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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축구를 거쳐간 일본인 선수들 1편


멀고도 가까운 한일 관계는 축구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숙명의 라이벌전으로 일컫어지는 한일전은 물론이고, 양국 프로축구에서는 다양한 선수들이 오가며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K리그에서 뛰었던 일본인 선수들에 대해, 개인적인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다소 모자란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첫편에서 다룰 선수들은 K리그에 아시아 쿼터 제도가 도입되기 전 한국 땅을 밟았던 가이모토와 마에조노 두 명입니다.





1. 가이모토 코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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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차경복 감독의 지휘 아래 당대 최강팀으로 군림하던 성남 일화는 가이모토 코지로의 영입을 발표합니다.
등록명 가이모토, 당시 25세였던 그는 K리그 무대를 밟은 최초의 일본인 선수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양국간 우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데다, 앞서 성남에 입단했던 자이니치 코리안 박강조의 적응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 성남 유니폼을 입었던 박강조는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았기에 적응에 난항이 있었고, 그를 위해 성남은 김명휘와 김황정 등의 추가 자이니치 코리안 선수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으니까요.

가이모토 코지로는 1996년 감바 오사카에 입단한 뒤, 일본 연령별 청소년 대표팀을 거친 유망한 수비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된 부상에 시달리며 1998년 이후에는 출장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팀에서 방출된 무적 상태의 선수였죠.
2000년 시즌, 리그 3위와 FA컵 준우승에 머물렀던 성남이 통일교 측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본격적으로 돈을 쓰기 시작하던게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입단 테스트를 통해 좋은 평가를 얻은 가이모토는 2년간 연봉 9,600만원의 조건으로 성남의 노란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성남이 야심차게 영입한 가이모토는 2001년 첫 시즌 1경기 출장에 그쳤습니다.
시즌 개막을 앞둔 2월 일본 전지훈련 도중, 연습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부딪혀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 화근이었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재활에 매진하는 사이 시즌은 지나갔고, 결국 10월 28일 치뤄진 전북 현대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후반 교체 투입되어 45분 출장한 것이 2001년 가이모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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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남은 방출 없이 2002년에도 가이모토와 동행했습니다.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한데다,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에게 먼저 다가서는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2002년 시즌, 가이모토는 K리그와 아디다스컵 통산 21경기에 출전하며, 그 해 3관왕을 차지한 성남에서 로테이션급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 덕분에 단 2년 동안 뛰었음에도 K리그 2회 우승, 슈퍼컵 우승, 아디다스컵 우승 등의 영광을 함께할 수 있었죠.

2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 가이모토는 성남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형 가이모토 케이지가 뛰고 있던 나고야 그램퍼스에 합류하며 다시 J리그에서 뛰게 되었죠.
이후 알비렉스 니가타, 도쿄 베르디를 거친 뒤, 호주에서 말년을 보내고 은퇴했습니다.
알비렉스 니가타 이적 당시에는 이후 부산과 수원 삼성에서 뛰게 된 자이니치 코리안 안영학과 트레이드 되어 팀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2. 마에조노 마사키요


K리그에서 뛰었던 일본인 선수 중, 가장 빅네임을 꼽으라면 바로 이 마에조노일 것 같습니다.
1996년 올림픽 대표팀의 주장으로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을 돌파하며 일본에게 28년만의 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을 선사하며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선수였으니까요.
당시 일본은 올림픽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를 상대로 3:2로 승리하는 등 아무도 예상 못한 대활약을 펼친 바 있습니다.
1996년 UAE 아시안컵에서도 일본의 8강 진출을 이끄는 등, 1996년 일본에서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한 선수가 바로 마에조노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해외 이적을 놓고 당시 소속팀이던 요코하마 플뤼겔스와 분쟁이 빚어졌고, 결국 당시 J리그 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베르디 카와사키로 이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럽행을 꿈꾸던 마에조노는 태업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였고, 유명세로 인한 TV 출연과 CF 촬영 등 축구 외적인 부분에 집중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1998년, 브라질의 명문 산토스 FC로 향하게 되지만 브라질 무대에서도 마땅한 활약은 하지 못했고, 무적 상태로 도전했던 유럽 무대에서도 계약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일본에 복귀한 마에조노였으나, 부상에 시달린 끝에 2002년 방출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한때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였던 마에조노가 한국까지 오게된 것은,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선수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적 상태였던 마에조노는 앞서 가이모토가 활약한 바 있던 성남 일화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지만, 한달여의 긴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탈락합니다.
이후 안양 LG 치타스에서 재차 테스트를 받게 되었고, 당시 조광래 감독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1년간 연봉 1억, 승리수당 400만원의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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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조노는 2003년 안양 입단 이후 첫 10경기를 모두 뛰며 도움 3개를 기록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체력적 한계로 인해 주전에서 밀리게 됩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6경기 4도움.
결국 시즌 종료 뒤 안양은 마에조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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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적 선수가 된 마에조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곳은 2003년 창단한 뒤 2년차를 맞고 있던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였습니다.
앞서 J리그에서 코치로 활동한 바 있던 장외룡 감독이 있었기에, 소통이 원활했던 것이 계약의 이유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에조노의 경기력은 이미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떨어져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발가락 골절까지 당하며 리그 4경기 출장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인천과 계약이 만료된 마에조노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리그의 OFK 베오그라드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는 등 현역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은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선수 생활의 내리막, 그것도 끄트머리에서 한국 땅을 밟은 것이 마에조노가 실패한 원인이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전성기 시절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주던 신체 능력이 많이 내려온 탓에, 킥 능력 정도만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워낙 일본에서 인기 있던 선수였고, 연예계에서도 활동했던 터라 당시에도 인기 하나만큼은 상당했던 선수였습니다.
당시 소속사를 통해 3박 4일 일정으로 마에조노를 응원하러 K리그 직관을 가는 여행 상품을 런칭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인천 시절에는 마술사 프린세스 덴코가 마에조노의 팬을 자청하며, 국내 공연 개런티 중 일부를 인천에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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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조노는 은퇴 이후에도 특유의 유쾌한 성격을 살려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TV 프로그램 촬영차 한국에 왔다가 잠시 뛰었던 인천 유나이티드에 방문해 함께 뛰었던 전재호, 임중용 코치와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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