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 구독자 56명 | 모노가뚜리

더 세이비어 - 8화 : 그리고 소년은 결심한다. (1)

/>

다음 날 점심시간, 세호는 어제와 똑같이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서 있었다. 인적이 드문 이 장소에 누군가의 발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세호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몸을 뒤로 돌렸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박세호.”


민지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세호에게도 구면인 인물이었지만 결코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떨떠름한 관계가 아닐까.


그녀는 어제 일에 대한 응어리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세호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세호는 민지의 시선을 애써 받아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 역시 어제 민지의 제의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이 떠올라 등굣길에서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을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역시 말해야 한다.


“그 뭐냐, 미안했다.”


민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세호를 바라보았다.


“어젠 나도 모르게 말이 심하게 나갔어.”


비록 말재주 같은 건 없었지만 직접 찾아와서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가식 같은 건 묻어있지 않아 보였기에 그녀의 태도 또한 누그러졌다.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민간인한테 갑자기 인트루더와 싸우라고 하면 누구나 그렇게 반응하겠지.”


그녀는 세호를 스카웃하는 데 실패한 이후 그녀의 팀의 관리 요원인 경혜에게 세호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고, 그 날 자신이 오히려 이기적이었다고 오히려 세호에게 그의 과거를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선에서 사과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좋은 팀이 될 것 같았는데......”


여전히 자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민지를 보며 세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신이 민지를 부른 이유를.


“맞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세호는 뭔가를 망설이더니 이내 마음을 다잡듯 주먹을 꾹 쥔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얘기했던 그 애, 만약 잡히면 어떻게 돼?”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민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지금 그 얘기가 나온 것이었을까?


“그건 갑자기 왜?”


세호는 이틀 전 나래를 만나서 도움을 받았던 얘기와 그녀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녀는 차근차근 세호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녀가 진범이 아니라는 거지?”


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는 특유의 지적인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일단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해주자면, 그 애를 지금 잡으면 일정 기간 동안 관리국의 특수 시설에서 격리된 채 재사회화 교육을 받게 돼. 만일 자신의 죄를 끝까지 시인하지 않거나 재사회화의 기미가 없다면,”


민지는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그 시설에서 계속 격리되어야겠지.”


격리라는 말에 세호는 어제 만난 은발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분명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고 그 말은 즉 그녀가 계속 감금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민지는 세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하지만 그 애가 범인인 건 부정할 수 없어. 이미 다른 선배 요원들이 조사를 끝냈고.”


민지의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범인이건 아니었건 은발 소녀는 여전히 위험인물 취급이었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붙잡아두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만약 그 애가 범인이 아니라면, 며칠째 도망칠 이유도 없지 않겠어?”


「믿어주지도, 들어주지도 않아.」


세호는 어제 나래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쫓기는 몸이었음에도 세호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직접 인트루더와 싸웠었다. 세호는 여전히 그녀가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만약 말해도 믿어주지 않고 공격했다면? 그렇다면 누구라도 도망치지 않을까?”


세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역시 일개 고등학생이 한 사람의 누명을 벗기는 건 무리인 걸까, 그는 점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민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박세호, 너는 왜 그 애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세호는 민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정확한 물증이 없는데도 은발 소녀를 감싸는 자신의 모습은 제3자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긴 했다.


“그건.......”


세호가 입을 여는 순간,


-키야아아아악!!


세호의 목소리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괴성에 묻히고 말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저기 봐!”

세호가 다급하게 창가를 가리킨 곳은 음악실이나 미술실 등 예체능 교실이 모여 있는 별관 건물이었다. 옥상에 기분 나쁜 검붉은 빛을 띤 기운이 모여든 원의 형상에서 온몸을 칠흑빛으로 물들인 앙상한 체형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점점 모습을 갖춘 검붉은 색의 원에서 점점 무언가가

“인트루더......!”

민지는 온실에서 해충을 본 것처럼 눈살을 찡그렸다.

“어떻게 하지?”

세호의 시선은 민지를 향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초 후, 경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민지야 무슨 일이니?」


“경혜 언니, 지금 서강고등학교에 C등급으로 추정되는 인트루더가 식별되었어요. 식별된 개체수는 3마리로 추정되지만 더 있을 것 같으니까 세리 언니랑 현 선배님의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알았어, 상부에도 바로 보고할게.」


“네, 부탁드려요. 현 시간부로 작전을 시행합니다!”


민지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세호에게 외쳤다.


“넌 어서 지하 대피소로 가. 더 늦기 전에!”


“너 혼자서 괜찮겠어?”


세호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는 나 혼자서도 문제없어. 그리고 어제 네가 물었지? 왜 인트루더랑 싸우냐고.”


민지의 눈빛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인트루더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 힘으로 지키고 싶어.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말을 마친 그녀는 결의에 찬 미소를 보여주며 곧바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큰 부상을 입었겠지만 그녀는 별다른 부상 없이 바닥에 착지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별관에 도착한 민지의 시야에는 앙상한 체형의 괴인 무리가 게걸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왼팔의 손목에 있는 디지털 손목시계의 중앙 아랫부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 직후, 그녀가 입고 있던 교복이 한 순간 연분홍색의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그 빛이 멎었을 땐 민지의 교복은 국제 이형력 관리국을 상징하는 X자로 교차 된 두 자루의 검이 겹쳐진 은빛 지구 문양이 새겨진 푸른 완장을 찬검은색 제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복의 오른쪽 가슴에는 자신의 팀, 리틀 나이츠를 상징하는 은빛의 기사 투구 모양의 엠블럼이 수놓아져 있었다.


변신을 마친 민지는 왼손의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왼편에 지름 60cm 정도의 분홍빛으로 빛나는 빛의 구멍이 순식간에 형성되었고 그녀는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검은색으로 빛나는 돌격소총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소총을 오른손으로 쥔 채 다시 왼팔을 허수 공간 속에 집어넣어 실탄으로 무장한 탄알집을 꺼내 소총에 삽탄시키며 말했다.


“인트루더 섬멸 작전, 개시!”


민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앞을 향해 달려갔다.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의 무리를 향해.

 

 

*

 

 

서울의 한 병원.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현은 중환자실에서 머리에 붕대를 맨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걸어 나와 후련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그가 병원을 찾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지인이 다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가 병원을 찾게 된 경위는 이렇다.


사흘 전, 서울시 용산구의 한 골목에서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이형 에너지 반응이 일어났었고 이는 즉 인트루더의 침공 혹은 폭주 이형력자 발생을 의미했기 때문에 당연히 관리국에서는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세이비어 요원들을 파견했다.


당시 출동한 요원들이 발견한 것은 이미 인트루더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누더기 차림의 소녀뿐이었다. 인트루더는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여기까지는 문제 삼을 게 없었다. 실제로 민간인 신분의 이형력자나 민간경비회사의 사원들이 인트루더를 퇴치한 사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파견된 요원들은 곧바로 그 자리에 서 있던 소녀를 이형 에너지 반응의 원인으로 간주해 공격했고 그녀가 도망치자 현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세이비어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그녀의 행방을 수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가 의문을 품은 것은 그녀가 정말로 민간인을 공격했는가였다.


당시 CCTV로 볼 수 있는 영상은 소녀가 그 자리에 미동 없이 서 있다가 다른 세이비어 요원들을 피해 달아나는 밖에 없었고 당시 증언한 사람 중 그녀가 사람들을 공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지라 신뢰할 수 없었다.


현이 생각하기엔 아직 그 소녀를 범인으로 몰기에는 부족한 게 많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며칠 전부터 당시 공격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지만 부상이 심한 것인지 아직 깨어나질 못하고 있어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운 좋게도 안정을 되찾은 피해자를 만났고 그 사건의 진상을 듣고 확실한 물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팀 관리요원인 경혜를 통해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우우웅.......


현의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가 진동하자 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발신자의 이름이 ‘경혜 씨’라고 되어있는 걸 확인했다. 현이 피식 웃으며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오우, 경혜 씨? 지금 병원이야.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고......”


<지금 서상고등학교에 인트루더가 침공했어요,>


경혜의 청천벽력 같은 통보에 방금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한 현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서상고? 거기 민지 있을텐데...... 민지는 괜찮아?”


<네, 지금 거기서 인트루더들과 교전하고 있어요. 지금 세리가 올 테니까 같이 민지랑 합류해주세요!>


“알았어, 금방 갈게.”


전화를 마친 현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던아까와 달리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는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가 병원을 나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세리를 찾았다.


“아저씨, 여기에요!”


그때, 앞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현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포니테일 머리가 잘 어울리는, 무척 건강미 넘쳐 보이는 외모의 여자, 세리가 리틀 나이츠 팀의 차량에 탄 채 그를 향해 왼쪽 팔을 흔들고 있었다. 현은 곧장 그녀가 탄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세리야, 너 운전면허도 있었어?”


“당근이죠, 나 이래 뵈도 대형 면허에요.”


세리가 한껏 너스레를 떨자 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넌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 잡담은 그만하고 곧장 서상고로 가자. 최대한 빨리.”


“맡겨두세요. 오늘의 나한텐 한계는 없으니까!”


현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운전석에 앉은 세리를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눈빛이 평소보다 불타오르는 건 현 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기 세리야? 너 설마 운전 처음 해보는 건 아니지?”


“걱정 붙들어 매시라니까요! 자, 바람이 됩니다!”

 

“바람은 또 무슨 끼아아아아아악!!!”


신호등의 초록색 등이 빛나자, 세리와 승합차는 현의 비명을 싣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서상고등학교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로그인하고 댓글 작성하기
루리웹 오른쪽
루리웹 유머
루리웹 뉴스 베스트
PC/온라인
비디오/콘솔
모바일

루리웹 유저정보 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