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토론회에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토론한 후, 워낙 해석에 공을 들인 탓에 한 동안 책읽기를 쉬려던 차에 다음 책으로 회원분들이 또다시 샌델 책인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를 선정하더군요. 지금까지 대충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철학자가 니체와 데카르트밖에 없던 차에 말할 수 있는 철학자 하나 더 늘려 보고자 또 책을 읽었습니다.
도서명: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저자: 마이클 샌델
출판사: 와이즈베리
정가: 16,000원
공공에 대한 철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학문적 의미에서 철학은 사상이나 체계의 기초를 세우는 학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공공 철학은 ‘공공을 다루는 체계의 기초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를 논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겠죠. 샌델이 책에서 다루는 바도 그러합니다. 사회시스템, 현재의 공공체계가 가진 문제들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게 그가 쓰고자 하는 바죠.
책 전개는 공정하다는 착각과 거의 비슷하게 갑니다. 현실 확인 – 문제의식 제기 – 해결책 모색의 3단계 구성이죠. 1부의 미국 생활로 (미국 독자들에게)현실을 환기하고 2부에서 본격적인 논쟁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 다음 3부에서 이를 바탕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합니다. 다만 이 책이 공정하다는 착각과 다른 점이 있다면 3부에서 ‘철학을 한다’는 겁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적인 사례와 생각으로 접근하지만, 이 책은 3부부터 철학의 언어가 주가 됩니다. 비록 몇몇 언어들은 역자의 주석이 달려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래서 전공자가 아니면 철학용어의 뜻을 파악하면서 보아야 할 겁니다.
생명력 있는 상호의존을 향해
샌델이 이 책에서 유난히 자주 인용하면서 동시에 주제를 관통하는 말은 사회운동가 제인 애덤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산업혁명을 거치고 사회가 급격히 복잡해지면서 자급자족 사회에서 상호 의존적인 산업사회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관계는 더욱 삭막해졌죠. 그 부분을 관통한 제인 애덤스의 말입니다. 샌델이 이 말을 소개한 데에는 비인간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되찾고자 하는 그의 소망과 목표가 반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갈망의 증거들을 여럿 소개하는데, 가족과 이웃, 종교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 문구는 기업에 삶을 침식당하는 미국인들에게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문맹퇴치와 직업훈련 바우처 등 지역사회를 겨냥한 빌 클린턴의 소박한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정치의 관심을 강조해 그들을 권좌에 앉힐 수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비인간적으로 추상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그래서 인기있던 로버트 케네디의 정치관을 반추하면서 사람들의 인간성을 되찾는 사회를 만드는 게 그의 목표임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생명력 있게 상호의존하는 사회가 그의 목표인 것이지요. 그가 정확히 지양하는 바는 아님에도 공동체주의자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과정
샌델은 이러한 비인간화의 원인으로 절차적 공화정과 거대 기업의 경제지배를 꼽습니다. 자치와 도덕성 함양이 주가 되던 공화주의적 가치관이 대기업들의 경제지배로 무너지고 국가 역시 도덕적 자질에 따른 판단보다 경제 통제(성장과 분배)가 주요 과제로 자리잡으면서 형식적 판단이 부각되고 도덕적 가치판단이 우선순위에서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1910년대였다면 거대 기업이 비판받는 이유가 ‘공동체를 파괴해서’였다면 요즘 거대 기업이 비판받는 이유는 ‘파이를 독점해서’고 어떻게 파이를 먹나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요. 이렇게 된 사회는 겉으로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유의 이름 아래 개인의 목소리는 자본의 논리에 파묻히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점점 피하게 됩니다. 1부에서 다루는 내용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붕괴 과정과 그로 인해 형성된 지금의 미국 사회 얘기입니다.
무너져버린 사회의 무너진 담론들
2부에서는 이렇게 무너진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다루면서 부제처럼 ‘정치와 도덕’에 대해 말합니다. 처음에는 시장권력에 의해 무너진 사회, 금권이 개입하는 일상같이(국민에 대한 국가 수익사업으로서의 복권, 학교에서의 대기업 광고, 능력 장학금 등)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쉬운 주제부터 장애인 치어리더에 대한 일반 치어리더의 박탈감, 동성애와 낙태 등 사회의 첨예한 이슈도 다루는데, 전개만 단순히 보면 현대 사회 논쟁의 심각도 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틀리진 않았지만, 그보다 샌델이 궁극적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무너진 사회의 현실이 일상의 어느 부분까지 개입하였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금권으로 일상이 침해당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비인간화로 인해 가치의 판단까지 회피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 현실을 그는 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주제의식은 낙태와 관련된 미국 대법원의 판례를 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생명의 시작점에 대하여 미국 연방대법원은 ’의학·철학·신학의 수준높은 학식을 가진 자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답변할 입장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의 실패한 중립성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노예제가 잘못이라고 명확히 규정한 링컨과 달리 스티븐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한 판단을 지역 주민들에 맡겨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판결하는 연방대법원조차 출산 전 3개월간은 낙태가 금지될 수 있다는 가치판단을 하였다고 하면서 결국 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중립성을 옹호하는 주장은 실패로 귀결됨을 강조합니다.
언제까지 자유의 그늘로 도망칠 것인가?
3부에서는 이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철학적으로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무너진 담론의 원인인 권리 기반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칸트 철학의 맹점을 짚으면서 보편성과 옳음만 강조하기보다는 좋음과 가치판단에 중요한 부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철학자 존 듀이는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역량실현을 통해 자유가 나오기에 가치판단의 역량을 길러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주장했는데, 이 또한 가치판단의 중요성과 이어진다고 샌델은 해석합니다. 이 외에도 롤스의 무연고적 자아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며 공동체와 가치판단의 중요성에 대한 논거를 만들어 나갑니다.
3부의 내용은 대부분 철학적 논박이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기 때문에 요약하기는 쉬운 편입니다. 샌델은 사람들이 자유 뒤에 숨어있게 만드는 사회에서 벗어나 명확한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가 활성화되는 공화주의적 사회가 현대적 방식으로 활성화되기를 염원하고, 그 때문에 권리가 기여하는 목적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중요한가에 따라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생명력 있는 상호의존적 사회를 꿈꾼 제인 애덤스처럼, 노예제를 명백한 악으로 규정하여 도덕적으로 매우 중요한 판단을 하였고 그만큼 평가받은 링컨처럼요.
접근하기 어려운 샌델의 정수, 접근만 할 수 있다면 보물이리라
이 책은 비록 샌델이 쓴 여러 논고를 묶어 출간했지만, 내용의 일관성은 일반적인 샌델의 책 못지않게 확보되어 있습니다. 또한 현대적 기반이 되는 사상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도 명확히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3장의 내용이 워낙 어려운 탓에 가볍게 권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서평을 쓰면서도 3장의 내용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의 주장만 간단하게 실은 것도 발췌만 하여 요약하기 어려운 탓이었고요.
하지만 이 책을 알아듣게 읽은 저로서는 깨달은 바가 꽤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회피하는 입장에 서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 일 아니고 피해 없으니 알 바 아니다’라는 회피적 태도가 비인간화의 흔적임을 알고 나니 많은 첨예한 이슈에서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 꽤나 부끄러웠습니다.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도덕에 기반하여 판단하자.’는 기본으로 돌아가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도 하는 책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권할 텐데 그럴 책은 아니라서 아쉽긴 해도 이 책에서 나온 그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세간에서 받는 ‘명확한 입장을 안 밝히는’ 철학자라는 말은 분명 오독이라고는 말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책의 이해에 도움되는 글이었으면 좋겠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네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