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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파나마 대선+총선 최종결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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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호세 라울 물리노, 주황: 리카르도 롬바나, 초록: 마틴 토리호스, 청록: 로물로 , 분홍: 줄라이 로드리게스)

 

2024년 파나마 대통령 선거 최종결과(투표율: 77.64%[+4.63])

 

호세 라울 물리노(목적실현, 민주변화당 출신): 34.25%

리카르도 롬바나(또다른 길 운동, 포괄정당): 24.63%

마틴 토리호스(인민당, 중도우파, 반공주의): 16.03%

로물로 (민주변화당, 중도우파, 대중주의): 11.35%

줄라이 로드리게스(무소속, 민주혁명당 소속): 6.58%

호세 가브리엘 카리조(민주혁명당, 중도좌파): 5.85%

마리벨 고르돈(무소속, 민주주의광역전선): 1.07%

멜리톤 아로차(무소속, 친-마틴 토리호스): 0.21%

 

친-마르티넬리 호세 라울 물리노 9.62%p 당선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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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파나마 총선 최종결과

 

목적실현당(우익대중주의, 개인주의, 보수주의): 13석(+13)

민주혁명당(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대중주의): 12석(-23)

민주변화당(중도우파, 경제자유주의, 보수주의): 8석(-10)

파나마인당(국민보수주의, 민족주의, 대중주의): 8석(=)

또다른 길 운동(포괄정당, 반부패, 참여민주주의): 4석(+4)

인민당(중도우파, 기독교민주주의, 반-공산주의): 2석(+2)

동맹당(중도우파, 민주변화 탈당, 민족자유주의): 2석(+2)

민족공화자유운동(중도우파, 자유주의, 보수주의): 1석(-4)

무소속: 21석(+16)

 

집권 민주혁명당-민족공화자유운동 과반 상실 참패

 

 

전체 의석: 71석(26개 소선거구, 13개 중선거구)

과반 의석: 36석

 

 

2019년 파나마 대통령 선거 최종결과(투표율: 73.01%[-3.75])

 

라우렌티노 코르티소(민주혁명당, 중도좌파): 33.35%

로물로 루(민주변화당, 중도우파, 경제자유주의): 31.00%

리카르도 롬바나(무소속, 또다른 길 운동 창당): 18.78%

호세 이사벨 블란돈(파나마인당-인민당, 중도우파): 10.84%

아나 마틸데 고메즈(무소속, 민주혁명당 법무장관): 4.77%

사울 멘데즈(민주주의광역전선, 좌익, 원주민 권익): 0.69%

마르코 아메글리오(무소속, 파나마인당 출신): 0.58%

 

라우렌티노 코르티소 2.35%p 접전 끝 당선 확정

 

 

아메리카 대륙의 남미와 중미를 가르는 곳에 위치한 인구 441만의 나라 파나마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둘러싼 미국과 그란콜롬비아 간의 갈등 끝에 1903년 미국의 입김 속에 독립한 이래로 미국의 정치경제 체제의 영향을 받으며 결선 없는 단순다수 선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사는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독립한 다음 해인 1904년 육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해체당하고 수십년간 국가경찰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후 1947-52년 전후 방위대 개명을 거쳐 군대 복구)

 

1-2차 세계대전을 지나 미국의 정치경제적 입김이 점차 약해지긴 했지만, 이번엔 오히려 기존 정치권의 빈틈을 노리고 재차 쿠데타가 벌어졌습니다.

 

1931년 파나마인당(국민혁명당으로 시작, 운하 반환을 주장하며 인기몰이)의 기획 하에 벌어진 정치 쿠데타가 성공한 끝에 파나마인당 창립자 아르눌포 아리아스(무솔리니 이탈리아 대사 출신으로 민족적 인종차별주의자/추축국 지지 논란, 군사경찰 영향력 경계)의 형인 하르모디오 아리아스 마드리드가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쿠데타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 것이 그 후로는 역으로 작용한 나머지, 40-60년대 아르눌포 아리아스 마드리드 대통령(40, 48, 64, 68, 84 대선 출마) 체제 하에서 무려 3번이나 쿠데타가 벌어지며 3번의 임기 모두(1940-41, 1949-51[대선 1년 후 결과 번복], 1968)를 제대로 완료하지 못했으며, 마지막 임기는 역쿠데타 상황까지 벌어진 끝에 마침내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실권을 잡은 오마르 토리호스는 기존 체제는 군대와 사회 엘리트, 성직자 간의 부패 카르텔이었다고 주장하며 개헌, 토지개혁, 노동개혁을 통해 노동조합, 농민조합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교육 강화, 건설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농지분배, 빈민구제, 공공정책 강화를 추진하며 대중주의 서민 노선을 지향했습니다.

 

민족주의적 토리호스 정부에서의 최대 성과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파나마 운하 반환으로, 북미 다국적 과일 기업과 미국 정부의 파나마 내 이익을 재분배하려는 노력은 바나나 수출기구 성립이 실패하고 미국의 운하 내 군사적 선점권이 인정받는 등 늘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파나마 내 중산층과 원주민 권익 증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토리호스 정부는 미국이 영향력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면모를 보이면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좌파 정부와 주변국 좌파 반군들을 지지하고 칠레 난민을 받아들이며 공산화된 쿠바와의 외교를 정상화하는 등, 초창기 중남미 좌파 정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토리호스 정부가 아무리 개혁적이었어도 허수아비 간선 대통령을 내세운 실질적 군사독재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그의 정치적 정당성과 대미 협상력에 계속되는 악재로 다가왔으며 노동/학생운동/야당 탄압, 반대파 고문 및 암살(200명 넘게 실종), 부패와 ㅁㅇ 밀반입이 만연하였습니다.

 

토리호스 본인도 이러한 비정상성에 대한 고민 끝에 72년 개헌을 통해 기존 정당을 합법화하고 79년 민주혁명당을 창당했으며, 84년 직선제 대선을 통해 민정 대통령 등극을 계획하였으나 81년 석연치 않은 비행기 사고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토리호스 사후 방위대의 국방군화를 이끌며 군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누엘 노리에가(토리호스 군부 정보사령관 출신)로, 오로지 군국주의에 기반한 통치를 지속하면서 84년 대선 전부터 민주혁명당의 기술관료 니콜라스 아르디토 바르데타를 대놓고 밀어주고 자유선거를 주장하던 당시 대통령을 강제로 끌어내렸습니다.

 

이로써 84년 민족공화자유운동 후보로 출마한 아르눌포 아리아스 마드리드를 부정선거 논란(모사드와의 뒷거래로 반유대주의 홀로코스트 동조자 아리아스 마타도어 강화, 출구조사 아리아스 승리하자 개표 중단 후 결과 뒤집기) 끝에 0.27%p(46.98:46.71)로 꺾고 당선된 직선제 대통령을 초장부터 허수아비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ㅁㅇ단속국과 CIA 국장 출신 조지 H.W. 부시 부통령의 그에 대한 끈끈한 신뢰를 이용해서, 콜롬비아 ㅁㅇ 카르텔 들과의 본격적인 유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뒷거래를 통해 ㅁㅇ자금 유용과 적성국 거래, 우익 반군 불법 지원으로 점철된 이란-콘트라 사건에 깊이 개입할 정도였습니다. (영화 아메리칸 메이드, 미드 나르코스에서 반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독선적인 노리에가 최고사령관에 대한 불만은 끊이지 않았고, 바르데타 대통령이 추진한 IMF 협상안 이행(증세, 예산삭감)은 노리에가와 유착한 정치 엘리트들과 노동계/학생/전문직들의 반감을 동시에 산 나머지 시작도 전에 좌초되었으며, 위와 같은 충돌과 대통령이 밖에만 나가도 통제되지 않는 보안군의 불법적 잔혹행위를 둘러싸고 노리에가와도 갈등을 빚은 끝에 바레타는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파나마 정권에 최소한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바레타의 사임으로 노리에가는 미국 공화당 정부의 옹호를 더 이상 받기 어려워졌으며, 88년엔 바레타의 후임이 미국의 ㅁㅇ 밀매 기소를 명분으로 노리에가를 군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하였으나 오히려 군에 장악된 의회의 몰표로 대통령이 축출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89년 대선에서 민주혁명당 후보를 꺾고 절대 다수를 득표한 기예르모 엔다라 야권연합 후보의 당선이 무효화되는 일이 발생한 전후로 수만명의 항의시위가 펼쳐졌으며, 소장파 쿠데타 실패와 야당 탄압 강화(거리에서 엔다라 측 인사 무차별 구타 및 납치), 파나마 경찰에 의한 미군 살해까지 터지면서 상황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됐습니다.

 

마침내 노리에가를 손절할 명분을 확보한 부시 정부는 파나마 침공을 단행, 1만 5천명 안팎의 파나마군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바티칸 대사관으로 도망친 노리에가를 헤비 메탈 확성기 공격을 통해 끌어냈습니다.

 

위와 같은 쿠데타의 역사로 인해 파나마는 90-94년 국민투표로 옆 동네 코스타리카처럼 군대 미보유국(군사경찰 성격 공공부대로 대체)을 선언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햄, 가전제품, 시멘트, 닭, 심지어 ㅁㅇ까지 넘나드는 각종 선물들로 얼룩진 선거 부패상은 계속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집권한 기예르모 엔다라 자유주의 정부였지만 무능과 부패 논란 속에 인기는 10%로 폭락했으며, 노리에가에 대한 거리두기(89년 민주혁명당 캠페인 수장이었지만 노리에가 정책 반대 강조)와 토리호스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에르네스토 페레스 발라다레스 민주혁명당 후보가 33.30:29.09로 민족공화자유운동의 지원을 받지 못한 아리아스의 아내 미레야 모스코소 파나마인당 후보를 꺾으며 정권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리고 1999년 대선은 민주혁명당 후보로 오마르 토리호스의 아들인 마르틴 토리호스가 출마하고 파나마인당/민족공화자유운동 후보로 미레야 모스코소가 출마했는데다, 84년 아리아스 캠프/89년 반-군부 연합 출신의 경제계 인사 알베르토 발라리노 클레멘트까지 대선에 나오면서 파나마 정치사의 축약판이 되었으며, 미레야 모스코소가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권 재창출 실패 징크스는 모두 예외가 아니었는지 04년 대선(47.4:30.9:16.4:5.3)에선 마르틴 토리호스가 기예르모 엔다라와 파나마인당-민족공화자유운동 후보리카르도 마르티넬리 민주변화당 대표(발라다레스 임기 초반 사회보장국장모스코소 연립정권 시절 운하부 장관)를 꺾고 대통령(아나 마틸데 고메즈 5년간 법무장관)이 되었습니다.

 

09년 대선 또한 토리호스 대통령의 나쁘지 않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연임 금지 조항 때문인지 재창출 실패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르티넬리 민주변화당 대표가 파나마인당민족공화자유운동의 지지를 받으며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지지자라는 마타도어에 손해를 본 민주혁명당-인민당 후보를 60.0%:37.7%:2.3%(엔다라)로 압도적으로 꺾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중남미 대륙에 불어닥치던 핑크타이드 물결과 상반되는 결과였기에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마르티넬리 대통령은 친미 노선(미국의 팔레스타인 유엔 준회원국 가입 반대표 동조)과 함께 알베르토 발라리노 클레멘트를 경제장관으로 지명하여 재정건전성을 개선시키고 투자매력을 높이며 조세피난처 논란에서 잠시나마 탈피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친-기업 세제개혁(법인세 25%로 인하, 소득세구간 간소화)과 인프라 투자(파나마 운하 확장 53억 달러 계획 지속),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법치 강화 노선, 복지 강화(연금 증대, 최저임금 상승, 학생지원금) 등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실업률 감소(6.6%->4.1%)와 소득 증대(1인당 GDP 8천 달러->1만 3천 달러), 양극화 해소,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최저임금이라는 성과를 이루며 임기 끝날 때까지 65%가 넘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기 중반부터 무리한 인프라 정책으로 인한 공공 부채 증가와 함께 부패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반대파 무차별 도청 및 감시, 노리에가 귀국 허용 등의 권위적 면모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높였습니다.

 

마르티넬리 본인도 이를 보고 연립정당 들과의 향후 관계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부통령 겸 외무장관/파나마인당과의 관계를 끊고 민주변화당 독자 출마 후 아내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민주혁명당도 합류한 3파전(39.1:31.4:28.1) 끝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4년 퇴임 이후 정권 교체된 신정부에서 전 정부 기간 예산을 검수한 결과, 수천만 달러의 원조 비용 유용이 적발되었으며, 대법원 전체의 동의 하에 마르티넬리 대통령에 대한 돈세탁, 간첩, 자금 유용 혐의 수사가 시작되자 전 대통령은 법원 카르텔과 신정부가 유착하여 감옥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거세게 반발한 끝에 중미 의회가 위치한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반부패를 내세운 신정부 또한 브라질발 오데브레시 스캔들에 연루되며 부패 척결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16년 벌어진 파나마 페이퍼즈 스캔들(초대형 조세피난처 불법 행위 폭로)은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신정부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무부 및 인터폴과의 연계를 통한 마르티넬리의 체포는 피할 수 없었지만, 신정부가 임기 후반 갈수록 더욱 힘을 잃어가자 마르티넬리는 법원에서 간첩 및 부패혐의 면죄부를 받고 가택연금에서도 풀려나게 됐습니다.

 

한편, 2019년 5월 5일 치러진 파나마 대선에선 부패 척결을 주요 기치로 내세운 중도좌파 코르티소 후보가 접전 끝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습니다. 여론조사보다는 훨씬 적은 격차에다 30%대 득표이지만 결선 없이 한번에 선출하는 파나마 법에 따라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파나마 페이퍼 게이트의 유탄을 맞은 집권당 파나메니스타 출신의 블란돈 후보(인민당과 동맹)는 4위로 내려갔으며, 반부패, 개헌, 긴축, 사회보장개혁, 이민 통제를 외친 리카르도 롬바나 무소속 후보(파나마 최초의 여성변호사 클라라 곤살레스의 친척이자 국제법 전문가)가 상당한 돌풍을 일으키는데 성공했습니다. 

파나마는 89년 마누엘 노리에가 축출 이후 연임 금지 법률의 영향으로 단 한번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당내 경선 패배 후보가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여 3명의 무소속 후보 쿼터가 모두 경선 패배/정당 재창설위원회 후보로 채워지는 일도 있습니다.

 

라우렌티노 코르티소 후보의 임기는 19년 7월 1일 시작됐습니다.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단독 과반에 1석 차로 실패한 만큼 정치적 유동성이 상당할 것으로 보였지만, 5석을 차지한 민족공화자유운동과의 연정 합의에 성공하면서 40/71로 원내 과반을 확보하였습니다.

 

하지만 코르티소 정부의 국정 운영은 원내만큼 안정적이진 못했습니다. 지지부진한 정치 개혁 상황 속에서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파나마의 경제는 파멸 직전(21년 중반 실업률 20%, 1인당 GDP 16,400달러에서 13,300달러로 추락했다가 임기 말 간신히 17,400달러 복구))까지 몰렸으며 코르티소의 인기 또한 폭락했습니다.

 

2023년엔 생물다양성 지역과 원주민 거주지에 대한 채굴 면허를 갱신하기로 한 코르티소 정부의 결정이 파나마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경찰의 탄압으로 5명이 사망하고 1,061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안정적 경제 성장을 구가했던 마르티넬리 정부에 대한 향수가 폭증한 나머지 마르티넬리의 재출마 시 단독 지지율이 무려 50%를 넘나들 정도였으며, 이에 힘입어 마르티넬리파는 민주변화당 재장악이 실패한 후 전 대통령의 이니셜(RM)을 딴 반-이민 우익대중주의 정당 목적실현당을 창당하고 세속주의 성평등 추구 자유주의 정당 동맹당과 파나마 구국연합을 결성했습니다.

 

다만 법원 판결 이후로도 애인에 대한 편집증적 감시를 위한 사설 업체 고용, 국영 언론사 인수 및 정부계약을 통한 돈세탁 혐의가 재차 적발되면서 10년 이상 징역형이 내려짐에 따라 마르티넬리의 정치적 재기는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마르티넬리는 이번엔 코르티조 대통령이 감방에 넣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그동안의 사회경제 보수적 견해를 일단 뒤로하고 좌익 독재자 다니엘 오르테가가 집권하는 니카라과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추태를 보였지만, 법원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고 출마가 불허되는 건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파나마 구국연합은 대선 대체 후보로 마르티넬리 정부 법무/치안장관 출신(엔다라 시절엔 외무장관)의 호세 라울 물리노 부통령 후보를 선출, 대체 부통령 후보 부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인기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한편, 인기를 잃은 민주혁명당과 마르티넬리파가 떨어져 나간 민주변화당의 자리를 롬바나가 만든 신당 또다른 길 운동과 마틴 토리호스 전 대통령이 합류한 중도우파 인민당(반-오마르 토리호스 기민당으로 출발), 친-마르티넬리파 겸 배타적 반-이민 무소속(민주혁명당적은 유지) 줄라이 로드리게스(지선 동시 출마) 등의 상대적 비주류들이 차지하였으며, 그 중 롬바나가 갈 곳을 잃은 진보층의 남은 지지를 이끌어내며 물리노의 대항마로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민주변화당은 호세 이사벨 블란돈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며 파나마인당과 손잡는 주류 우파 대연합을 결성하고 어떻게든 영향력을 지키려 했으나, 4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24년 5월 5일 치러진 파나마 대선+총선+지선 결과, 예상되었던 것처럼 물리노의 당선이 확정되었으나, 막판 반-마르티넬리 표의 결집 때문인지 여론조사보단 격차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습니다. 2-4위를 차지한 롬바나토리호스는 결과에 승복하며 물리노에게 당선 축하 인사를 보냈습니다.

 

문제는 바로 같이 치러진 의회 선거로,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나머지 주류 정당들이 모조리 부진하면서 1위를 차지한 목적실현당이 15석도 얻지 못하고 무소속이 30%에 육박하게 되면서, 연정 협상을 놓고 상당한 진통을 겪으며 경제 재건(2024년 거의 50%의 비공식 고용 문제와 약 20만명의 극심한 빈곤층)과 부패 탈피의 과제를 떠안은 물리노 신정부의 또다른 부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목록 링크

https://gksejrdn7.tistory.com/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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