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가 불가리아의 배후를 위협해 불가리아의 칸을 개종시킨 것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보리스는 미하일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이 후, 불가리아로 귀환해 기존의 텡그리, 슬라브 전통 신화 등을 믿던 불가르인과 슬라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텡그리 신앙을 믿던 불가르인, 슬라브 전통 신앙을 믿던 슬라브인, 기독교를 고수하던 불가리아땅에 살던 옛 로마인 등이 혼재했던 상황)
보리스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에 3가지 요구사항을 보낸다. 첫 번째는 불가리아에 많은 성직자를 보내줄 것, 두 번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기독교 사회에 대한 설명과 자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불가리아 교회의 자치였다. 포티오스는 앞의 두가지 요구사항에는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아직 불가리아 교회를 독립적인 교구로 놓고싶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플의 하위 교구로 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보리스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자 보리스는 곧장 로마에 똑같은 내용의 요구사항을 보냈다. 니콜라오의 반응은 포티오스와 달랐다. 니콜라오에게 보리스의 요청은 천금같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오는 보리스의 요청을 받자마자 두 명의 성직자 파울루스와 포르모소(훗날 교황이 되고 시체 시노드의 희생양이 된 인물)를 불가리아에 파견해 불가리아인들이 궁금해하는 기독교인들의 삶과 사회상에 대해 답변해주는 한 편, 기존에 불가리아 교회에서 사용했던 콘스탄티노플식 전례 대신 로마의 전례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보리스 또한 니콜라오의 환대에 화답해 기존에 머물고 있었던 동로마의 선교사들을 추방시키고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로마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니콜라오에게는 지금까지 겪었던 굴욕을 만회하는 승리였던 반면, 포티오스에게는 크나큰 패배였던 것이다.
포티오스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포티오스가 반격에 나선 부분은 로마의 전례와 신학분야였다. 그 중에서도 포티오스가 집중해서 공격했던 부분은 바로 필리오케(Filioque)였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아들에게서란 뜻을 지닌 단어로 이 것은 로마가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현된다고 주장하기 위해 삽입한 구절이었다. 해당 구절은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라틴어 역본에서 등장하는데 본래 그리스어로 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해당 구절이 없었으나 589년, 톨레도에서 열렸던 서방교회의 시노드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자 필리오케를 삽입하기로 결의했고 이것이 쭉 이어져내려왔던 것이었다.
(대충 쉽게 설명하자면 381년에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채택(원문: 그리스어) -> 이 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서방 교회에 아직도 만연하던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하고자 589년, 톨레도 시노드에서 해당 신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필리오케도 삽입하기로 결정)
포티오스가 보기에 성부에게서만 발현해야 하는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발현된다 주장하는 로마는 이단을 정통으로 호도하는 이단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이단 교리를 자기네 관할 교구에서만 채택하는데에 그치지않고 불가리아까지 퍼뜨린다는 점에서 포티오스는 해당 문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포티오스는 이 문제를 계기로 아예 사사건건 자기를 쓰러뜨릴 궁리만 몰두하는 교황 니콜라오를 역으로 실각시키기로 결심했다.
포티오스는 신학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관점에서도 충분히 니콜라오를 실각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니콜라오는 교황의 수위권을 내세우기위해 콘스탄티노플 뿐만 아니라 서방의 군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의 황제였던 루도비코와도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티오스는 자신이 니콜라오를 정죄하고 이를 통해 루도비코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루도비코가 니콜라오를 교황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포티오스는 먼저, 황제의 재가를 받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해당 공의회에서 포티오스는 필리오케를 위시하여 기존의 로마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이단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으며 이러한 이단 교리를 불가리아에까지 전파한다고 규탄했다. 그리고 그 규탄의 끝은 교황 니콜라오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이탈리아 왕이자 신성로마 황제였던 루도비코에 대해서는 그의 신성로마 황제자리를 교황 니콜라오 대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오스가 인정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포티오스의 공세가 조금만 더 이어졌다면, 기존의 로마-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역학구도 또한 완벽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티오스의 공세가 절정에 이르던 순간에
시대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