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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전사 (4)

악마 왕자는 불패의 전사를 안내한 뒤 다른 지옥의 주민들처럼 지옥의 끝자락으로 대피해야했지만, 지옥의 천장이 닿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궁정을 내려다 보고 있다. 불패의 전사에 대한 복수심으로 칼을 갈아오던 왕이나, 오늘날 불패의 전사가 보였던 태도로 보나 전투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왕자는 다른 지옥의 주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왕이 이길 것을, 아버지가 이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가 남아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까닭은

"부디 왕께서는 지옥의 모든 주민을 합하고 이 땅 밑바닥에서 잠을 자고 계신 어머니 한 분 더 신경써주실 만큼 자비롭고 은혜로우시기를."

왕자가 나지막히 읊주리자 궁정 대문 방향으로 붉은 줄기가 빛을 뿜으며 일대를 날려버리는 것을 보고, 그것이 왕의 선제 공격임을 알아본다.

"제압했나?"

그가 혼잣말과 함께 전황을 살펴보려고 푸른 날개를 쭉 펴고 천천히 활공해 내려가는데, 궁정의 천장을 뚫고 뛰쳐나온 사람의 형체를 발견한다. 그러나 왕자가 그것의 정체를 식별하기도 전에 지면으로 가속하여 궁정으로 처박는다.

"방금 그게 무슨"

푸른 피부의 악마 왕자가 궁정 천장을 뚫고 뛰어올랐던 인간 형체에대한 의문을 입에서 다 뱉어내기도 전에 굉음과 돌풍에 휩쓸려 균형을 잃을 뻔한다. 그가 자세를 고치고 다시 궁정을 바라봤을 때,

"땅이... "

광활한 황무지가 말그대로 찢어지는 광경에 압도된다. 왕자가 계획대로 주민들을 대피시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무렵 갈라진 균열 사이로 대지가 비명을 지르더니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안돼."

왕자는 날갯죽지를 재촉하며 거대한 싱크홀에 날아간다.






"악마야! 그렇다면 나도 내 맹세를 지켜야겠다! 넌 내 마법을 거두게 될 것이다!"

"드디어 본색을 들어냈군, 눈 뜨고 쳐다보기도 힘든 추악한 생물 같으니. 자넨 절대로 자기 분수를 모르지."

악마들의 왕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불패의 전사의 함성에 굴하지 않고 대꾸한다.

"자넨 죄인일세. 지옥의 주민을 학살한 죄, 궁정의 신하들을 도살한 죄, 내 가족에 폭력을 휘두른 죄."

불패의 전사가 낙하하는 바윗덩어리를 밟고 주변의 돌멩이를 가로채 왕에게 던진다. 주위를 둥둥 떠다니던 커다랗고 징그러운 눈알들이 왕을 에워싸지만 돌멩이의 풍압에 터져나가 피안개를 뿌린다.

"후회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것이 자네 죄악에 대한 형벌이 될 걸세.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어."

피범벅이 된 악마들의 왕은 움찔하기는 커녕 더 많은 눈알과 출렁이는 거대한 붉은 고깃 덩이들을 불러들인다.

"그것이 지옥의 의무이자, 악마들의 왕의 사명."

불패의 전사가 딛고있던 바위를 도움닫기 삼아 뛰쳐오르자 왕은 눈알을 부려 수백 줄기의 광선을 쏘아 전사를 위협한다. 불패의 전사는 붉은 섬광을 피하며 주위의 바위를 박차고 왕에게 달려들지만 붉고 미끄러운 거대한 육벽이 그를 가로 막는다. 그가 고깃덩이를 부수려 왼손을 내질렀지만

"!?"

주먹의 충격에 고깃덩이가 크게 움찔하여 새빨간 액체를 뿜어대지만 파괴되지 않고 불패의 전사의 주먹을 꽉 움켜잡은 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주변으로 눈알과 다른 고깃덩이를 포위하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가 비명과 같은 기합을 지르며 온몸을 기울여 고깃덩이 째로 너댓번 회전 하다 더욱더 세차게 오른 주먹을 내리친다. 그 충격에 공기가 찢어지며 주먹을 꽉쥐고 있던 고깃덩이는 물론 주변의 다른 고깃덩이, 눈알까지 터져나간다. 그의 검지와 중지를 감싸고 있던 부목과 붕대 역시 온데 간데 없이 자취를 감쳤는데, 그가 궁정의 바닥을 내리쳤던 시점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순 없을 걸ㅅ"

악마들의 왕은 과거보다 약해진 불패의 전사를 상대로 방금과 같이 지구전, 소모전을 치룰 생각이었으나 불패의 전사는 그의 예상을 발판 마냥 뛰어넘고 어느새 왕의 코 앞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악마들의 왕이 순간 기겁하여 손으로 밀치는 동작을 하며 궁정에서 선보였던 공간 이동 마법으로 전사를 아래로 멀찍이 떼어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와 눈알들을 짓밟고 올라와 또 다시 왕과 마주했다. 불패의 전사는 왕의 양 어깨를 당장이라도 으스러뜨릴 기세로 움켜잡고

"마법을 거둬라. 당장."

전사가 낮게 으르렁 대지만 악마들의 왕은 뭔가 깨달은 마냥 잔잔한 물결처럼 대답한다.

"자네가 약해졌다고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똑같은 수법을 얼마나 사용하든 자네 무력에 저지되겠지."

"애초에 지상에는 나보다 강한 자가 그렇게 많은데. 내 자만이 깊었던 거겠지."

"그래도 자네가 바라는 걸 이루진 못할 걸세. 그걸로도 자네에겐 충분한 형벌일 테니까."

악마들의 왕은 이전과 똑같이 무수히 많은 눈알들을 소환했지만, 전사는 뭔가 낌새가 다름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어올린다. 싱크홀은 도시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했지만 마왕이 불러낸 눈알들로 가득 차 지옥의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수많은 동공들이 왕을 조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불패의 전사는 왕의 양 어깨를 그대로 부러뜨린 뒤

"우선은 이걸로 그 편리한 꼼수는 못 쓸거다."

종아리를 잡고 심연으로 내던진다.

"그런다고 막을 순 없으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전사의 내동댕이로 왕이 더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하자 눈알들이 일제히 꽃을 그리듯이 새빨간 빛 줄기를 뿜어댄다. 불패의 전사는 싱크홀의 벽면이나 바위 등을 박차고 내려가면서 섬광이 왕에게 닿으려고 하면 그를 걷어참과 동시에 발판 삼아 더욱 더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번복하다, 그게 체력 소모가 심하다고 여겼는지 발상의 전환을 한다.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주지!"

그대로 왕의 머리를 움켜잡고 싱크홀 벽면에 갈아버리면서 내려가기 시작한다. 눈알의 조준력은 흐트러졌고 어쩌다 정확히 조준해도 쿵 소리를 내며 반대쪽 벽면으로 뛰어내려 왕의 얼굴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 망할 어깨는 그렇게 쉽게 부러졌는데! 너희 악마들은 대가리가 그렇게 단단하군!"

"자, 이제 그만 포기하고 마법을 풀어라. 내가 너의 정복자다!"

그가 재차 왕에게 마법을 풀 것을 요구하며 벽면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예닐곱 대 더 쥐어박은 뒤 그의 면상을 바라보는데, 왕의 얼굴은 너덜너덜해지만 그 눈빛은 이전처럼 결의에 가득찼다. 아니, 더욱 더 서슬퍼렇게 날이 서 있다.

"자네는 거짓말을 했군."

"뭐?!"

"자네의 태도는 절대 후회하는 자가 취하는 행동이 아니야. 잔혹하고 무자비하지."

"그게 바로 내가 적에게 대하는 태도다. 넌 지금 당장이라도 마법을 거두겠다고 말할 수 있어!"

"아니면 정말 거짓 없이 그게 자네의 후회하는 행동인가? 악마의 상식으로도 실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세."

"잔말은 집어 치워! 마법을 거둬라!"

"그럼에도 초조해하는 게 있어. 자네가 말한대로 브렌다를 죽일까봐 두려운 건 진심인가 보군."

불패의 전사는 대답하지 않고 왕의 뒤통수를 두 어대 때리고 나서,

"그만. 이제 마법을 풀어라."

"... 자네는 제법 수다를 떠는 편이군. 지상에서 어떻게 생활하는 지 알고 싶을 정도야."

그 말을 듣고 전사는 대화하는 동안 섬광이 날라오지 않았던 것을 알아차리고 천장을 바라봤으나 싱크홀을 가득 메웠던 눈알은 온데 간데 없다.

"네 망할 눈알들은 어딨는거지?!"

"늙긴 늙었나 보군, 시야도 좁아졌어. 아래일세."

저 아래에서 붉은 빛 십자가 섬광처럼 번뜩이더니 붉은 빛 줄기가 치솟아오르며 하나 둘 뜨개질 하듯이 서로를 엮어가며 왕과 전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든다. 불패의 전사는 다시 한번 벽면을 박차고 회피를 시도했으나 그 시점에서 이미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남은 왼손으로 왕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허공에서 구르며 간신히 붉은 섬광을 피한다. 점점 낙하하며 아래 쪽에서 탄막을 쏘아대던 눈알에 가까워지자 돌풍 같은 발길질로 거센 풍압과 함께 그 징그러운 눈덩어리들을 피안개로 만들어버리지만 이번에는 왼쪽 무릎이 날아갔다. 그러자 전사는 악마들의 왕을 무기 삼아 휘둘러 터트려나간다.

"이, 빌어먹을!"

불패의 전사가 마지막 눈알을 터트렸을 때가 되어서야 밑바닥에 닿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착지하려 하지만, 자신에게 착지할 발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나지막히 욕을 뱉는다.






희미하면서도 명확하게, 여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불패의 전사의 귓가에 울려퍼진다. 그는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 이 흐느낌을 알고 있다. 악마들의 왕의 아내, 악마들의 왕비, 악마 왕자의 어머니의 울음. 전사의 머릿 속은 방금 전까지 전투 했던 긴박함과, 과거 지옥을 정벌했던 잔혹함, 그리고 오늘날 악행을 벌인 것에 대한 후회로 어지럽혀져있다. 그는 아찔한 머릿 속과 왕비의 흐느낌에 짜증이 나 큰소리로 꾸짖는다.

"그만! 시끄러우니 그만 울음을 멈춰라."

"당신은 항상 잔혹하세요. 언제나요."

"나는... 그렇다."

왕비가 그의 잔혹함에 대해 말하자 불패의 전사는 마지못해 수긍한다.

"나는 늘... 잔혹하다."

"자비를! 너무 아파요. 그만해주세요!"

"무엇을?"

"제발 발 좀 치워주세요."

불패의 전사의 발 아래에 왕비가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다.








불패의 전사가 눈을 떴을 때 사방에 자욱한 먼지와 그 먼지와 혼합되어 여기저기 퍼져있는 피안개, 아직 싱크홀로부터 떨어지는 잔해들의 굉음으로 혼란스러웠다.

"악마들의 왕! 어딜 도망간거냐!"

오른팔과 왼다리를 잃고 남은 팔다리도 부러졌음에도, 허우적허우적 시커먼 땅을 기어가며 악마들의 왕을 찾아나선다.

"바로 옆일세. 자네 정말 시야가 좁군."

"그렇게 흥분하진 말게. 누구 덕에 팔다리가 전부 부러졌으니 도망치지도 못ㅎ"

왕이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불패의 전사가 그대로 몸을 날려 왕을 덮친다. 부러진 다리 한짝을 기울여 왕의 가슴에 걸터 앉은 그는 부러진 왼팔을 채찍처럼 휘두르기 시작한다.

"마법을! 풀어!"

주먹을 쥐지도 못한 채 다양한 각도로 꺾이는 그의 왼팔이 왕의 얼굴에 강타할 때마다 심연에 울려퍼진다.

"절대로! 지지않는 마법을! 풀어라! 악마들의 왕!"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아."

악마들의 왕이 다시 한번 더 확고한 의지를 보이자 불패의 전사는 억지로 주먹을 쥐어 힘껏 내리치려든다. 그 순간

"제가 풀어드리지요.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불패의 전사도, 악마들의 왕도 뒤를 돌아본다. 푸른 피부의 악마가 터벅터벅 걸어오듯 지친 날개짓을 하며 내려온다.

"애송이, 네가 풀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다시 황무지로 돌아가시죠. 당신을 지옥에서 하루 빨리 쫓아내는 편이 더 나을 거 같습니다."

"좋다."

악마 왕자가 손가락을 튀기자 날개 달린 살덩이들이 나타나 불패의 전사를 끌고 위로 올라간다.

"왕자여, 아니 아들아."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을 부르는데, 그는 그 어느때보다도 고요하고 침착한 표정이다.

"네가 날 여태껏 믿어왔듯이, 나 역시 네 선택을 존중한다."

"죄인에 대한 처벌은 지옥의 의무이며, 우리를 유린하고 정복한 저 자에 대한 형벌 집행은 온 지옥의 염원이다. 분명히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에 네가 이런 짓을 벌인거겠지. 내게 설명해봐라."

아들은 잠시 머뭇대더니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지옥의 의무보다 보잘 것 없으며, 정복자의 처벌보다 하찮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부러진 어깨를 들썩이고 상체를 반쯤 들어올릴만큼 격노하며 잠시 소리를 높였다가,

"마저 얘기해다오."

"저 자에게 집중하느라 신경도 쓰시지 못하셨나보군요. 이곳 심연은 어머니의 봉인이 잠겨있는 곳입니다. 정복자에 대한 악몽에 몸부리치다 결국 아버지의 곁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들어간 곳이요. 그렇기 때문에 대피시키지 못하기도 했지요."

"그가 방금 주먹을 내리쳤으면 봉인이 깨졌을 겁니다. 어머니가 다시 깨어나셨을 때 처음 본 광경이..."

아들은 긴장한 채 숨을 고르다 말을 잇는다.

"그가 아니길 바랬을 뿐이에요. 이게 잘못된 결정임을 알고 있지만, 후회하진 않을겁니다."

아들은 입술을 짖궂게 깨물었고, 그의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던 무시할 작정이었다. 스스로 지옥의 의무보다 보잘 것 없다고 말했지만 아들에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하찮은 이유구나. 왕의 후계자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선 안된다. 나 역시 천년 전에 놈이 너와 네 어머니의 목숨을 인질로 마법을 요구했을 때, 너희를 잃을까봐 그 협박에 응했다. 그날 수천 명이 넘는 주민들과 신하들이 그에게 죽었는데도 말이다. 너와 똑같은 옳지 못한 결정을 했지. 그래도..."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고백에 아들이 놀라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두 줄기의 눈물이 망가진 얼굴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미안하다, 부족한 왕이라서. 놈을 이기지 못해서, 기만하지 못해서, 저항하지 못해서 너에게도 똑같은 결정을 내리게 해버렸다."

"하염없이 못난 아버지이자 모자란 왕이다. 미안하다."

악마들의 왕은 슬픔에 이기지 못해 딸꾹질까지 껄떡이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악마 왕자는 왕을 끌어안아 함께 슬픔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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