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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간단하게 쓰려고 노력해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갈등

지금에서야 1054년의 동서 대분열이라 해서 서방 로마 가톨릭과 동방 콘스탄티노플 정교회가 그 때에 상호 분리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아 쟤네 또 시작이네'라고만 생각했을 정도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수백년간 갈등을 빚었고 그 원인은 바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정치적 주도권 다툼때문이었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펜타르키라 부르는 5대 총대주교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함.


사실 펜타르키라는 시스템도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이 등장하고 나서야 추가된 것이고 본래 로마 제국의 기독교 중심지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음. 그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이 도시들이 로마의 3대 대도시였기 때문임. 다만 해당 도시들을 기독교인들이 중시여기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음.


1. 로마: 예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와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가 순교한 지역

2. 알렉산드리아: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르코가 선교한 지역

3. 안티오키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지역이자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다만 3대 도시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정치적으로는 제국의 수도이자 종교적으로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 지역인 로마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보다 수위라는 것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었음. 그런데 4세기에 접어들며 이러한 상황이 반전됨.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분할함과 동시에 로마가 지녔던 제국의 수도라는 입지가 흔들리게 되고(서방 부제의 본거지는 트리어, 서방 정제는 로마가 아닌 밀라노, 동방 부제는 시르미움, 동방정제는 니코메디아)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되면서 로마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실추되었다는 것임.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수도가 되자 기존의 비잔티움 주교구 역시 대주교구로 승격하게 되고(아직은 총대주교구 아님)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규범이 발표되는데 첫번째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명예상의 특혜가 로마의 주교 다음'임을 명시했고 두번째로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를 총대주교구르 승격시키며 아예 로마 다음 자리로 끌어올리게 됨. (이 때, 겸사겸사 예루살렘도 같이 총대주교구로 승격함)


다시 말해 기존의 로마-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의 서열이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으로 변화했다는 이야기고 여기 근근웹에서 수상한 분야로 인기많은 어떤 황제의 시대에 이르면 드디어 우리가 아는 펜타르키라는 말이 등장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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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펜타르키들이 담당하던 관구. 빨간색이 로마, 하늘색이 콘스탄티노플, 주황색이 알렉산드리아, 짙은 파란색이 안티오키아, 보라색이 예루살렘)


이 때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이 서서히 불거지는데 로마는 '로마야 말로 예수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곳이니 당연히 로마의 주교가 다른 모든 주교들의 수장이어야 한다'를 주장했고 그에 반해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주교가 으뜸가는 것은 맞는 말이나 이는 암묵적인 동의 및 명예상의 으뜸 지위에 불과할 뿐 펜타르키의 주교들은 모두 수평적으로 동등한 관계다'라고 주장하며 이에 맞서게 됨.


이러한 갈등이 더더욱 격화되게 만든 계기가 크게 2개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서로마의 멸망이고 두 번째는 이슬람의 발흥임.


서로마의 멸망으로 인해 로마 교회의 뒷배를 봐줄 황제가 사라진데 반해 콘스탄티노플은 뒷배에 로마의 황제가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됨. 이 말은 다시 말해 콘스탄티노플의 경우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 로마 황제가 있지만 로마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무주공산의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고 곧 로마의 황제가 담당하는 지역은 (마케도니아 제외) 기독교 세계가 아닌 이교도인들의 손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하게 됨.


그래도 (위에서 이야기한 근근웹에서 수상한 분야에서 인기많은) 모 황제가 (자꾸 커플로 엮이는) 누군가를 보내 고토수복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이탈리아반도를 수복 및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로마 주교가 다시 로마 황제에게 다시 복속되며 이 상황이 잠시 일단락 되는가 싶었는데


더 큰 문제가 발생함.


7세기 동로마와 사산 페르시아가 파멸적인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타 아라비아 반도에서 (합성론파 기독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가 발흥하게 되고 명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지휘하에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와 사산을 모두 제압해버림. 이 와중에 동로마는 이집트와 시리아, 아프리카, 팔레스타인을 영구적으로 상실해버리는데 이 지역은 알다시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구가 있던 지역임.


다시 말해 기존의 펜타르키 중 3곳이 무력화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 남아버렸다는 이야기임.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는 이슬람, 북쪽에서는 슬라브와 불가르인들이 동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동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제권이 약화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면서 동로마가 극심한 투쟁의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랑고바르드족이 알프스를 넘어 남하하면서 라벤나까지 점령함(물론 랑고바르드족의 남하 자체는 6세기후반부터 이루어졌지만 라벤나 총독부 자체는 계속 유지하던 상황). 그 말은 곧 라벤나 총독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교황을 통제하던 동로마가 더 이상 라벤나 총독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고 다시 말하자면 로마 교황이 다시금 자신의 뒷배를 보아줄 세속 통치자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로마 교황은 자체적으로 생존방법을 찾게 되는데 마침 프랑크 왕국의 실력자인 피핀이 로마 교황의 눈에 들어왔고 피핀과의 협력을 통해 랑고바르드족을 로마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피핀에게서 토지까지 얻으며 교황령의 기초를 닦는데까지 성공함. 그러다보니 로마 교황의 입장에서는 멀리 떨어진 동로마보다는 당장 자신에게 땅도 주고 랑고바르드족에게서 지켜준 프랑크왕국을 정치적 보호자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게 됨.


그리고 800년 12월 25일, 로마를 방문한 카롤루스를 기습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포하고 대관식까지 치르게 된 것이고 이후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정치적인 영향력 확대를 위해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결과까지 벌어지게 됨. 왜냐? 펜타르키 중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밖에 없기 때문임.


결국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수위권을 놓고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영향력 싸움이 동서 대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는 이야기.


덧: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입장 부분에서 콘스탄티노플측의 주장의 빠진 부분을 약간 보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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