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 구독자 22명 | 프로코피우스 | Troubadour유스티니아누스 1세

펜타르키에 대해 araboja (1)

고대 로마 후기~동로마사를 파다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들이 바로 총대주교들이다. 이들은 고대~중세 기독교 세계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모든 기독교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었으며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펜타르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펜타르키를 구성하는 인원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다. 그러면 이 5명의 총대주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 로마 총대주교(교황)


펜타르키의 필두이자 다른 4명의 총대주교가 암묵적으로 으뜸임을 인정하는 로마 총대주교, 다시 말해 가톨릭의 로마 교황이다. 로마가 5명의 총대주교 중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바로 로마의 총대주교, 곧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천국의 열쇠를 받은 예수의 으뜸 제자이자 예수 그리스도 승천 후, 남은 제자들과 사도들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만년에는 로마에서 활동을 하다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 때 역십자가형을 당해 로마에서 죽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피가 뿌려졌다는 종교적 상징성과 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 중요성은 자연스레 로마를 다른 4곳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다른 4곳의 총대주교좌 자리에는 최소 2명, 많게는 최대 5명이 해당 지역의 총대주교를 역임하고 있는 것에 반해 로마는 오직 1명의 교황만 있다는 것에서 로마 교황이 다른 4명의 총대주교와는 궤를 달리하는 독보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적통을 잇는 로마의 총대주교, 즉 교황이 다른 4명의 총대주교보다 필두에 서는 것을 다른 4명의 총대주교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로마 총대주교(이하 교황)는 이 로마의 수위권을 명목상의 수위권이 아닌 실질적으로 로마의 교황이 다른 4명의 총대주교 위에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이는 차후에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대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다른 4명의 총대주교가 로마 제국의 동부를 나누어서 관리하던 것에 비해 교황은 제국의 서부를 혼자서 관리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부 일부분인 일리리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역시 로마 총대주교의 권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교황의 역사를 보면 의외로 안습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게 되는데 먼저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도미나투스 체제가 정립되고 나서 이탈리아의 정치적 중심지가 로마에서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 그리고 라벤나로 이동하며 로마가 가졌던 수도로서의 정치적 위상이 하락하게 되었고 심지어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공식적인 수도를 노바 로마로 옮기게 되면서 기존에 누렸던 정치적인 위상 하락에 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라는 정적이 새로이 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부터는 자신을 지켜줄만한 정치적인 권력자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수복하기는 했으나 그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라벤나 총독을 통해 교황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그 뒤부터는 함부로 황제에게 반대하다가 라벤나의 이탈리아 총독에 의해 지위를 박탈당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당하는 경우도 가끔씩 나타났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굴욕보다 더 큰 굴욕은 성상파괴주의 운동 시기에 벌어졌다. 성상파괴주의자였던 레온 3세의 성상파괴정책에 반대해 이탈리아 내부의 반 성상파괴 반란을 지휘하다 황제에게 관할 구역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이 때, 교황이 빼앗겼던 권역은 바로 일리리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지역으로 위의 지역들은 전부 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동로마 황제들의 박대는 교황이 동로마에서 독립하여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만한 새로운 속세의 권력자를 찾게 만들었고 때맞추어 751년에 랑고바르드족이 라벤나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반도 내의 (정확히는 로마 총대주교 관할 하의 이탈리아 반도) 동로마의 영향력이 급감하자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 피핀과 연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보호자를 얻은 교황은 내친김에 476년에 멸망한 서로마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야망을 품고 800년 12월 25일에 기습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험난한 역경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카롤루스 - 루도비쿠스 이후, 프랑크 왕국(혹은 카롤루스 제국)은 3갈죽이 되어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나뉘었으며 중프랑크가 다시 또 4갈죽이 되어 로타링기아, 상 부르고뉴, 하 부르고뉴, 이탈리아로 나뉘고 이들이 서로 정치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에 교황이 휩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의 권위를 세우고자 평생을 세속 권력자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투쟁한 니콜라오 1세(858~867 재위)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교황들은 카롤링거 가문의 정치적 투쟁에 휘말려 교황으로 옹립되었다가 폐위되기를 반복했고, 이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를 차지한 이탈리아의 카롤링거 가문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9세기 말, 교황 포르모소(891~896 재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여 이탈리아 왕국의 영향력을 줄이는데 나름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동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 자신도 죽으면서 다시금 교황은 이탈리아 왕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고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었던 람베르토는 그 굴욕을 복수하고자 시노드를 열고 포르모소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끌어내어 죄인의 자리에 앉힌 뒤, 그 시체를 정죄하여 오른손 가운뎃 손가락을 자르고 테베레강에 던져버리고 만다.


10세기 초, 세르지오 3세(904~911 재위)는 로마시의 유력 가문이었던 테오필락투스 가문 소속의 귀부인 마로치아와의 내연관계를 통해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향후 30여년 동안 이어지는 창부정치라는 또다른 흑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30여년 동안 로마의 교황직은 테오필락투스 가문의 귀부인이었던 테오도라와 그녀의 딸 마로치아 - 위에서 이야기한 인물 -의 후원을 얻어야만 선출이 가능했으며 요한 10세(914~928 재위)같은 경우에는 테오도라의 후원을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마로치아의 불신임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마로치아는 요한 10세를 죽이고 자신의 꼭두각시로 레오 6세와 스테파노 7세를 차례대로 교황으로 옹립, 폐위시킨 뒤 세르지오 3세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교황 요한 11세로 옹립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으나 자신의 또다른 아들인 스폴레토의 알베리크의 공격을 받아 요한 11세와 함께 산탄젤로 성에 투옥되며 창부정치의 시대도 끝이 난다.


이 후, 이러한 문젯점을 해결하고자 정치적인 권력자에 의해 교황이 옹립되는 것 자체를 막으려는 개혁의 목소리가 등장했고 이는 오늘날,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이 선출되는 콘클라베체제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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