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바이에른 출신 쉴츠바흐의 베르타와 결혼했다.
이때 문법학자인 요안니스 체체스가 먼 독일 땅에서 온 이방인 황후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드>였다.
정확히는, <일리아드>를 리메이크한 <일리아드 우화담>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이래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국가였다.
당연히 옛 그리스 이교를 다룬 <일리아드>는 너 이단 소리를 들을 만한 물건이었지만,
의외로 <일리아드>를 비롯한 이교 시대의 저작은 꾸준히 필사되어 전승되었다.
아마 오래 전부터 구 이교가 진지한 종교보다는 교양 쯤으로 격하된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굳이 총대주교의 코렁탕을 자처해서 먹고 싶진 않았으므로
체체스는 신중하게 <일리아드 우화담>을 재집필했다.
그리스 신들을 직접 거론하는 대신, 인간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행성으로 바꾸어 묘사한 것이다.
(체체스는 후일 <오디세이아>도 같은 방식으로 리메이크했다.)
[애덤 J. 골드윈과 디미트라 코키니가 영역한 <일리아드 우화담>의 표지.]
동로마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단순히 '박제'하고 '보존'만 한 게 아니라
당대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인용하어 꾸준히 생명력을 부여하였다.
그 결실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