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본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총대주교가 아니었으며 콘스탄티노플 또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휘하의 교구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랬던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가 이 곳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게 되면서 극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의 관할 구역에서 독립해 새로운 대주교구로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사도전승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역사는 성 안드레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베드로의 형제이자 12사도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인물로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프로토클레토스라는 별명을 지녔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 후, 그는 헬라스 지역을 중심으로 트라키아, 불가리아, 흑해 서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활동 기간 도중이었던 38년,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스타키스를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의 주교로 임명했고 그 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시작이 되었다.
제국의 새 수도가 되면서 이 도시의 정치적 중요성은 막대해졌고 이로 인해 이 도시의 주교 또한 기독교 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명예상으로 로마의 주교 다음가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음을 명시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종교적 영향력과 권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콘스탄티노플의 급부상은 기존에 제국 동부 지역의 기독교 세계를 관리, 감독하던 2명의 고위 성직자, 곧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반발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둘에게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그저 제국의 수도라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들을 누르고 올라온 소위 굴러온 돌과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옮겼을 때부터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의 대립은 2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해소, 혹은 격화된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단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이었기에 이는 곧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의 권위는 실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여기서 안티오키아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의 손을 들어 안티오키아 학파를 실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의 입장에서는 기존 콘스탄티노플 인사가 아닌 안티오키아에서 온 외부인사인 네스토리우스부터 배격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단성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양성론을 정통으로 인정하며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를 총대주교구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로마 총대주교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이 통과되며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 총대주교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제국 동부의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다키아 관구와 아시아, 폰투스 관구를 자신의 관할 영역으로 삼았다.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차례로 실각시키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로마 총대주교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자연스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로마 총대주교(이하 교황)의 정치적인 대립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은 로마가 누리고 있는 수위권은 단순한 명예상의 수위권이 아닌, 로마 교황이 다른 4명의 총대주교를 지배해야 하는 실질적인 수위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의 명예상 수위는 인정하나 그것이 다른 4명의 총대주교를 지배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당하며 교황은 자신을 도와줄만한 실질적인 세속의 권력자가 없었던 것에 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의 황제를 자신의 뒷배로 둘 수 있었고 이는 여차하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황제라는 세속의 권력자를 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비록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수복으로 인해 다시금 이탈리아 반도가 로마의 지배 하에 놓이며 교황 역시 황제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는 했으나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라벤나의 이탈리아 총독이라는 중개자가 있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처럼 직접적으로 황제와 대면을 할 수가 없었다.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기존의 총대주교구 5곳 중 3곳, 즉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며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면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위의 3명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들러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이용해 교황을 더욱 압박했다.
8세기, 동로마 제국의 성상파괴운동은 교황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레온 3세는 자신에게 반항적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 재위)를 직접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려 했으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신 교황이 관할하던 구역인 일리리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콘스탄티노플의 관할 교구로 이관시켜버렸다. 이는 교황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43년, 성상파괴주의는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고 성상파괴운동 또한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았지만 교황은 그 당시 잃어버렸던 교구를 되찾고 교황의 수위권을 수립하고자 했고 그 중심에는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 재위)가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오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포티오스 1세(858~867, 877~886 재위)에 의해 좌절되었고 오히려 포티오스가 시도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영향력 확대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첫 상호 파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다시금 상호 파문을 하게 되었고 이 둘의 관계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더욱 험악하게 바뀐다. 특히,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동로마 제국에서 반 라틴 감정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철저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이후, 서방 교회의 지원을 얻고자 동로마 황제들이 교회를 재통합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제국민, 그리고 특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동로마 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제국의 황제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휘하의 일개 신자였기 때문에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총대주교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를 한다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파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일개 신도였지만 그와 동시에 기독교 세계의 절대 권력자이자 수호자였기 때문에 황제 역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자신의 역린을 건들거나 자신의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경우, 총대주교를 갈아버리는 식으로 맞대응을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9세기 후반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오스 1세(847~858, 867~877 재위)와 포티오스 1세(858~867, 877~886 재위)는 당시 황제, 또는 실권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다가 총대주교에서 폐위되고 복위되었던 사례와 13세기, 미카일 8세 또한 요안니스 4세를 폐위하고 그의 눈을 뽑아버린 행위로 인해 당시 요안니스 4세의 후견인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1255~1259, 1261~1267 재위)에 의해 파문을 당했다가 그 파문을 취소받기 위해 아르세니오스를 폐위하고 후임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3세(1267 재위)를 세웠으나 그 또한 미카일의 파문 취소를 거부했다가 다시금 폐위, 그 다음 총대주교로 요시포스 1세(1267~1275 재위)가 착좌하고 나서야 파문을 취소받은 사례가 있다.
이 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룸 카이세리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터키 공화국 정부의 산하로 들어가있으며 오로지 터키 국적을 지닌 자만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2명이라는 사실이다. 위에서 서술한 정교회의 수장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외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서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를 설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1461년부터 콘스탄티노플에 총대주교구를 설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임명했으며 이를 통해 오스만 투르크 휘하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인들을 지도하고자 했다. 현재,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또한, 터키 공화국 정부의 산하에 들어가있으며 마찬가지로 터키 국적을 지닌 자만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