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중 일제는 통제 경제로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망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는 식량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에게 3개월치 식량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수락했다.
따라서 건준은 전시 배급제도를 당분간 유지했다. 건준위 부위원장인 안재홍이 식량 문제는 걱정말라 단언할 정도로 자신 있었고, 실제로 미곡 도•소매가는 안정되어갔다.
그러던 1945년 9월, 미군은 38도선 이남에 진주해 건준이 건립한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남조선미군정청을 설립해 남한을 지배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건준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배제하고, 식량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0월 5일 미곡 거래를 자유화하였다. 이에 모자라 10월 20일에는 생필품 거래를 자유화함으로써 전시 통제 경제가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멈춰버린 공장과 늘어난 화폐 발행으로 물가 상승, 즉 인플레이션이 시작 되었다. 통제 경제의 해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에 상인들의 매점매석이 날로 심해져가 도시에 쌀이 자취를 감출 지경이었다.
서울 내 미곡 소매가가 1945년 9월에는 110원 이었으나, 다음해 9월에는 1,200원이었다. 실로 충격적인 가격 상승이었다. 1945년 겨울부터 시작된 미곡 가격 급등에 다급해진 미군정은 1946년 1월 1일 미곡 최고가격제를 실시했으나, 오히려 암거래가 늘어나는 등 역효과만 있었다.
결국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1945년산 추곡에 대해 미곡 공출에 착수했다. 그러나 수집된 미곡의 총량은 총생산량의 5.3%에 불과했다. 서울, 부산 등지의 도시는 식량 배급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타격을 입은 것은 도시민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농민은 미곡을 팔아 생필품을 마련해야 하는데, 문제는 생필품의 가격도 끊임없이 치솟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시장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공출해가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친일경찰과 지주들이 미곡 수집을 주도하니 분노는 더 커져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6년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남한 내 좌익 계열은 본격적인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반미투쟁, 대중투쟁 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했다. 이는 식량 문제에 환멸난 남한 민중들의 분노와 결합되었다.
결국 1946년 9월 총파업에 이어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0.1 사건 당시 도시민들은 쌀 배급을 요구했고, 농민들은 쌀 수집 중지를 요구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은 좌익의 선전•선동만이 아니라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에 따른 민중의 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