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완성하도록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홀아비와 딸
아내가 죽었다. 지독한 병이 남긴 것은 두 개였다.
홀아비와 딸.
둘만 남게 된 집에서 딸이 아비에게 물었다.
‘어머니 어디 있어요?’
죽었어.
‘죽었다는 게 뭐예요?’
이제 없다는 거야. 다시는 못 본다는 거야.
‘아버지, 많이 슬퍼요?’
그래, 슬퍼. 죽고 싶을 만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리월의 겨울에는 눈을 보기가 힘들다. 오히려 오늘같이 비가 자주 내리며, 처음엔 부슬비로 시작하다 한참 뒤에 폭우가 되어 끝난다. 다행히 비는 막 내리기 시작했으니 귀가가 고달프지는 않을 듯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오한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몸을 떨며 계단을 오르다가 언쟁을 벌이는 어느 모녀를 보았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에게 애 엄마가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난 그들을 쓱 쳐다본 후 관심을 끊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불복려에 들어서기 전, 오늘은 누가 여기 남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실망스럽게도 아규가 약방 일을 보고 있었다. 난 언제나 그보단 꼬마 직원을 더 좋아했는데 그 이상한 여자아이는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곧 아규 또한 나를 알아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난 말없이 그에게 처방전을 건넸고, 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에게 서랍장의 약을 건네주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갑작스러운 기침이 튀어나왔다. 결국 그의 오지랖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계속 이런 식이면 차도가 없는 거 알죠?”
“그래, 알고 있―.”
“말만 항상 “그래, 그래, 알고 있어. 계속 노력 중이야.”라고 하지. 한 번도 나아지려고 한 적 없잖아요.”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난 괜찮아.”
“아, 그건 몰랐네요. 애초에 멀쩡했다면 나오지도 않았을 기침이었으니.”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네가 말했던 것들은 전부 지키고 있다고.”
“그럼 제가 조만간 검진하러 댁에 방문해도 상관없죠? 이번만큼은 그 귀한 약재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꼴은 안 보겠네요.”
난 더 이상 참다못해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날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해봤자 못 죽어요. 그저 계속 이렇게 고통스러울 뿐이지, 죽을 수는 없을 거예요.”
난 잠시 그대로 서 있다 답했다.
“나도 알아.”
계단을 내려온 후, 가랑비를 맞으며 숨을 골랐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떨림이 나아지지 않았다. 열 때문에 온 세상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길거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옆에서 누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저씨, 괜찮아? 많이 아파?”
난 말을 건 여자애를 보았다. 내 상태가 확실히 나빠 보이는지 아이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아이는 그래도 내가 걱정되는지 좀체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억지로 기운을 쥐어짜 말했다.
“미안한데, 나 좀 혼자 내버려 둘 수 없겠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지쳐서 그래.”
“거짓말. 아저씨, 엄청 아파 보여. 어쩌다 목을 그렇게 다친 거야?”
누구든 날 보면 명의가 되어 자신 있게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흉측한 흉터가 새겨진 목을 봤는데 모른다고 하면 바보인 거지.
“내가 지금 도와줄 사람을 부를게. 다행히 불복려가 바로 앞이니 금방 돌아올 수 있어.”
난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아이의 선의를 막았다. 아이가 울먹이며 “그럼 내가 뭘 해야 해?”라며 물었다.
“말했잖아, 나 좀 내버려 달라고. 너의 부모님들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가르친 적 없니?”
“그야, 두 분 다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은 두 분 다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걸? 엄마는 나 달래주려고 행인두부 사러 갔어. 그게 없으면 내가 약을 안 먹으니깐. 그것 때문에 엄마와 난 항상 싸워. 아까도 그랬어.”
난 그제야 눈앞의 아이가 아까 전 계단에서 지나쳤던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난 손짓으로 아이에게 저리 가라고 한 후 내 갈 길을 갔다. 하지만 아이가 나를 조심스럽게 따라와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아저씨, 아저씨는 가족 없어?”
그 말이 모든 걸 끝냈다. 자신이 내뱉은 것이 내 가슴속을 헤집는 것도 모른 채 아이는 계속 물었다.
“내 도움이 싫다면 아저씨 가족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내가 우리 엄마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저씨도 가족이 있을 거 아니야?”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난 세월 동안 가졌던, 그리고 앞으로도 가지게 될 감정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런 날 보며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곧 내가 대답했다.
“나에겐 아내와 딸이 있었어.”
“…있었어?”
“아내는 죽었어. 병 때문에.”
내 대답에 조금 전까지 울던 순수한 아이는 이제 겁에 질린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그럼 딸은? 걘 어떻게 되었는데?”
난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딸아이는 죽었어. 나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 지독한 병이 남긴 것은 두 개였다.
홀아비와 딸.
둘만 남게 된 집에서 딸이 아비에게 물었다.
‘어머니 어디 있어요?’
죽었어.
‘죽었다는 게 뭐예요?’
이제 없다는 거야. 다시는 못 본다는 거야.
‘아버지, 많이 슬퍼요?’
그래, 슬퍼. 죽고 싶을 만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홀아비는 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탄에 미친 이들이 그렇듯 집을 뛰쳐나와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나섰다.
자신의 슬픔을 없애 줄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1년 후, 홀아비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속여왔던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그건 오해라고 알렸지만, 홀아비는 그저 증오 어린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죽어가는 친구를 뒤로한 채 홀아비는 숨겨져 있던 고서를 찾아내 달아났다. 책은 일개 인간이 알아선 안 되는 많은 것들을 알려 주었다. 홀아비는 그것들을 통해 신이라는 자를 불러냈다.
신이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싶어요.
‘누가 죽었느냐?’
제 아내요.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요.
‘아내의 죽음이 널 슬프게 하느냐?’
그렇습니다, 슬퍼요. 죽고 싶을 만큼.
‘좋다. 죽음에는 죽음의 대가가 있지만 너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다.’
홀아비가 답했다. 자신을 바치겠다고. 그러나 신은 희생양으로 다른 이를 지명했다. 신이라는 놈의 입에서 미친 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슬픔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홀아비는 아버지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승낙했다.
아내가 죽었다. 지독한 병이 남긴 것은 두 개였다.
홀아비와 딸.
둘만 남게 된 집에서 딸이 아비에게 물었다.
‘아버지,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오셨어요?’
해답을 찾으러 다녔어.
‘해답이란 게 뭐예요?’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는 거야.
‘아버지, 이제 안 슬퍼요?’
그래, 더 이상 안 슬퍼. 이젠 괜찮아.
그 말에 딸은 기뻐하며 홀아비를 껴안았다.
‘아버지, 저게 대체 뭐예요?’
딸이 아버지가 부른 존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약속한 사랑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괴물이 겁에 질린 자신을 내려다보며 흡족한 듯 웃자 딸은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자기를 지켜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홀아비는 딸을 밀쳐냈다.
쓰러진 딸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곧 부친이 한 행동의 의미를 깨닫자 딸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홀아비는 자신을 부르는 딸을 버린 채 신이 지킬 약속을 기대하며 집으로 떠났다. 딸의 비명이 동굴 속에 메아리치며 그를 계속 붙잡으려 했지만, 홀아비는 그것을 억지로 외면하며….
‘…거예요.’
홀아비는….
‘…괜찮을 거예요.’
홀아비는….
‘제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주체할 수 없는 추위와 식은땀에 온몸이 떨렸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언제나 악몽이 나의 죄를 일깨워 주며, 나 자신을 더 명확하게 알게 해주었다.
딸을 죽인 미친 인간.
그게 나였다. 그게 어제의 아이가 알아야 했던, 그리고 나 자신이 잊어선 안 되는 진실이었다. 학이는 죽었다. 바로 나 때문에. 내가 제정신을 되찾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오래 걸린 걸까. 3일이나 지나서야 괴물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묻어줄 딸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으니깐. 이제 학이의 존재는 오직 내 꿈속에서만 남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 아이를 외면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아이를 죽였….
“…지.”
그리고 내가…
“…버지.”
그리고 내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몽에서 스스로 깨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난 스쳐 지나간 환청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여자. 한 여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집의 부서진 틈새로 들어온 가느다란 빛줄기에 자신을 드러낸 여자. 내 옛 가족사의 흔적들에 들어와 있는 여자. 속세의 것이 아닌 외모, 그리고 얼음같이 차가운 인상과 외관상의 나이에 맞지 않는 백발을 가진 여자.
죽은 아내와 너무나도 닮은 여자.
잠시 공포만이 내 마음속에 흘렀다. 지금 눈앞의 여자에게서 느낄 수 있던 게 그것뿐이었으니깐. 내가 두려움 속에 입을 열었다.
“여보?”
곧 내가 제대로 헛다리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말을 듣자마자 무감정해 보이던 여자의 얼굴에서 순간 짜증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니깐. 착각에 부끄러워진 난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당, 당신 대체 누구야?”
여자는 고개를 외로 돌리며 답했다.
“보다시피 당신 아내는 아니야. 그저 이곳을 지나가던 아무개일 뿐이지. …그래, 난 그냥 이곳을 지나가던 것뿐이었어. 그것보단….”
여자는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우아한 몸을 기울여 내 목에 양손을 갖다 댔다. 차갑게만 보였던 손들에서 온기가 흘러나와 내 흉터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거….”
“뭐?”
“이 흉터,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
여자가 내 목에서 손을 뗀 후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그리고 이 약재들. 이것들은 죄다 신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귀한 것들인데 왜 이렇게 죄다 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거야?”
“당신,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왜 내 집에 멋대로 들어와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거냐고!”
내가 일갈하자 여자는 들고 있던 약재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나를 쏘아보았다.
“말했잖아. 난 그저 이 유령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근데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리는데 어떻게 무시해? 당신, 내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계속 괴로워했을 거야.”
“그래서 나보고 괜찮을 거라고 말한 거야?”
“…뭐?”
“날 깨울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괜찮을 거라고. 희미하지만 꿈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거든. 아니야?”
‘제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내 물음에 여자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 말없이 굳어버렸다. 마치 정신이 딴 곳에라도 간 듯이 말이다. 내가 연차 불러보자 그제야 여자는 제정신을 차리고 그랬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에게 그 후에 했던 말도 물으려고 했지만 그건 확실히 내 착각인 것 같아 관두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아버지라고 말할 리가 없지.
“그래서 꿈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했던 거야? 어지간히도 지독했나 보네, 그 악몽. 땀 때문에 옷이 다 젖었고, 아직도 몸이 진정을 못 하고 있으니.”
“이건 진짜 추워서 그래.”
“지금 비바람이 그 정도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멋대로 말을 끊자 왠지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진정한 후 나지막이 대답했다.
“미안, 날씨 때문이 아니야.”
난 그녀가 궁금해하던 것을 가리켰다.
“이 흉터. 정확히는 이걸로 몸이 망가진 후유증 때문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여기, 바로 집 앞의 나무에서 목을 매달았어. 오래전에 말이야.”
난 처음으로 여자가 당혹해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슬펐거든. 죽고 싶을 만큼.”
이번엔 그냥 내 독백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의 대화는 갑작스럽게 시작했던 것만큼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난 여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냉소적으로 내 말을 곱씹어 보았다. 뜻밖의 소리에 자기혐오 대신 공포가 내 머릿속에 들이닥치기 전까지 말이다.
“아내가 죽은 게 그렇게 슬펐어? 자살을 할 만큼?”
이번에는 내가 당혹의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한 번도 이른 적 없는 가족사를 알고 있는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내 불안감을 일소시켜 주었다.
“처음에 날 아내라고 불렀잖아. 그래서 당신 집사람이 죽었다고 추측했던 거야. 보아하니 내 생각이 맞았던 거 같네.”
아.
“그래, 아내가 있었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난….”
‘…지.’
“난….”
‘…버지.’
“난….”
‘아버지.’
“난 딸이 있었어.”
내가 울먹거리며 말을 끝냈다. 깊이가 보이지 않던 여자의 단백석 눈이 이전보다 심하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딸아이가 죽었어. 나 때문에!”
곧 눈물과 함께 과거의 환영이 터져 나오자 난 넋을 잃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아내가 죽은 후 딸만이 내 곁에 남게 되었어. 슬퍼하던 나에게 걔가 다가와 말했지. 괜찮을 거라고. 자기가 있으니 난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난 그 아이에게 어떤 사랑도 주지 않았어. 언제나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아내였지, 딸아이가 아니었으니깐. 아내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어. 그런 생각까지 하자 난 어린 딸을 홀로 두고 집을 나왔지. 거의 1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다 어느 날,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어. 친구, 내 친구가 내가 찾던 것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난 그를 헤친 후 강제로 원하던 것을 빼앗았어. 금서에는 내가 원하던 것이 빼곡히 적혀 있었어. 난 그걸 통해 고대의 괴물을 불렀지.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자 그것은 내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했어.
목숨만 바친다면 말이야.
처음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나를 바칠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 다른 선택을 강요했어. 딸아이를 제물로 바치라고. 그러고는 사실 아내를 죽게 한 게 끔찍한 병이 아니라 저주스러운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딸이라고 말했지. 그 말에 난 회까닥 미쳐버렸어. 죽었어야 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딸이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거야! 결국 난 그 개소리에 동의했지.
오랜만에 돌아간 집에서 딸아이가 나에게 물었지. 더 이상 슬프지 않냐고 말이야. 난 그렇지 않다고, 이제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었고. 그 말을 듣자 딸아이는 활짝 웃었어. 그 순수했던 아이가 알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했다는 것뿐, 내가 자신을 원망하며 해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리고 난…, 맙소사. 난 딸아이를 꾀어 뒷산의 동굴에 데리고 갔어. 너에게 줄 것이 있다고, 너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그동안 널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거기서 내가 불러들인 괴물이 딸을 죽이려 들자 난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외면해버렸지.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그건 돌아올 아내와의 사랑이었어. 애초에 우리 둘 사이에 이별 같은 건 없었다고. 그저 운 나쁘게 잠시 떨어져 있던 것뿐이었다고. 그리고 이제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그런 망상들이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할 수 있게 해 주었어. 그리고 그게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마지막 순간이었어.”
내 죄에 관한 고백이 끝나 가고 있었다. 난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문을 열었지. 바로 앞에 있을 아내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집 안은 그전이랑 전혀 다를 게 없었어. 죽어버린 집, 죽어버린 가족, 죽어버린 내 영혼을 채워줄 아내는 없었어. 그녀는 여전히 죽은 채로 남아 있었던 거야. 난 완전히 돌아버릴 것 같았어. 그러지 않기 위해 난 자신에게 변명했지. 아무리 신이라도 생사의 인과를 거스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그 시간이 3일이 되자 내가 결국 되찾은 건 아내가 아니라 아내와의 마지막 순간이었어. 슬픔에 가려져 있던 기억에서 그녀가 말했지.
학이를, 우리 딸아이를 부탁한다고.”
내 딸.
“난 동굴로 서둘러 달려갔지. 그러나 학이는 그곳에 없었어. 피. 그저 너무나도 많은 피만이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데 그곳에서 딸아이의 것이라고 유추할 신체 일부조차 찾을 수 없었지. 그 아인 산 채로 그런 꼴로 죽어버렸던 거야! 그리고 내 딸에게 그 짓거리를 한 괴물 놈도 보이지 않자 난 피 바닥에 놓여 있던 고서로 그 새끼를 다시 부르려고 했지. …괴물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리고 난 잠시 뒤 그곳을 떠났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으니깐.
나무에 밧줄을 매는 동안 떠올려 보았어. 딸아이가 태어났던 날을. 학이는 날 때부터 고진과 겁살의 명에다가 살심 또한 타고나 평생 혼자 살며 목숨을 위협받거나 혹은 누군가를 해치게 될 운명이었어. 반드시 그렇게 될 터였지.
하지만 아내가 말했어. 괜찮을 거라고. 나와 자기가 있으니 학이는 괜찮을 거라고.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그런 잔혹한 일들은 없을 거라고. 학이는 우리가 줄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될 거라고. 그러면 전부 다 괜찮을 거라고.
그리고 아내의 말이 맞았어. 시간이 지나며 내가 우려했던 일들은 전부 빗겨 나갔지. 학이는 불행한 악귀 같은 게 아니라 그저 가족의 애정에 행복해하는 평범한 아이였어. 그리고 아내가 떠난 후 나에게 자신이 받았던 것을 그대로 갚으려고 했었지. 학이는 그런 딸이었어. 그런데 내가 그 아이를 외톨이로 만들고 마지막엔 죽도록 만들었지. 아이의 잔혹한 명운을 이룬 게 다른 이도 아닌 미친 친아빠였던 거야. 바로 그 아이를 지켜야만 했던 아빠가 말이야!
그래서 난…, 난….”
말을 끝내 잇지 못하는 나에게 여자가 조용히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 손 위에 자기 걸 포개며, 자기 의사를 드러냈다. 그녀는 날 위로해 주고 싶어 했다.
난 그녀에게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창밖에는 이제 폭우가 퍼붓고 있었고, 집의 부서진 틈으로는 세찬 바람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 여자의 품속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녀의 존재만이 가장 뜻깊은 것으로 느껴졌으니깐. 마치 오래전에 잃었던 소중한 것을 되찾은 듯 것처럼.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응?”
“당신과 함께 있으니 뭔가 기시감 같은 게 느껴져. 예전에도 만났던 것처럼 말이야. 당신에게서 그리운 무언가가 느껴져. 그런데 우리가 서로 알고 지냈을 리 없어. 당신 모습 좀 봐. 마치 전설의 선인을 빼다 박았잖아.”
난 그녀가 이번에도 ‘말했잖아, 난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야.’라며 코웃음 치는 걸 상상했다. 그 대신 여자는 여전히 나에게 자신의 품을 허락해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순간 기침이 나오자 난 결국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것도 후유증이야?”
난 기침을 막으며 그렇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서 저것들이 여기 있는 거네.”
그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약초들을 가리켰다.
“왜 저렇게 내팽개쳐둔 거야?”
“필요 없으니깐. 내 몸이 계속 엉망이길 원하니깐.”
“대체 뭣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으니깐.”
그녀가 애수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친구, 내가 해쳤던 친구가 날 구해줬어. 나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도 내가 걱정되어 성치 않은 몸으로 날 쫓아왔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거지. 죽다 살아난 거라 정상은 아니지만. 의사의 말로는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만 완치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데. 저 약초들을 계속 복용하지 않는 한 고통은 계속될 거라며 말이야.
그리고 명준이가…. 아, 그러니깐 내 친구가 그동안 학이를 나 대신 돌봐주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는 우리 두 부녀를 구해준 은인인 셈이지. 그리고 난 그에게 했던 짓이 너무 부끄러워 그를 피하며 지냈어.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었어. 천암군들이 와서 나를 심문했지. 결론만 말하자면 심신장애로 여겨져 내가 잡혀 들어가는 일은 없었어.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손가락질했고, 이웃들은 나를 저주하며 마을을 떠났지. 사실 그 일들은 그리 괘념치 않았어. 마땅한 처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깐. 그리고 이렇게 매일 고통 속에 사는 거, 이것이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야.”
그렇게 내 이야기가 끝났다. 난 한 번 여자에게서 나를 향한 분노나 비난의 기색을 찾으려 했지만 즉시 그게 바보 같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채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궁금했던 것들 전부 알게 되었네. 이 마을, 당신의 흉터, 그리고 당신 가족사에 대해서 말이야…. 그러니 이번엔 내가 당신이 모르는 걸 알려주고 싶어.”
“응?”
“당신이 모르는 걸 알려주겠다고. 듣고 나면 죄의식이 좀 줄어들지도 몰라. 당신이 행한 짓이 본인의 뜻으로 한 게 아니라면 어떨 것 같아?”
곧 적막만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이야기를 못 따라가는 날 기다리지 않은 채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거지만 마신들이 죽을 때 생기는 삶에 대한 집념은 물건 같은 거에 기생해.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바로 재앙신의 집념이 사람들의 집념을 더 악화시키는 거야. 모두가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심히 몰린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게 돼. 당신이 바로 그랬지. 아내 살리려고 계속 떠돌아다녔잖아? 그 1년 동안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고서의 마신을 불렀을 때 곧이곧대로 따른 것도 바로 그래. 딸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실제로 마신의 잔재에 의해 정신이 오염되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며칠 뒤,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도 그냥 잔재가 완전히 사라져서 그랬던 거고. 들어보니 어때,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잡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학이가 더욱 비참한 이유로 죽었다는 게 되니깐. 잔혹한 운명이 원망스러운 나머지 온몸이 더 심하게 떨렸다. 숨이 더 가빠지고, 머리가 핑하며 어지러웠다. 난 결국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여자가 그런 나에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연민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이러면 계속 혼자서만 괴로워하는 꼴이야. 제대로 살고 싶지 않아, 예전처럼?”
“싫어, 나 좀 내버려 둬. 내가 이 고생을 자처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빌어먹을, 이해가 안 돼? 죄다 내 잘못이야! 어쨌거나 학이는 나 때문에 죽었어! 대체 왜 내 인생을 뒤집어 놓지 못해 안달인데!”
“그야, 당신이 자기 잘못도 아닌 걸로 자신을 해치고 있으니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있으니깐.
…난 그게 싫어. 내가 당신을 도울 거야. 당신이 날 도왔듯이.”
“대체 무슨 헛소리야? 난 도움 같은 거 준 적 없어!”
“아, 당신은 이미 그랬어.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상상도 못 할 거야.”
“방금 뭐라―”
“이게 뭔지 알아?”
여자가 내 말을 끊고 자신의 머리채를 들어 올리며 등을 돌렸다. 자신의 고혹적인 몸에 교차로 묶여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호흡이 고르지 못한 내가 힘들게 물었다.
“끄, 끈?”
“그래, 붉은 끈이야. 단순히 색깔이 빨간색인 끈은 아니지. 이건 내 몸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뜻깊은 물건이거든. 재밌게도 우리들은 닮았어. 서로가 과거의 흉터와 후유증을 지닌 채 살아왔거든. 우리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야. 당신의 목이 당신에게 일어났던 불행의 흔적이라면 이 붉은 끈은 내 불행의 흔적이지. 이게 바로 내 흉터야.”
여자가 머리채를 다시 내린 후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릴 적에 내가 괴물에게 먹히도록 버려졌을 땐 난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지. 겁에 질려 뭘 해야 할지도 몰랐어.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으니깐. 곧 입맛을 다시던 괴물이 나를 덮치려 할 때 나에겐 한 가지 생각만 있었어.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반드시 돌아와 나를 구해줄 거라고. 그야 우린 가족이니깐. 가족은 결코 서로를 버리지 않으니깐. 그렇게 앞으론 함께 지내며 살게 될 거라고. 둘이서 행복하게 말이야.
그러니 난 살아야만 했어. 그러자 전에는 가져본 적 없던 감정들이 솟아나더라. 나를 해치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 그들을 없애고 싶어 하는 증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어.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한껏 모여 뒤엉킨 후 나에게 싸울 힘을 주었지. 난 어머니의 유품인 비수를 품에서 꺼낸 후 괴물에게 달려들었지. 그제야 놈도 자기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내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괴물 꼬마란 게 밝혀졌으니 말이야. 우리 둘은 서로 살기 위해 싸웠지. 그렇게 3일이 지났어. 결국 살아남은 건 나였지. 괴물은 쓰러진 후 겁먹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죽을 일만 기다리고 있었고. 너무 지쳐있었지만 난 기쁘게 그놈의 숨통을 끊어 놓았어. 시체가 연기가 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 난 막연한 기대를 한 채 웃으며 뒤돌아보았어. 하지만 내 행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지옥 같던 3일 동안 날 포기하지 않게 했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난 힘이 다해 정신을 잃었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울면서 생각했어.
그 사람은 결국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고.
그 후에, 난 날 구해준 은인들과 지내게 되었어. 그들은 내가 속세와의 연을 끊는 조건으로 나에게 살 방법들을 가르쳐 준다고 했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끈이야. 나를 걱정해준 그분들이 나를 위해 점을 친 후 나에게 준 물건이지. 그러면서 그분들은 나에게 당부했어.
난 고진과 겁살, 그리고 살심의 명을 지녔다고. 앞의 두 고난 중 하나만 있어도 끔찍한데 난 세 가지의 불행을 타고났으니 내가 걱정된다고. 내가 그때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겪거나 혹은 행할지도 모르는 불행들은 전부 이것들 때문이라고. 그분들은 이 끈에 주술을 걸며 나에게 건넸지. 이것으로 내 영혼을 묶어 내 사나운 팔자들을 억누를 수 있다고, 이게 나 자신과 남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말이야. 체념에 빠진 난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그게 내 운명을 바꾸었지. 끈은 확실히 나를 지켜주었어. 이것을 내 몸에 묶고 있는 한 내 불길한 운명과 살기는 최대한 억눌러졌지. 하지만 곧 이것이 다른 것 또한 그렇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어. 바로 내 감정을 말이야. 이걸 묶은 후 난 결코 예전처럼 살 수가 없게 되었어. 모든 것이 하찮고 부질없게 느껴지게 되었거든. 끈은 내 몸을 지켜줄지는 몰라도 내 영혼을 죽이기 시작했지. 당신이 망가진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면 난 반대로 망가진 영혼을 가지게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요즘 와서는 더 이상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 ‘난 버림받았던 날에 이미 죽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도 했었지. 그러자 기억 깊숙이 파묻혀 두었던 한 사람에게서 희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어.
그리움.
이 끈도 억누를 수 없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첫 감정이었지.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어. 내가 다른 감정들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예전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니야.
“그래서 오늘 여기로 돌아올 생각이었던 거지. 사실 오면서 계속 불안했어. 다시 내 희망이 배신당할까 봐 걱정되었거든. …결국엔 돌아오길 잘했던 것 같아.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으니깐. 당신이 나를 그리워했으니깐. 당신이 나를 다시 살리고 있으니깐.”
거짓말이야.
“그래도 날 어머니로 착각했을 때는 화가 나더라. 그때 그냥 다 잊고 되돌아갈 생각도 했거든. 솔직히 처음부터 알아보아야 했던 거 아니야?”
이게 사실일 리가 없어.
“안녕, 아버지. 오랜만이야.”
학이가 나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채로.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났는데도 내 끔찍한 몸이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었던 건 떨리는 손을 딸에게 뻗을 뿐이었다. 학이가 내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가져갔다.
“아버지, 난 살아있어.”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옛날 일로 괴로워하지 마. 더 이상 자신을 자책하거나 해치지도 말고.”
‘…괜찮을 거예요.’
“내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야.”
‘제가 계속 있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이번엔 그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처방전을 보여주기도 전에 미리 꺼내놓았던 약을 건네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고 나가려 하자 아규가 나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러라고 답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거예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치료를 거부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이렇게 바뀌셨잖아요?”
“딱히 별것 아니야. 그냥 누군가가 말했거든. 내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데. 더 이상 옛날 일로 괴로워하지 말라고. 다시 제대로 살아보라고. 그게 다야.”
난 어안이 벙벙한 아규를 내버려 둔 채 나가려 했지만 떠나려니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결국 내 양심이 내가 그를 부르게 했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말하지. 자네는 그동안 날 도우려고 했던 건데 내가 항상 ㄱㅈㅅ처럼 굴었어.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네.”
불복려의 계단을 절반 정도 내려갔을 때 내 앞에서 다급히 사라지는 인영을 발견했다. 난 그걸 놓칠 새야 부리나케 그림자의 주인을 쫓아갔는데 사방에서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흉측한 흉터의 사내가 연약한 여자아이를 해코지하지 않을까 봐 말이다.
난 달리는 걸 멈추고 아이를 불렀다.
“잠깐, 기다려. 화내려는 게 아니야. 그냥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그제야 아이는 도망치는 걸 관뒀다. 의아한 눈을 뜨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헉헉거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미안하다. 저번에는 아저씨가 너무 못되게 굴었지? 넌 그저 날 도우려고 했던 것뿐인데, 아픈 사람을 지나칠 수 없었던 착한 아이였을 뿐인데. 내가 그러지 말아야 했어. 이런 말 해도 소용없는 거 알지만 아저씨가 정말 미안했단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겠니?”
난 그렇게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이는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곧 아이가 꺽꺽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난 아저씨가 너무 걱정되었단 말이야. 아저씨가 몸 말고도 마음도 아픈 것처럼 보였어. 그때 너무 화가 나 있었으니깐.”
내가 재차 사과하자 아이는 “응, 응”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그럼 이제 다 괜찮은 거야?”
“그래, 난 이제 괜찮단다, 아ㅇ―.”
“내 이름은 팥쥐야.”
“아, 미안하구나. 아저씨는 이제 괜찮단다, 팥쥐야.”
내가 정정하자 아이는 내 말에 기쁜 듯 제자리에서 뛰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앞으론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야 이제 봄이잖아. 더 이상 겨울비는 내리지 않을 거야.”
난 천장에서 비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맞으며 눈을 떴다. 폭우가 쏟아졌던 곳에는 이제 고요한 바람과 새들의 지저귐만이 남아 있었다. 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이는 없었다.
집에는 여전히 나 혼자만 있었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딸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난 기가 막힌 내 처지를 자조하며 웃었다. 결국 그게 내 꿈이었다고? 죄책감에 고달파진 내 잠재의식이 살기 위해 멋대로 만들어 낸 대단한 환상이었던 걸까? 난 곧 간헐적으로 터질 기침을 예상하며 입을 막았다.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난 약간 당황하다 평소랑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뭔가 기분이 좋았다. 정확히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열이 내려갔으며, 사시나무 떨 뜻한 떨림도 이젠 잦아들었다. 마치 온몸이 멀쩡해진 기분이었다.
난 황급히 어제 받은 약초들을 찾으려다 마침내 그것들의 마지막 행방을 떠올랐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학이가 나에게 약초들을 건네줬던 것을.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 보았다. 부서진 집을 다시 고쳤다. 오랜만에 명준이를 찾아가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꾸준히 약들을 먹었다. 그렇게 다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어느새 천형산의 천연교를 지나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 구름에 달이 가려져 있었지만, 집이 바로 앞이라 빛에 의지할 필요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어둠 속에 홀로 걷다 보니 내 삶을 바꾼 계기에 대해 다시 의문을 가졌다.
그날 있었던 일이 정말 사실이었다면 학이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어째서 사라진 거고? 그 아이를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그때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온 사방을 밝혔다. 집 앞 갈림길 저 너머에서 한 여자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백발의 여자가 빛을 등진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난 집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묵묵히 그녀가 올 때까지 길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곧 학이가 그런 날 보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어째서 밖에서 서 있는 거야?"
난 대답 대신 딸아이의 얼굴에 조심히 내 손을 갖다 댔다. 따뜻했다. 생명의 증후였다. 학이는 이젠 이런 내 반응에 진저리가 났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거 못 믿겠어?"
“그야, 네가 사라졌으니깐.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꿈만 같았어. 지난 몇 달 동안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고.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니?”
“말했잖아. 날 구해준 은인들이 있었다고. 그분들과 함께 지내면 이렇게 함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어. 그래서 그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거야.”
“대체 그 은인들이란 자들이 누군데? 그리고 너 머리는 대체 왜 이런 색으로 변한 거야?”
“언젠가 전부 설명할게. 아버지는 듣고 나서 분명 놀랄 거야.”
학이가 해후 후 처음으로 나에게 웃어 보였다. 어렸을 적처럼.
“뭐, 시간이야 많잖아. 우리들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거니깐, 안 그래?”
학이는 나를 지나쳐 집을 향해 올라간 후 대문 앞에서 내가 오는지 돌아보았다. 난 곧바로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내가 죽었다. 지독한 병이 남긴 것은 두 개였다.
홀아비와 딸.
둘만 남게 된 집에서 딸이 아비에게 물었다.
‘어머니 어디 있어요?’
죽었어.
‘죽었다는 게 뭐예요?’
이제 없다는 거야. 다시는 못 본다는 거야.
‘아버지, 많이 슬퍼요?’
그래, 슬퍼. 하지만 괜찮아. 네가 내 곁에 있으니, 난 괜찮을 거야.
전부 괜찮을 거야.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