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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오스 분열: 동서교회 갈등의 절정 (6)

로마-콘스탄티노플 두 교회의 갈등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포티오스를 파문하고 그의 총대주교 임명 자체를 무효화하면서 화해분위기로 접어드는듯 했던 두 교회의 사이는 어떤 사건이 터지며 다시 악화된다.


두 교회의 불화를 만든 원인은 이번에도 역시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의 칸 보리스는 예전에 전임 교황 니콜라오가 불가리아로 파견했던 포르모소를 마음에 들어했고 그를 불가리아의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현임 교황이었던 하드리아노의 반대에 밀려 무산되고 말았다. 하드리아노는 세속의 권력자가 성직자를 마음대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더욱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로 인해 보리스가 - 니콜라오가 불가리아에 파견했던 - 포르모소를 불가리아의 대주교로 임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탐탁지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불가리아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로마의 손을 들어주었던 이유부터가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불가리아가 로마의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해 기뻐하며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던 전임 교황 니콜라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불가리아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시들해졌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드리아노가 불가리아의 자체적인 대주교 임명을 반대하는 것은 과거에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반대했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이번 대주교 임명 사태를 통해 로마 또한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보리스는 가까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대신, 멀리 있는 로마와 애써 관계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보리스의 행동은 재빨랐다. 과거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신속하게 새로 수립했듯이 이번에도 신속하게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내어 불가리아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밑으로 들어가기를 청했고 이그나티오스는 과거 포티오스가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870년, 콘스탄티노플은 불가리아의 독립 총대주교구 설치를 승인했고 그 댓가로 불가리아의 총대주교는 명목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불가리아의 행동과 이를 묵인해준 콘스탄티노플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으나 완고한 이그나티오스는 이러한 로마의 항의를 깔끔하게 묵살했다. 이로 인해 화해 분위기로 접어드는듯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한 편, 유배된 포티오스의 상황으로 돌아가본다면 포티오스는 수도원에 유배되긴 했지만 과거 이그나티오스가 겪었던 굴욕은 겪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배지에서 그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저술활동을 하거나 연구활동에 골몰했고 또한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만들어두었던 그의 파벌 또한 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티오스의 파벌에 속하던 성직자들 역시 포티오스의 성향에 걸맞게 신학적 지식이 우수한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대적 배경 또한 포티오스의 복귀를 종용하고 있었다. 완고한 이그나티오스가 로마와의 관계악화까지 감수하며 불가리아를 포함한 하이모니아 - 발칸 반도의 옛 이름 - 지역의 슬라브인들을 콘스탄티노플의 권역하에 두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전문적인 기독교 신학 지식을 갖춘 성직자들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이었고 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기에 서서히 포티오스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올 무대가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유배된지 약 5년이 지난 874년 즈음에 포티오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고 이그나티오스 또한 포티오스의 복귀에 대해 예전처럼 극심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돌아온 포티오스는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현 황제 바실리오스의 신임을 쌓는데 주력했고 이렇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877년, 선종한 이그나티오스의 뒤를 이어 다시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마 역시 포티오스의 총대주교 임명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노르만족의 약탈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로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포착한 포티오스는 2년 뒤인 87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금 공의회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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