나티오스는 곧장 바르다스의 불륜을 비판했고 그를 파문했다. 바르다스 또한 이그나티오스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그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다. 바르다스는 곧장 이그나티오스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고 그 음모에 휘말린 이그나티오스는 그만 대역죄인으로 몰려 총대주교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이그나티오스의 해임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바르다스는 단 한 사람만이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바로 포티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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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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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gle의 주인공 포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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