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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오스 분열: 동서교회 갈등의 절정 (5)

포티오스가 한창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열어 니콜라오를 공격하던 시기(867)에서 잠깐 과거로 되돌아 가보자. 당시 동로마 황실에는 크나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황제 미하일의 암군화였고 두 번째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의 비상이었다. 2살의 나이에 황제에 올랐던 미하일은 그 동안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초창기에는 태후 테오도라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환관 테옥티스토스에 의해 권력의 행사를 제한받았으며 삼촌인 바르다스가 그 둘을 제거한 뒤에는 바르다스가 부제의 자리에 올라 그 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미하일 자신은 자신의 권력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행하는 것에 크나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불만을 가졌던 부분은 바로 바르다스가 자신의 일탈행위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이를 제지하려 들었던 부분이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불과했던 미하일은 유능한 권력자들 - 테옥티스토스와 바르다스 등 - 에게 정무를 맡긴 채 자신은 향락과 술독에 빠져있었고 이러한 미하일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소스, 곧 주정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유흥에 빠져있는 동안 같이 지냈던 친구 중에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가 있었다. 바실리오스는 문맹이었지만 힘이 셌으며 말을 잘 다루던 인물이었다. 그는 곧 미하일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미하일의 시종장자리에까지 올라 황실의 핵심 인사 중 하나로 비상했다.


이렇듯 미하일과 바실리오스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에 반해 바르다스와 바실리오스의 관계는 상당히 나빴다. 바르다스는 바실리오스의 급격한 비상을 경계했고 바실리오스 또한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바르다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55년에 바르다스가 테옥티스토스를 제거했던 것처럼 866년, 바실리오스는 바르다스를 살해했고 황제에 임명되어 미하일과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콘스탄티노플에서 포티오스가 공의회를 열어 니콜라오를 규탄하던 시기로 돌아가면, 미하일과 바실리오스의 공동황제시기는 불과 1년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미하일은 여전히 향락과 술독에 빠져있었고 바르다스를 대신해 권력자가 된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의 이러한 직무유기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바르다스는 부제긴 했으나 황제의 외삼촌이라는 혈연관계를 이용해 미하일의 일탈행위를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지만 바실리오스는 그마저도 전혀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바실리오스의 이러한 행위는 미하일의 반감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고 친목행위로 인해 시작된 두 황제의 시대는 1년만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바실리오스는 바르다스를 죽였듯 미하일도 죽이기로 결심했고 867년 9월 24일에 미하일을 암살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는 서방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이 두 교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실리오스가 보기에 이 두 교회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다름아닌 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포티오스였다. 더욱이 포티오스는 단독황제인 자신에게 사사건건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단독황제가 된 뒤에 처음으로 맞게된 성 데메트리오스 축일(10월 26일)의 성찬예배에서 포티오스는 바실리오스에게 성만찬을 거부하며 반감을 표출했고 이러한 반감과 항의를 받은 바실리오스는 포티오스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수도원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해임된 포티오스 대신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된 인물은 바로 테레빈토스의 수도원에서 복수의 칼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였다.


포티오스의 해임 이후, 바실리오스는 로마에 다시 사절단을 보내어 포티오스의 해임을 알렸고 이 소식을 접한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 전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미 867년 11월 23일에 선종했다. - 이러한 사태 변화를 기뻐하며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의한 사항들을 불태우고 다시금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열겠다는 콘스탄티노플 교회 측의 제안에 동의했다.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가 소집한 공의회는 포티오스에 대한 정죄와 포티오스를 따르는 성직자들에 대한 보복과 함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롯한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반드시 교회 내부의 인물에 의해서만 임명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그리고 해당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포티오스는 파문당하고 수도원에서 계속 유폐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분열을 봉합하려는 찰나에 새로운 문제가 터지며 두 교회의 분열은 다시금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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