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H.B.Dewing(초반 1914년 출판)의 영역본을 토대로 번역했다. 1장은 일종의 서문이자 집필 의도, 미화된 과거에 대한 부정, 더 나아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는 대목이다. 본격적인 배경과 사건 서술은 2부부터 시작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여기서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칭하는데, 개인적으로 갈리아전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카이사리아의 프로코피우스가 로마인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동방과 서방의 야만인들에 맞섰던 전쟁의 역사를 썼노라. 최후까지 흐르는 시간이 탁월하고 중요한 행위가 기록의 부족에 의해 압도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것들이 망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각자의 사건을 엮어 썼다. 그가 판단한 사건들의 기억은 현세대의 인간에게 위업과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미래세대에게는 시간이 언제나 인간을 비슷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할 수 있음을 대비케 할 것이다. 전쟁을 시작할 이나 어떤 종류든 투쟁을 준비하는 이는 역사 속에서 서술된 유사한 상황에서 무언가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선조가 얻은 동일한 투쟁에서 얻은 최종 결과를 드러내는 한, 적어도 계획에 있어 가장 신중한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사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암시한다. 더욱이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에게 이 사건의 역사를 집필할 권한이 있다고 확언하였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이는 그가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을 때 사실상 모든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는 것이 운명지어졌기 때문이었다. 영리함은 수사법에 적합하고, 독창성은 시에 적절하나, 오직 진실만이 역사에 알맞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신조에 따라 프로코피우스는 가장 친밀한 지인의 실패 조차 감추지 않았고, 관계자에게 닥친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가능한 완벽하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라고 썼지만 그가 뒷담용으로 쓴 <비사>를 보면 얘기가 다르다. ─역주)
누구든 자신의 분별력을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면, 역사에서 이 전쟁 동안 벌어진 일보다 이보다 중요하거나 위대한 행위가 없음은 분명할 것이다. 참으로 이 서사의 독자가 옛 고대에 명예로운 자리를 선사해 현재의 업적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지지 않는 한, 그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전쟁에서보다 더욱 놀라울 만한 위업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에는 군인들을 "궁수"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대의 군인은 "백병전 전사", "방패수", 혹은 이와 비슷한 다른 이름으로 고상하게 부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당시의 용기가 결단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경솔하며 실제 경험과 전적으로 동떨어진 견해이다. 예술 용어에서 파생된 말("활잡이여, 비방자여, 제 고수머리를 자랑하는 자여, 계집들에게 추파나 던지는 오입쟁이여!"─『일리아드』 xi. 385. 디오메데스가 파리스를 비난하며 한 말이다.)로 불행하게 조롱당했던 호메로스 서사시의 궁수들에 대해, 그들은 말에 실어져 호송되거나 창이나 방패로 보호받지 못했는 생각은 결코 제시되지 않았다.("내가 탈 말도, 올라탈 병거도 없다오."─『일리아드』 v. 192. 트로이의 장수 판다로스가 한 말로, 이름난 궁수였다. 디오메데스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고 죽었다.) 사실 그들의 몸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궁수들은 도보로 전장에 들어서, 몸을 숨기길 강요받고, 동지의 방패에서 떨어져 나오거나(아홉 번째로 온 테우크로스는 자신의 굽은 활을 늘려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방패 아래에 섰다. 아이아스가 그에게서 방패를 한쪽으로 움직이자 전사는 기회를 엿봤다. ─『일리아드』 viii. 267; 그의 선량한 동료들이 아카이아인의 아들들이 급습하거나 아트레우스의 용맹한 아들 메넬라오스가 습격당하지 않도록 방패를 지니고 그 앞에 섰다. ─ 『일리아드』 iv. 113) 언덕 뒤 묘비 뒤에서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알렉산드로스(파리스)는 묘비에 몸을 기댄 채 티데우스의 아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 『일리아드』 xi. 371). 어느 위치에서든 그들은 궤멸당할 시 자신을 구할 수도, 나는 듯 달려드는 적을 습격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든 그들은 결정적 전투에 공개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음에도 언제나 참전자가 소유했던 무언가를 도둑질하는 것으로 보였다. 차치하고, 궁병들은 궁술에 능숙하지 않아 겨우 가슴까지만 활시위를 당겼고(그는 활시위를 당겨 단번에 시위에 매긴 화살과 쇠힘줄로 만든 시위를 움켜잡았다. 활시위를 가슴까지 당기자 화살촉이 활에 걸렸다. ─ 『일리아드』 iv. 123), 화살은 자연스럽게 피격자에게 무력하고 무해하게 발사되었다(무딘 화살은 나약하고 별볼일 없었다. ─ 『일리아드』 xi.390). 과거의 궁술이란 이러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궁수는 흉갑을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정강이받이를 장비하여 전투에 임한다. 오른쪽에는 화살을 매달고 다른 쪽에는 검을 찬다. 어떤 이는 거기에 창을 더해 지니기도 하며, 어깨에는 얼굴과 목을 부위를 보호하는 손잡이 없는 작은 방패 같은 것을 달기도 한다. 그들은 숙련된 기병으로,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어려움 없이 양쪽으로 활을 겨냥할 수 있으며 추격하는 중이건 도주하는 중이건 상관없이 적을 쏠 수 있다. 그들은 이마를 따라 오른쪽 귀의 반대편까지 활시위를 당겼고, 그로 인해 이 같은 추진력으로 매겨진 화살은 방해되는 적을 죽였다. 방패와 흉갑 따위로는 이 위력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 사항이 가장 위대하고 주목할 만한 행위가 이번 전쟁에서 벌어졌다는 결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먼 과거에서 시작해 로마와 지중해에서 벌어진 전쟁의 운, 좌절, 성공을 이야기할 것이다.
[기원후 408년] 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어갈 무렵,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는 여전히 젖먹이 어린아이였다. 황제는 자식 뿐 아니라 통치에 대해서도 다대한 공포를 느꼈으며, 양측에 어떻게 지혜로움을 발휘해야할 지 알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의 통치에 동반자를 제공할 경우 사실상 그는 왕권을 거머쥔 적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파멸시킬 수 있었고, 아들이 홀로 제국을 통치하게 둔다면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대로 무력한 어린아이를 이용해 제위를 찬탈하려 들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통치에 맞서 들고일어날 수 있었고, 테오도시우스를 파멸시킨 후에는 어렵지 않게 폭군이 될 것이 뻔했다. 제국에는 소년의 후견인이 될 만한 친척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상황이 이미 골칫거리인 것을 고려하면, 아르카디우스는 소년의 삼촌인 호노리우스가 도움을 줄 거라 낙관할 수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아르카디우스의 동생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이 당시 이탈리아는 한참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 역주)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그는 페르시아의 태도에도 불안감을 느꼈다. 이 야만인들이 어린 황제를 짓밟고 로마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힐 것을 두려워한 탓이다. 비록 그가 다른 문제에는 현명함을 보여주지 못하긴 했지만, 아르카디우스는 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문제 없이 그의 자식과 제위 모두를 지킬 계획을 하나 고안해냈다. 이는 보통 군주의 조언가를 도맡는 몇몇 학자들과 논의한 결과이자, 그에게 내려진 어떤 신성한 영감의 결과물이었다. 황제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황위 계승자로 지정했지만, 페르시아 왕 야즈데게르드 1세를 그 후견인으로 지정하면서 유언장에 자신의 모든 권한과 통찰로 테오도시우스를 위해 제국을 지키켜줄 것을 진지하게 당부했다. 그렇게 아르카디우스는 죽었다. 사적 문제와 제국 문제를 이 같이 정리함으로써. 그러나 페르시아의 왕 야즈데게르드 1세는 일찍이 전에도 고결한 성품으로 큰 명성을 얻은 군주로, 적절한 때에 도착한 이 유언장을 읽고 즉시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미덕을 발휘했다. 확실히, 그는 곧장 로마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견인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고, 황제에 대한 음모에 가담하려는 모든 이에게 전쟁을 벌이겠노라 위협했다.
[기원후 44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성인이 되어 장년에 이르고 야즈데게르드 1세가 병사할 즈음, 페르시아의 왕 바흐람 5세(야즈데게르드 1세의 아들 ─ 역주)는 강군을 이끌고 로마의 영토를 침범했다. 그러나 별다른 피해는 입히지 못했고, 소득 없이 군대를 돌려야 했다. 그 일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동방군 총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 아나톨리우스는 마침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을 받아 페르시아에 동행자 없이 혼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페르시아군과 마주하자 홀로 말에서 뛰어내려 도보로 바흐람 5세에게 다가갔다. 바흐람 5세는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저 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로마의 장군이라고 대답했다. 곧 왕은 이 터무니없는 경의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스스로 말을 돌려 가버렸고, 모든 페르시아군이 그를 따랐다. 왕은 자신의 영토에 이르러 매우 정중하게 사절을 맞이했고, 아나톨리우스가 원하는 조건 대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바흐람 5세는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로마와 페르시아 모두 국경 인근의 자국 영토에 요새를 새로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이 이행되었을 때, 당시 두 나라는 각국의 사무를 계속 관리했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최선인 것처럼.
후일 페르시아의 왕 페로즈 1세(바흐람 5세의 손자─역주)는 백훈족이라고도 불리는 에프탈(박트리아 일대에 활동한 이란화된 튀르크족─역주)과의 국경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페로즈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모아 에프탈을 향해 진군했다. 에프탈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실제로 훈족의 후예였다. (아니다.─역주) 이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그 어떤 훈족 분파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다른 훈족에 인접하지도,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영토는 페르시아 북부에에 바로 이웃해 있었다. 사실 '고르고'라 불리는 에프탈 도시는 페르시아 국경 바로 맞은 편에 있었고, 이런 이유로 두 나라 사이에서 빈번한 국경 분쟁의 중심지였다. 에프탈은 오랫동안 좋은 땅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기에 다른 훈족처럼 유목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과 연합할 때를 제외하고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입한 적이 없었다. 에프탈은 훈족 중 유일하게 추하지 않고 흰 피부를 지닌 족속이었다. (야임마. ─ 역주) 그들의 생활 방식이 다른 훈족과 다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동족처럼 야만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한 명의 왕이 그들을 통치했으며, 적법한 제도를 보유하게 된 이래로 로마인과 페르시아인 못지 않게 서로와 이웃에 대해 옳고 정의로움을 준수했다. 더욱이, 부유한 자들은 경우에 따라 스무 명이나 그 이상의 친구를 사귀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들은 영구적으로 연회의 벗이 되어 그들 모두의 재산에 일정 지분을 보유해 일종의 재산권을 누렸다. 그리고 이렇게 벗을 사귄 부자가 죽으면 연회의 벗들 역시 산 채로 무덤에 순장하는 것이 이들의 풍습이었다.
에프탈로 진군하던 페로제스는 한 사절과 동행했다. 그 이름은 에우세비우스로, 공교롭게도 제노 황제의 궁정에서 파견된 자였다. 공격에 완전히 겁먹은 에프탈은 적들에게 도망치기 급급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가파른 산에 사면에 둘러싸인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퇴각해 나무가 넓게 퍼진 근처 숲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멀리 떨어진 산들 사이, 계곡에 난 넓은 길을 진군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길은 겉보기로는 끝없이 멀리 이어져있는 듯 했지만, 결국에는 출구 하나 없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바로 한가운데 지점에서 끊어졌다. 따라서 페로즈는 배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적지에서 행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부주의하게 추격을 계속했다. 소수의 훈족이 그의 앞에서 달아나는 동안, 험준한 지역에 몸을 숨긴 훈족 병력 대부분은 적군의 뒤를 노렸다. 그러나 훈족은 아직 적들에게 발각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산속에서 적들을 함정에 잘 빠뜨려 더이상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들 목적이었다. 페르시아군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이제야 위험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로즈가 두려워 상황에 대해 직접 간하는 걸 꺼렸다. 그렇지만 에우세비우스에게 자신의 곤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왕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진심으로 간청했다. 왕은 때이른 대담성을 보이기 보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들에게 안전한 길이 열려있는지 잘 고려할 터였다.
그래서 에우세비우스는 페로즈 앞으로 나아갔으나,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우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옛날, 어떻게 한 사자가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서 꽁꽁 묶인 염소가 메에 하고 우는 걸 발견했는지, 어떻게 이 사자가 이 염소를 맛있게 먹을 생각에 달려들다 염소 주위에 둥글게 판 좁고 끝없는 (어디에도 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랑에 빠져버렸는지, 사실 염소 주인이 바로 이 사자를 잡을 목적으로 도랑을 파두었으며, 그 위의 염소는 미끼였다는 이야기를. 페로즈가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어쩌면 페르시아군이 적을 추격함으로써 스스로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상황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에프탈은 아무런 은폐 없이 그를 뒤쫓아, 적이 더 이상 후방으로 물러날 수 없도록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페르시아군은 자신들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분명히 깨닫고, 상황이 절망적임을 느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날 그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이었다. 에프탈 왕은 신하 몇몇을 페로즈에게 보냈다. 왕은 그 자신과 페르시아인 모두를 무분별하게 파멸시킨 페로즈의 몰지각한 무모함을 상세히 질책했다. 왕은 페로즈가 에프탈 왕 앞에 스스로 부복해 왕이 제 주인임을 증명하고 페르시아의 전통에 따라 다시는 에프탈의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 맹세한다면,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단언했다. 페로즈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마기(조로아스터교의 신관─역주)와 상의해 적들이 지시한 이 조건에 따라야 하는지를 물었다. 마기는 대답했다. 맹세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외의 점에 대해서는 술책으로써 적들을 면해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마기는 페로즈에게 매일 떠오르는 태양 앞에 부복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풍속임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그는 시간을 엄밀히 주시해 새벽에 에프탈의 지도자를 만나고, 뜨는 해를 향해 절을 하면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그가 훗날 불명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페로즈는 그에 맞춰 평화를 맹세했고, 마기가 제안한 대로 적 앞에 부복했으며, 그것으로 페르시아 전군은 온전한 상태로 기꺼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로즈는 자신의 맹세를 묵살하고 자신을 모욕한 것에 대해 에프탈에게 복수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는 즉각 해내에 모든 페르시아인과 그 동맹을 모았고, 에프탈에 맞서 그들을 이끌었다. 페로즈는 아들 중 단 한 명을 두고 떠났는데, 이름은 카바드로 마침 이제 막 소년기를 지난 나이였다. 페로즈는 나머지 아들들, 그리고 서른 배 쯤 되는 병력과 동행했다. 페로즈의 침략을 알게 된 에프탈인들은 적들에게 속은 것에 분개하여, 백성을 저버리고 페르시아인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자신들의 왕을 호되게 비난했다. 왕은 웃으며 토지, 무기, 또는 다른 어떤 재산의 일부 중 그가 무엇을 팔았는지를 백성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가 진실로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으나, 알고 보니 다른 모든 것들이 의지했던 한 가지 기회가 제외되었다고 응수했다. 이제 에프탈인들은 모든 열성을 다해 침략자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으나,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왕은 아직 침공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인들이 여전히 국경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제자리를 고수하며 다음과 같이 동분서주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침입할 평지에 넓은 지역을 표시하여 충분히 넓고 깊은 도랑을 파게 했다. 단, 중앙에는 말 열 마리가 드나들 정도의 작은 땅은 파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게 했다. 도랑 위에 갈대를 깔고, 갈대 위에 흙을 뿌려 표면을 감추었다. 그리고나서 왕은 에프탈군을 지휘했다. 참호 안쪽으로 물러날 때가 되면, 함께 좁게 종대縱隊를 지어 이동해 도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꽤 느린 속도로 이 좁은 길목을 건너야 했다. 왕은 자신의 기치 꼭대기에 페로즈가 에프탈의 땅을 침공함으로써 묵살해버린 옛 맹세의 소금을 매달았다. 적군이 에프탈 영토로 넘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여전히 제 위치를 지켰다. 정찰병은 적군이 페르시아 국경 가장 끝에 자리한 고르고에 이르렀고, 출병하여 이제 왕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왕과 병력 대부분은 참호 안에 남았다. 소수의 파견대만이 평야에 있는 적들에게 멀리 떨어져 출몰할 것을, 그러다 적에게 발견되면 전속력으로 후방으로 달아나 도랑에 접근할 때 조심할 것을 지시받아 움직였다. 그들은 명령을 수행했다. 도랑에 다다르자, 그들은 좁게 줄지어 이동해 무사히 길목을 통과했했고 나머지 병력과 합류했다. 반면 이 책략을 알 리 없었던 페르시아군은 적을 향한 분노에 사로잡혀 드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추격했고, 선봉 뿐 아니라 후방에서 뒤따라온 자들 모두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필자가 말한 대로 그들은 크게 격노한 채 추격했기 때문에 선두에 닥친 재앙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말과 창을 지닌 채 선두 위로 추락했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파국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중에는 페로즈 1세와 그 아들들 전부도 있었다. 페로즈가 도랑에 빠지려는 순간, 그는 위험을 깨닫고 오른쪽 귀에 걸려 있던 진주를 빼내어 던졌다는 말이 있다. 이 진주는 훌륭한 순백의 보석으로 범상치 않은 크기 탓에 대단히 귀했다. 아마 그 이외의 다른 누가 이 진주를 차지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진주는 바라보기에도 대단히 아름다워서 페로즈 이전의 그 어떤 왕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필자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험에 처한 인간이 다른 생각을 할리 없기 때문이다. 필자 생각에 페로즈의 귀는 이 재난으로 뭉개졌고, 진주는 어디론가로 사라진 것 같다. 당시 로마 황제는 에프탈에게서 이 진주를 구매하고자 갖은 애를 썼지만, 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만인들이 진주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자는 후일 에프탈이 진주를 발견해 카바드에게 팔았다고들 말한다.
페르시아인들이 말하는 이 진주 이야기는 자세히 논할 가치가 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이 진주는 페르시아만에서 밀려오는 바닷속 굴에 박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굴은 해안에서 멀지 않을 곳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실제로 굴요리를 먹다 안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역주) 두 판막 모두 열려 있어 아름답고 유명한 진주가 그 사이에 있었는데, 역사상 그 어떤 진주도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그것와 전혀 견줄 수 없었다. 이때 크고 사나운 상어 한 마리가 이것에 반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주 곁을 바싹 따라다녔다. 상어는 먹이를 찾아야 할 때에서조차 자신이 있는 곳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을 뿐이었고, 요깃거리를 발견하면 얼른 낚아 채 서둘러 먹었다. 그리고 나면 즉시 굴을 뒤쫓아 도로 자신이 사랑하는 진주를 실컷 만끽했다. 사람들 말로는, 마침내 한 어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고 한다. 어부는 이 괴물이 두려운 나머지 위험에서 물러났지만 그럼에도 페로즈 왕에게 모든 사정을 아뢰었다. 이야기를 들은 페로제스는 진주를 향한 강렬한 열망에 휩싸여 막대한 감언과 보상에 대한 기대감을 들어 (진주를 자신에게 바치라고) 이 어부를 재촉했다. 왕의 끈질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어부는 다음과 같이 페로즈에게 말했다.
"폐하, 재화란 사람에게 귀한 것이나 그럼에도 목숨이 더 귀하며, 만물 중 가장 귀한 것은 그 자신의 자식들이옵니다. 애정에 속박됨은 자연스러운 일인즉, 제 아이를 위해 사람은 어쩌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소인은 그 괴물과 힘을 겨룰 생각이고, 폐하께서 이 진주의 주인이 되길 바라옵나이다. 소인이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소인이 복된 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는 왕중왕이시니 제게 온갖 귀한 것들을 베풀어 포상하실 것이옵니다. 설령 일이 틀어져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폐하의 은인일 수 있으니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 왕이시여, 그러나 소인이 이 괴물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면 제 아이들에게 아비의 죽음을 갚는 것이 참으로 폐하의 책무가 될 것이옵니다. 따라서 소인은 죽은 이후에도 가장으로서 돈을 받을 것이며, 폐하께옵선 미덕으로 인해 더 큰 명성을 얻을 것이옵니다. 소인의 자식들은 전하의 은혜에 감사할 힘이 없으니, 이들을 돕는다면 제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 됩니다. 관용이란 죽은 자에게 표할 때에만 순수하게 보이기 때문이옵니다."
이 말과 함께 어부는 떠났다. 굴이 평소 헤엄치고 상어가 뒤쫓는 곳에 다다른 어부는 바위에 앉아 숭배자(상어를 뜻한다. ─ 역주) 없을 때 혼자 진주를 확보할 기회를 노렸다. 우연히 먹이를 발견한 상어가 굴에게서 멀어진 걸 알게 된 어부는 곧 동료들을 해변에 남겨두고 전력으로 굴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진주를 확보한 그는 가능한 빨리 물밖으로 벗어나고자 서둘러 움직였다. 상어가 그를 발견하고 제 보물을 구하고자 달려들었다. 어부는 상어가 오는 것을 보았다. 상어에게 추월당할 무렵 그는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부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전리품을 육지로 던졌고, 그 자신은 곧 이어 붙잡혀 죽고 말았다. 하지만 해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진주를 주워 왕에게 바쳤고,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아뢰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필자가 언급한 페르시아인들의 진주 이야기다. 하지만 필자는 이전 이야기로 돌아갈 것이다.
[기원후 484년] 그리하여 페로즈는 페르시아군 전부와 자기 자신을 파멸시켰다. 운 좋게 도랑에 빠지지 않은 소수는 적에게 자비를 빌었다. 이 경험의 결과로 페르시아인들은 적지를 행군하는 동안에는 설령 적을 격퇴했을 지라도 모든 추격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에 국내에 남아 부왕과 함께 행군하지 않은 덕에 (이때 카바드는 에프탈에 볼모로 잡혀 있어 국내에 있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의 오류로 보인다.─역주) 유일한 생존자가 된 페로즈의 마지막 아들, 카바드 1세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페르시아인은 에프탈의 신민이자 속국이 되었고, 이는 카바드 1세가 확고히 권력을 잡고 더 이상 매년 조공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여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야만인들은 페르시아를 2년간 지배했다. (사실 페르시아는 호스로의 치세 때까지 에프탈에 조공을 마쳤다.─역주)
[기원후 486년] 시간이 흐를수록 카바드 1세는 정무에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채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가 선포한 법 중에는 페르시아인이 여성과 공동교제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법이 있었다. 이는 일반인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조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은 카바드 1세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권좌에서 끌어낸 그를 사슬에 묶어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페로즈 1세의 형제인 발라시를 왕으로 추대했다. 알다시피 페로즈의 남자 자손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은데다, 왕족이 완전이 멸족하지 않고선 평범한 출신의 페르시아인은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인 대다수는 카바드를 사형에 처하고 싶어하지 않아했으므로, 권좌에 오른 발라시는 페르시아 귀족을 모아 카바드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찬반 양측의 많은 의견이 오간 후, '카나랑'(페르시아의 장군일 것이다.) 관직의 구시나스프다드라는 이름의 한 명망가가 앞으로 나섰다. 이 자의 봉지는 에프탈 땅에 인접한 바로 그 페르시아 국경 지대에 있었다. 구시나스프다드는 페르시아인들이 손톱을 다듬을 때 쓰던 종류의, 손가락만한 길이에 폭은 손가락의 1/3 쯤 되는 칼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이 칼이 얼마나 작은지 잘 보이실 겁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동포들이여, 요즘 이 칼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찰갑병 2만 명이 해낼 수 없던 일을 이룰 수 있답니다."
이 말은 카바드를 죽이지 않을 경우, 당장 페르시아인들에게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넌지기 말한 것이었다. (카바드가 지금은 폐주에 불과하여 작은 칼로 죽일 수 있으나, 살려두면 필시 내전을 일으켜 병사 수만 명을 동원해야 죽일 수 있을 거란 얘기다. ─ 역주) 그러나 이들은 모두 왕족을 사형시키고 싶지 않아했고, "망각의 감옥"이라 불리는 성(일종의 정치법 수용소로, 당시 페르시아어로는 '아노시보르드'라고 했다. ─ 역주)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누구든 망각의 감옥에 하옥된 사람은 이후 법에 의해 이름이 언급될 수 없으나, 사형에 처해질 경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페르시아인들은 이곳을 '망각의 감옥'이라 불렀다. 하지만 한때, 『아르메니아사(史)』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망각의 감옥'형이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유예된 적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옛날 페르시아 왕이 바쿠리(이는 프로코피우스의 오류로, 당시 제위기였던 샤푸르 2세일 확률이 높다.─역주)고 아르메니아 왕이 파르티아 왕조의 후예 아르샤크였던 시절(아르샤크 2세. 제위 350~368.─역주),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휴전 없이 32년 간 계속되었다. 전쟁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양국, 특히 아르메이아인들은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각 나라는 상대방을 크게 불신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적에게 강화를 제의하지 못했다. 그동안 페르시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어떤 다른 야만인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에게 친선과 평화에 대한 열망을 과시하고 싶은 나머지 이 야만인의 땅을 침공하기로 결의하고, 가장 먼저 이 계획을 페르시아 측에 알려주었다. 그 다음, 아르메니아는 야만인들을 불시에 공격해 노소를 막론하고 야인 대부분을 죽였다. 바쿠리는 이 일에 크게 기뻐하며 아르샤크에게 심복 몇몇을 보내 안전을 보장하고 회동에 초대했다. 아르샤크가 만남에 응하자 바쿠리는 아르샤크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어 동등한 형제처럼 대했다. 바쿠리는 아르샤크를 가장 엄숙한 맹세로 구속했고, 그 자신도 이제부터 페르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은 서로 친구이자 동맹이어야 한다고 맹세했다. 그 후 바쿠리는 아르샤크를 귀국시키기 위해 즉각 자리를 파했다.
오래지 않아 누군가 아르샤크가 어떠한 내란을 실행할 작정이라며 중상모략했다. 바쿠리는 이 사람들에게 설득당해 다시 아르샤크를 소환했고, 전면적인 사안을 함께 상의하고 싶다고 넌지시 알렸다. 아르샤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르메니아인 중 가장 호전적인 몇몇을 대동한 채 왕에게 다가갔다. 그 중에는 한때 그의 장군이자 조언가였던 바시키우스도 있었다. 바시키우스가 용맹하면서도 대단히 총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즉시 바쿠리는 아르샤크와 바시키우스에게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서약을 묵살했고, 이를 철회하기로 너무 빨리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샤크와 그 일행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결코 내란을 꾀한 적이 없다고 끝까지 맹세했다. 따라서 바쿠리는 처음에는 그들을 불명예 명목으로 감시했지만, 얼마 후 마기에게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마기는 혐의를 부인하고 유죄 판결을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형을 선고하는 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으나, 왕에게 아르샤크 그 자신이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고발하게끔 만들 수 있을 책략을 제안했다. 그들은 왕실용 천막의 바닥에 흙을 깔되, 절반은 페르시아의 땅에서, 다른 절반은 아르메니아의 땅에서 가져온 흙을 깔라고 했다. 왕은 지시받은 대로 행했다. 그리고 마기는 어떠한 마법적 의식으로 장막 전체에 주문을 건 후, 아르샤크와 함께 이곳을 걷는 동안 그가 맹세한 협정을 어겼다며 비난하라고 왕에게 말했다. 더 나아가 마기는 그들 역시 회담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모든 대화의 목격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쿠리는 그 즉시 아르샤크를 부른 뒤, 마기가 보는 앞에서 아르샤크와 함께 천막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르샤크에게 왜 맹세를 어기고 페르시아인과 아르메니아에게 다시 한번 큰 해를 입히려 했는지 물었다. 페르시아의 흙이 깔린 바닥에서 대화가 진행될 때면, 아르샤크는 계속해서 부인하고, 가장 경건한 맹세를 하며, 자신이 바쿠리의 충직한 신하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창 말을 하고 있을 때 천박 한가운데 아르메니아의 흙을 밟을 때면,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갑자기 어조를 반항적으로 바꾸었고, 그때부터 독립하자마자 이 무례함에 대해 복수할 것이라고 단언하며 바쿠리와 페르시아인들을 위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르샤크는 다시 페르시아 땅에서 가져온 흙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걷는 내내 어리석은 말들을 입 밖에 냈다. 곧 그는 변호하듯이 다시 한 번 탄원인이 되어 바쿠리에게 측은한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도로 아르메니아의 흙을 밟으면 아르샤크는 도로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여러 차례 양쪽을 오가며 말을 바꾸었고 자신의 비밀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제야 마기는 그가 조약과 맹세를 어겼다고 판결했다. 바쿠리는 바시키우스의 가죽을 벗겨 자루를 만들고, 그 안을 왕겨로 채운 뒤 높은 나무에 매달았다. 아르샤크에 대해 말하자면, 바쿠리는 절대 왕족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를 망각의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페르시아인들은 야만인 부족을 향해 진격하던 중 한 아르메니아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 아르메니아인은 아르샤크와 각별한 사이로, 아르샤크를 따라 페르시아 땅에 간 적이 있었다. 바쿠리가 알아본 대로, 아르메니아인은 이 군사 작전에서 자신이 유능한 전사임을 증명하여 페르시아에 승리를 가져다 준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쿠리는 이 아르메니아인에게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요구하라 부탁하며, 무엇도 거절하지 않을 것임을 호언장담했다. 아르메니아인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아르샤크에게 하룻동안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왕은 격노했다. 이는 옛 법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바쿠리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왕명에 따라 '망각의 감옥'에 간 아르메니아인은 아르샤크를 영접했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다정한 애도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한탄했다. 어려움이라곤 서로를 품에서 놓아주는 일 뿐이었다. 그들이 실컷 눈물을 흘리고 그칠 즈음, 아르메니아인은 아르샤크를 씻기고, 소홀함 없이 몸단장시킨 뒤, 황포를 입히고 골풀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게 했다. 아르샤크는 습관에 따라 내회자들을 왕실 연회로 대접했다. 잔치 내내 술잔이 오가며 아르샤크를 크게 만족시킨 많은 연설이 이루어졌고, 아르샤크를 기쁘게 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술자리는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함께 친교를 다지며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마침내 이들은 마지 못해 헤어졌고, 행복에 잔뜩 취한 채 완전히 결별했다. 이후, 그들은 아르샤크가 어떤 말을 남겼는지를 전했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낸 뒤, 누구보다도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더 이상 삶의 고통을 기꺼이 견디지 않겠다는 말을. 사람들이 말하길, 아르샤크는 이 말과 함께 마침 연회장에서 훔쳐둔 칼로 자결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필자가 언급했던 『아르메니아사』와 연관된 아르샤크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망각의 감옥'에 관한 법이 무효화되었을 때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 본래 다루었던 지점으로 돌아가야겠다.
예전에 번역한 것을 하나로 모아 올려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 분량이 만만치 않네요.
슬슬 프로코피우스의 De Bello(전쟁사)와 De Aedificiis(건축기) 중 하나를 다시 번역해볼까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