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력>
사산왕조 페르시아 5만
동로마 제국 2만 5천
<전개>
1. 참호를 파서 페르시아 기병대의 돌격력 약화
2. 페르시아 우익 기병대가 로마 좌익 공격
3. 로마 좌익 후퇴
4. 로마 진영에 깊이 들어온 페르시아 우익을 중앙의 기병대와 언덕에 숨겨둔 훈족 기병대가 측면 공격
5. 3면으로 공격받은 페르시아 우익 기병대가 후퇴
6. 페르시아 좌익이 로마 우익 공격
7. 로마 우익 후퇴
8. 중앙 후위에 예비해둔 부켈라리이(사병 중기병대)와 중앙의 궁병대가 측면 공격
9. 고립된 페르시아 좌익이 포위 전멸 (여기서 좌익 지휘관 전사)
10. 멘붕한 페르시아군 퇴각
다라 전투는 당시 촉망받는 젊은 유망주였으나나 특별한 전공은 없던 벨리사리우스의 출세가도를 연 최초의 대승입니다.
수적 열세에도 대담하게 야전을 걸고, 적의 축차돌격을 역이용해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여담이지만 교전 전날 페르시아군 하나가 벨리사리우스에게 맞다이를 뜨자며 도발했다고 합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도발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노예를 자기 대전사로 내보냈는데,
이 노예가 그 도발한 적군은물론 다른 페르시아 기사도 죽여버려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려버립니다.
그날 밤 벨리사리우스가 이만 물러갈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페르시아 사령관 페로제스는 이를 무시했고,
페로제스는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 전투로 대페르시아 전선을 안정화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수도로 소환,
고토 수복 전쟁을 준비할 여유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