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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보드게임 세키가하라 와 일본역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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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가하라> 기획기사로 돌아온 [GM]찰리입니다. <세키가하라>의 출시를 앞두고 미리 알고 즐기면 더 재미있는 정보들로 이번 기획기사를 채워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기사 시리즈를 먼저 보시고 <세키가하라>를 즐기면 더 재미있는 게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 일본사 입문하기

일본은 이웃 국가지만 일본사는 생각만큼 친숙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지라는 최고의 입문 서적이있고 여러 고전과 사자성어로 친숙한 중국사와는 달리 일본사는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배울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습니다. 또한 요즘은 모르겠지만, 저희 때에는 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국사나 세계사 수업 시간에 동아시아사는 일본보다는 중국의 비중이 더 높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사에서 중국의 영향이 일본에 비해 매우 컸던 만큼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유럽사보다도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일본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친숙하지 않은 일본사인데, 중국사보다 입문 난도를 높이는 요소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사는 인명과 지명을 한국식으로 읽지만, 일본사는 일본식으로 읽기 때문에 생소하여, 쉽게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물론 예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한국식 독음인 풍신수길로 읽고 도쿄를 동경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그런 경향이 거의 없죠(이상하게 저는 여전히 홋카이도는 북해도가 더 편하기는 합니다. 음절이 더 적어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중국어나 일본어의 한자 독음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주제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래서 일본사를 배우기에 앞서 우선 지명에 익숙해지고 가야겠습니다. 역사 이야기에 앞서 지리 이야기부터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본의 고대사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마테라스부터 이어지는 장황한 이야기를 할 것은 아니고, 일본인들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일단 일본의 지리를 알아야 하니, 지리 이야기부터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리를 보면 대략적인 역사의 흐름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2. 일본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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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지도,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독도이고 빨간 선은 부속 도서의 국경을 나누기 위해 표시했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빨간색 선 안쪽이 일본 영토이고 바깥쪽은 다른 나라의 영토입니다. 지도 우상단을 보면 북해도와 가까운데 일본 영토가 아닌 섬이 보입니다. 저기가 쿠릴 열도에 속하는 쿠나시르 섬입니다. 러시아의 영토인데, 이 지역 역사도 제법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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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지도, 대만 옆에 있는 빨간 선 옆에 빨간 점선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센카쿠 열도입니다.)


윗 지도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이고 아래 지도의 오키나와가 포함된 난세이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까지가 일본의 영토입니다(나하시가 있는 곳이 오키나와 본섬입니다). 하지만 오키나와나 오가사와라 제도가 일본에 병합되는 것은 근대의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이라는 별개의 국가였고, 오가사와라 제도는 17세기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던 무인도였습니다. 

일본은 수많은 섬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 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섬은 네 곳으로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입니다. 첫 번째 지도에서 보이는 섬들이지요. 일본 국토교통성은 여기에 오키나와 본섬을 추가해 일본의 5대 본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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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 어스)

 
일본의 영토는 한반도 이상으로 산지가 많습니다. 한반도의 국토의 70%가 산지인데, 일본은 71%이니 상당한 수준인 것이지요. 이 때문에 산맥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분리되고, 섬나라인 만큼 육지보다 해상을 통한 교류가 더 유리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도시는 흥미로운 구도로 발달하게 됩니다. 지도를 보면 어디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일본의 각 지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일본의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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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일본의 지방은 위와 같이 나뉩니다. 이 지방은 실재 행정구역은 아니고 땅을 나누는 관습적인 개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쉽게 말해 영남이나 호남과 비슷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준에 따라 어떤 지방은 여기에 속했다가 저기에 속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하는 지방이라는 개념은 문화권 내지는 생활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본 법에서 정하는 법정 행정구역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혼슈를 제외한 다른 섬들은 섬 하나가 하나의 지방입니다. 



 1)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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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 어스)


오키나와 지방을 설명하려면 결국 난세이(南西) 제도 전부를 설명하는 편이 좋겠다 싶어서 결국 난세이 제도 지도를 가져왔습니다. 난세이 제도는 남서쪽 섬들로 사츠난(薩南) 제도(빨간색), 류큐(琉球) 제도(노란색), 다이토(大東) 제도(초록색)로 나뉩니다.

사츠난 제도는 사쓰마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사쓰마는 규슈 남쪽의 가고시마현을 의미합니다. 가고시마현을 과거에는 사쓰마라 불렀습니다. 사츠난 제도는 위에서부터 오스미 제도(1), 토카라 제도(2), 아마미 군도(3)로 나뉩니다(사진상으로 토카라 제도가 잘 보이지는 않을 텐데, 자세히 보면 작은 섬 두 개가 보입니다). 사츠난 제도는 행정구역상 가고시마현에 속합니다.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에 더 가깝지만 가고시마현에 속하는데,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역사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일본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기회가 없을 듯 하니, 오키나와 역사는 이 장에서 간략하게 다뤄보겠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본격적인 문명이 시작된 것은 11~12세기의 일로 고려 왕조의 중기에 해당합니다.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매우 늦은 편이지요. 물론 그 이전부터도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있지만, 문명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문명을 일으킨 인류는 원주민들이 아니라 이 시기에 오키나와로 넘어온 외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농업과 철기를 가져오며 이 지역에 문명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류큐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보면, 이들의 주류는 일본계로 보입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성이 세워지고 도시가 생기면서 오키나와의 성읍국가 시대가 열렸고, 이들이 서서히 세력이 모여 삼국시대를 거친 끝에 1429년 통일 류큐 왕국이 세워집니다(이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이 농사직설을 간행했고 유럽에서는 잔 다르크가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통일된 류큐 왕국은 1500년대에 들어서며 주변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이렇게 손에 넣은 강역이 위 지도에서 빨간색 3번과 노란색 2번입니다. 이 섬들에 대한 류큐 왕국의 지배는 가혹했는지 반란 기록이 다수 확인됩니다. 

하지만 류큐 왕국의 패권은 한 세기만에 사쓰마번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사쓰마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입으로 인해 규슈 통일에 실패한 후 남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1609년 오키나와섬을 침공하여 류큐 왕국을 종속국으로 만들고 아마미 제도를 직속 영지로 삼습니다. 이것이 아마미 제도가 오늘날까지도 가고시마현에 속한 이유입니다.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은 이유는 황제의 책봉을 받은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를 자극하느니, 종속국으로 남겨서 독자적으로 중국과 무역하는 창구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가 일본 영토가 되는 것은 후대인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은 다른 여느 식민지와 동일하게 오키나와를 대했습니다(한국인들이라면 이것이 오키나와인들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키나와는 일본의 본토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본 제국이 오키나와를 어떻게 취급했느냐는 다른 국가들 입장에서는 쉽게 알기 어려운 점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일본 제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절하게 응전했던 일이 미국 입장에서는 본토에 상륙하여 점령하는 것은 더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후 오키나와는 미군이 점령한 이래로 1972년까지 미국의, 정확히는 미군정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미군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듯 이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피해로 인해 반대 여론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군정이 짧았고 이후에는 주권국가였음에도 미군기지로 인한 문제가 이슈가 되었는데, 오키나와는 아예 미군정 치하였으니 그 정도가 더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도 높아진 국력을 바탕으로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여론이 생겼고, 결국 1972년에 오키나와를 비롯한 류큐 제도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됩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여전히 이 지역에는 미군기지는 남아있습니다. 오키나와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될 당시에 오키나와의 독립을 원하는 여론은 24.9%였다고 합니다. 명분이야 있지만, 일본은 물론 미국 입장에서도 확고한 동맹국의 영토로 넘기는 편이 유리했고 오키나와 주민들 입장에서도 이미 당시에 세계적인 대국이었던 일본에 편입되는 편이 유리하다고 보는 의견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일본은 오키나와를 비롯한 난카이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더하여 태평양까지 영해를 넓혔습니다. 어쩌면 섬의 영토적 가치를 가장 잘 아는 나라가 일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도를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지요.



 2) 홋카이도(北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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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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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jrhokkaido.co.jp/global/korean/travel/distance.html)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혼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입니다. 전체 면적이 남한의 80%에 달할 정도로 큰 섬이지만, 인구는 고작 520만 명에 불과합니다. 우리말로는 북해도라고도 많이 부르는데, 이 때문인지 일본 명칭에 혼돈이 간혹 있기도 합니다. 후+ㅅ카이도가 아니라 호+ㅅ카이도가 맞는 표기임을 이번 기회에 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홋카이도의 주요 도시로는 삿포로와 하코다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이 두 도시가 왜 홋카이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인지를 쉽게 알 수 있겠지요? 하코다테시는 혼슈와 가까운 도시고, 삿포로시는 홋카이도에서 가장 좋은 땅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두 도시는 관광지로도 유명하여 한국에서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홋카이도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인 15세기부터입니다. 그 이전부터도 소규모로 넘어간 기록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 세력이 들어서는 것은 다케다 가문의 분가가 넘어가서 번을 세운 이후부터입니다. 이 가문은 번을 세운 후 카키자키로 성을 바꾸었다가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며 마츠마에로 다시 성을 바꾸었습니다. 이 마츠마에 번이 오늘날 홋카이도의 시초였습니다.

당시의 농업 기술로는 홋카이도에서 농사를 짓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츠마에 번의 주요 수입은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인과의 무역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꾸준히 홋카이도 북쪽으로의 개척도 시도하여 아이누인과의 마찰도 빚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17세기가 되면 홋카이도는 주변국에게도 일본의 영토로 인정되었습니다. 

오늘날 홋카이도는 옛날과는 달리 일본 농업의 주축이 되는 지역입니다. 이는 메이지 유신 때부터 시작된 홋카이도 개발로 인한 것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홋카이도는 남부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불모지였던 상황이었는데, 러시아가 영토를 사할린과 쿠릴열도까지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부터 이미 러시아와 일본은 이 일대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홋카이도가 탄탄해야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지킬 수 있던 것이죠. 

그래서 당시 미국 농무부의 컨설팅을 받아 이 지역을 미국식 밭농사와 축산업에 기반해 개척하기로 합니다. 이 시기에 홋카이도 개척을 위한 중심도시로 세워진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삿포로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삿포로 맥주도 이 시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개발되었지만, 삿포로는 오늘날 일본에서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뒤를 잇는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은 이 지역 원주민인 아이누인에게는 서부개척시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생활 터전을 송두리째 뺏기는 일이었습니다. 홋카이도가 개척되면서 이들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동화되거나 더 북쪽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3) 시코쿠(四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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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시코쿠는 우리말로 읽으면 사국으로 과거 일본이 율령국 체제일 때 이곳에 율령국이 넷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코쿠의 지형은 섬 전체가 산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린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일본의 본토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간단히 말해 프로야구팀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어서 프로야구팀이 홈으로 삼을만한 대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 일본의 중심지가 칸사이 지방이던 시절에는 수도와 가깝고 세토 내해의 교통 기능이 더 컸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더 영향력이 있는 지방이었습니다. 그때도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상업적으로 번성할 여지는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1시 방향의 카가와현은 과거에 교통의 요지로 취급받아 항구도시가 발전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이 바로 우동으로 유명한 사누키입니다. 그 밑의 도쿠시마현은 중앙 정권과 가까웠으며, 염료인 쪽(청출어람의 그 藍입니다)이 특산물이라 염료 산업을 중심으로 상업과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11시 방향의 에히메현은 과거에는 이요라 불리던 곳으로 일본에서도 해군으로 유명했던 지역입니다(이 시대 일본의 해군은 사실상 해적이나 다름이 없기는 합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 지역의 다이묘였습니다.

한편 그나마 세토 내해에 접한 다른 지방과는 달리 태평양에 접한 고치현의 옛 이름은 도사로 시코쿠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다른 지역과 교류도 어렵고, 나름대로 평야는 있지만 물이 부족하여 농사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부 말기에 사카모토 료마라는 도사번 출신의 명사가 등장하며 일본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비록 국력은 조슈나 사쓰마에 비해서는 밀렸지만,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활약한 덕분에 메이지 유신을 이끈 4대 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지요(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딱히 이 지역이 더 발전하거나 혜택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고치현에서 유명한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도사견입니다. 이 지역에서 투견이 성행했기 때문에 개항 이후 해외의 대형견과 전통견인 시코쿠견을 교배하여 강한 투견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4) 규슈(九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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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 어스)


규슈를 우리말로 풀어쓰면 구주로 이 지역에 과거에는 율령국 9개가 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나가사키나 후쿠오카 같은 도시가 보일 것입니다. 특히 후쿠오카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대도시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거리(약 325km) 보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의 거리(약 215km)가 더 가까울 정도입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후쿠오카에서는 서울이 도쿄보다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가깝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 이 지역일 것입니다. 사실상 일본의 문명이 처음 시작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일본에서 문명이 어느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느냐는 두 가지 가설이 대립하는 중입니다. 규슈설과 간사이 설이 있는데, 이 얘기는 역사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간사이 지방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규슈는 금세 일본의 변방으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변방일지라도 해외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세계가 변하는 시점에 가장 먼저 반응을 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서양이 대항해시대를 맞아 동아시아까지 진출했을 때의 무역 창구가 바로 이 규슈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규슈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도 먼저 선진 문물을 수용하며 일본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시코쿠와는 반대의 운명을 걸은 셈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규슈에 풍부했던 탄광 덕분에 규슈는 일본 근대 공업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특히 석탄과 화학공업이 발달했는데, 그로 인한 폐해도 있었습니다. 유명한 산업재해인 미나마타병이 바로 이 규슈 지역에서 발병했던 병입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신흥 공업국이 성장하면서 규슈의 탄광 및 화학공업은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규슈는 홋카이도처럼 농업과 관광업을 중심으로 지역의 산업을 개편하는 중입니다. 
 



 5) 혼슈(本州)
 
 혼슈는 근본 본에 고을 주자를 씁니다. 일본의 모든 섬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섬이라는 뜻이지요. 일본 중심에 있는 가장 큰 섬이며,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섬이기도 합니다. 혼슈의 면적은 영국의 본섬인 그레이트브리튼 섬은 물론 한반도보다 큽니다. 또한 지형이 활처럼 휘어 있어서 섬 내에서의 거리가 면적에 비해 긴 편입니다. 구글 지도에서 영국 남쪽에 있는 수도인 런던에서 북쪽 끝자락의 대도시인 인버네스까지의 거리는 900km인데, 혼슈 서쪽의 대도시인 히로시마에서 수도 도쿄까지의 거리가 이와 비슷한 812km입니다. 그리고 도쿄에서 북쪽 끝 대도시인 아오모리시까지의 거리도 도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700km가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히로시마부터 아오모리까지의 거리는 1,305km인데, 베이징과 상하이의 거리가 1,200km가 조금 안되니 물리적으로 굉장히 먼 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섬 하나가 하나의 지방인 다른 섬들과는 달리 혼슈에는 5개 지방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혼슈에 속하는 각 지방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① 주고쿠(中国)

 주고쿠는 중국이라는 뜻으로 나라 중국과 한자가 같습니다. 혼슈에서도 서쪽 끝에 있는 지역을 중국이라 부른 이유는 교토를 수도로 삼은 고대 일본에서 수도와 가까운 지방을 가까울 근자를 써서 킨고쿠(近国), 먼 지방을 멀 원자를 써서 엔고쿠(遠国)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토 동쪽에도 주고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킨고쿠와 엔고쿠는 사어가 되었지만, 주고쿠는 오늘날까지도 이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고쿠 지방의 주요 도시로는 그 유명한 히로시마, 한국에서는 말장난으로 유명한 혼슈 서쪽 끝의 시모노세키, 우키타 히데이에의 거성이었던 오카야마 성이 있는 오카야마가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지금 나온 주고쿠 지방의 큰 도시들이 모두 섬 남쪽에 있다는 점입니다. 주고쿠 지방 북쪽의 제일 큰 도시는 마츠에시인데 인구가 20만에 불과하고 나머지 지역의 인구 밀도도 매우 낮습니다. 이는 지형도를 보면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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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기타큐슈 바로 윗 도시가 시모노세키입니다.)

 


 주고쿠 지방은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산맥으로 남북이 갈린 형태입니다. 산맥으로 동서로 나뉜 강원도와 비슷한 상황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만한 평지도 북쪽보다는 남쪽에 더 많습니다. 또한 세토내해를 통해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용이한 남쪽과는 달리 동해를 접한 북쪽은 딱히 교류를 할 지역이 있지 않습니다. 한반도와의 교류 면에서도 한반도 남부에서 남해를 통해 규슈나 주고쿠 지방 서쪽으로 가는 것이 훨씬 가깝고 쉽습니다. 그래서 주고쿠 지방은 강원도가 영동과 영서로 나뉘듯 산맥을 중심으로 산요(山陽)와 산인(山陰)으로 나뉩니다. 두 지방의 이름은 뫼 산(山)자에 각각 볕 양(陽)과 그늘 음(陰)을 붙인 것으로 이름에서부터 두 지방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두 지방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동아시아권에서 음양오행설에 따라 지명을 붙일 때의 관습을 따른 것입니다. 산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그늘이 지고 남쪽에는 볕이 들기 때문인데요(그래서 우리가 아파트를 살 때도 남향을 중시하는 것이지요), 지방의 운명이 이름을 따라간 것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② 간사이(関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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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 어스)



 저는 아직도 간사이보다는 관서가 입에 붙는 옛날 사람입니다. 요즘 한국 분들이 여행을 많이 다니는 지방이지요. 저도 6월에 오사카에 다녀왔었습니다.

 관은 관문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그 유명한 함곡관이나 메뚜기가 서식하는 호로관과 같은 곳들은 산과 강을 끼고 세워진 천혜의 요새였지요. 

 그렇다면 관서 지방의 관은 어디일까요? 지도에서 빨간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곳이 보이시나요? 두 산맥 사이에 있는 협곡, 저곳이 바로 세키가하라입니다. 과거에 이곳에는 후와노세키(不破関)라는 관문이 있었습니다. 이름부터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듯인 불파관이 붙을 정도였으니, 일본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중요한 관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관문은 일본의 주요 가도 중 나카센도가 지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 외에도 후와노세키 남쪽의 스즈카노세키(鈴鹿関)와 북쪽의 아라치노세키(愛発関)가 고대 일본의 삼관으로 꼽혔습니다. 훗날에는 교토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인 아지자카세키(逢坂関)가 아라치노세키를 대신해 삼관으로 꼽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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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 위키피디아)




 따라서 관서라는 지명은 앞서 언급된 관문들의 안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견 관서지방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가현 북쪽 산 너머의 일부 지역은 관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지요. 과거 일본의 수도는 교토였기 때문에 저 관문 안쪽이 수도권이라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관서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 다 풀었으니, 이제부터는 일본식 명칭인 간사이라는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간사이라는 말은 일본의 중심이 간토(관동) 지방으로 넘어간 에도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인 말입니다. 그전에는 이 지방을 긴키(近畿)라고 불렀습니다. 가까울 근(近)에 경기 기(畿)자로 수도권에 가까운 땅이라는 뜻이지요. 경기도의 기도 동일한 한자를 씁니다. 수도권에 해당하는 기나이(畿內)에는 교토, 나라, 오사카가 포함됩니다. 그리고 긴키에는 그 주변에 있는 효고현, 와카야마현, 시가현, 미에현이 긴키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미에현은 관문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키에 포함되는데, 오늘날 간사이 지방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면 이 점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과거 일본의 중심이 교토일 때는 산맥으로 가로막혀있음에도 간사이 지방과의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인들이 동쪽을 개척하고 일본의 중심이 간토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산맥 때문에 교통이 불편한 서쪽보다는 동쪽과 교류가 많아진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간사이가 아니라 주부 지방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당장 주부 지방 최대도시인 나고야가 미에현 바로 동쪽에 있습니다

 간사이 지방은 한 때 일본의 중심이었던 곳이고, 오늘날에도 수도권인 간토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간사이를 대표하는 도시는 역시 오사카로 도쿄에 버금가는 일본의 제2도시입니다. 오사카는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와 교토의 외항으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수도의 외항인 만큼 일본 경제의 중심지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후 이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정치의 중심지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일본의 중심지가 간토의 에도(오늘날의 도쿄)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중심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는 지킬 수 있었기에 오늘날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도시로 남았습니다. 

 오사카가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라면, 교토는 일본의 고도(古都)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도시입니다. 나라 시대와 메이지 유신 이후를 제외하면 일본의 수도는 언제나 천황이 있는 교토였습니다. 물론 막부 시대에는 막부의 본성이 있는 도시가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황이 있는 교토는 일본의 정신적인 수도였습니다. 물론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며 도시가 몰락하기도 했지만, 천황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정치적 중요성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도가 이름을 도쿄로 바꾸면서 공식적인 수도가 되면서 교토의 정치적 중요성은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③ 주부(中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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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주부 지방은 간사이와 간토 사이에 있는 혼슈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간결하게 중부인 것이지요. 그래서 스크린샷에 좌우로 간사이와 간토 지방이 찍힐 수 밖에 없어 빨간색으로 주부 지방의 경계를 표시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역시나 산맥을 기점으로 지방의 경계가 나뉩니다. 또한 주부 지방도 산맥으로 권역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부 지방의 산맥은 북쪽에서부터 히다 산맥, 기소 산맥, 아카이샤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들은 해발 3,000m 고봉들이 이어져 일본 알프스라고도 불립니다. 지형이 이러다 보니, 주부 지방은 산맥으로 나뉜 생활권에 따라 세부 지방으로도 나뉩니다.

 첫 번째는 남쪽의 도카이(東海) 지방입니다. 기후현, 아이치현, 시즈오카현에 나고야 영향권에 있는 미에현까지가 도카이 지방으로 분류됩니다(일본 입장에서 보면 남쪽이 동해라고 볼 수 있으니, 동해 지방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주부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나고야가 있는 지방이고, 평야 지대가 넓어 사람이 모여 살기 좋은 곳입니다. 특히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다이묘 3인방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두 나고야가 있는 아이치현 출신이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두 번째는 북쪽의 호쿠리쿠(北陸) 지방입니다. 북쪽의 육지라는 뜻으로 후쿠이현, 이시카와현, 토야마현이 포함되며 니가타현은 포함하기도, 포함하지 않기도 합니다. 비교적 가까운 나머지 세 현에 비해서 니가타현의 중심은 많이 북쪽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는 보드게임으로 유명한 카나자와시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고신에쓰(甲信越) 지방입니다. 이 이름은 여기에 속하는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니가타현의 옛 지명인 가이(甲斐), 시나노 (信濃), 에치고 (越後)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부울경과 비슷한 작법인 것입니다. 지형만 봐도 알겠지만 이 지역들은 수도권인 간토 지방과 가깝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나 교류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니가타가 호쿠리쿠 지방으로 빠지기도 하고, 야마나시는 아예 간토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일 것입니다. 


④ 간토(関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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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아까 설명드렸듯 야마나시현은 간토 지방으로도 분류되지만, 저는 주부 지방으로 분류하겠습니다.)



 제게 간사이보다 관서가 더 익숙하듯 간토 역시도 관동이라는 말이 더 익숙합니다. 관동이라는 말은 관의 동쪽이라는 뜻인데, 이 관은 본디 앞서 간사이 지방 부분에서 설명드렸던 삼관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삼관 바로 동쪽은 주부 지방이고, 간토(관동) 지방은 삼관에서는 제법 떨어져 있습니다. 삼관이 기준이라면 주부 지방도 간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조금 복잡한데, 일본의 역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일본의 권력이 천황과 교토에 있던 시기에는 삼관 동쪽의 지역을 모두 간토라고 불렀지지만, 일본의 권력이 간토 지방의 무사들에게로 이동하자 이들이 기존의 긴키(간사이) 지방과 구분되도록 스스로의 본거지를 간토로 재정립한 것입니다.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는 지금의 카나자와 현에 있는 가마쿠라 시로 가마쿠라 막부의 직접적인 권력이 닿는 지방을 일컬었습니다. 이후 막부 시대를 거치며 간토의 의미는 점차 넓어졌으며, 에도를 수도로 하는 에도 막부 시대에 들어서는 아예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삼관 동쪽을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삼관은 하코네토게(箱根峠), 코보토게토게(小仏峠), 우스이토게(碓氷峠)라는 세 고갯길에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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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아래에서부터 하코네토게, 코보토게토게, 우스이토게입니다.)



 간토 지방의 지형을 보면 앞서 살펴본 간사이나 주부 지방보다도 더 큰 평야지대가 눈에 띕니다. 하지만 저 땅이 모두 처음부터 개간된 평야지대는 아니었습니다. 간토 저지대는 습지가 많아서 개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간토 저지대가 본격적으로 개간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 지역으로 전봉 된 이후로, 그 이전 간토 지방의 중심지는 카나가와현 남쪽의 사카이만 일대였습니다. 결국 오늘날 일본 수도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지요.

 간토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는 역시나 세계적인 대도시인 도쿄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쿄는 우리식으로 읽으면 동경(東京)이죠. 수도의 명칭치고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요? 동양에서 수도 경(京) 자에 방위가 붙으면 고려시대의 남경이나 서경처럼 정식 수도가 아니라 수도에 준하는 대도시나 보조 수도를 의미합니다(중국의 수도가 북경인 시점에서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이쪽도 최소한 명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한 역사가 있습니다). 도쿄가 동경이 된 이유는 바로 교토(京都) 때문입니다.

 도쿄의 옛 이름은 에도(江戸)입니다. 강 강(江) 자에 집/지게 호(戶, 한국은 번체를 쓰고 일본은 간체를 써서 모양이 다르지만 같은 한자입니다) 자를 써서 강가의 집이라는 단출한 이름이지요. 이 이름은 완전히 촌동네던 이곳에 처음 세워진 성인 에도성에서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그러던 에도가 에도 막부를 거쳐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실질적인 일본의 수도 역할을 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수도를 에도로 삼으면서 천황도 에도로 이주하고 도시의 이름도 도쿄로 바꾼 것입니다. 이때 갑작스러운 천도는 교토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니, 메이지 정부는 공식적으로 천도한 것이 아니라 천황의 거처만 옮긴 것이라 발표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토를 격하하고 완전히 천도한 것이 아니라 교토는 그대로 두고 동쪽에 새 수도를 지은 형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쿄가 있음에도 교토는 경부(京部)라는 수도로서의 명칭을 오늘날에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쿄 외에도 이 지역의 유명한 지역은 가마쿠라 막부가 있던 가마쿠라, 보드게이머들에게 친숙할 요코하마, 이승엽이 뛰었던 치바 롯데가 있는 치바현, 대머리망토가 활약할 것 같은 사이타마현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신다면 도쿄가 있는 도쿄만 일대와 가마쿠라 정도까지가 가시기 좋지 않을까 싶네요. 후술 하겠지만, 북쪽은 여전히 꺼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⑤ 도호쿠(東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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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이제 혼슈의 마지막인 도호쿠입니다. 스크린샷을 찍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부 지방의 니가타현도 포함되었습니다. 보다시피 니가타현의 중심부는 주부지방보다도 도호쿠 지방과 더 가깝기 때문에 구분에 따라서는 도호쿠 지방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도호쿠 지방은 말 그대로 혼슈 동북면이라는 뜻입니다. 혼슈에서도 가장 늦게 개척되었기에 일본에서도 낙후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많은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오모리현의 사과와 같은 유명 특산물들을 비롯해 곳곳에 있는 평야 덕분에 농업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지역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자연재해로 인한 비극 때문이었습니다. 

 지도를 보셔서 이미 아시겠지만, 이곳 도호쿠 지방에 후쿠시마현이 있고 이 후쿠시마현에 원자력 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직격타를 맞은 곳이 바로 이곳 도호쿠 지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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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어스)


 구글 어스로 일본 지도를 보면 일본 동쪽의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저 부분이 바로 태평양판과 유라시아판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일본 동부는 서부에 비해 지진이 잦은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건물을 지을 때 내진설계를 하고 지진에 대한 대비도 많이 했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유례 없는 대지진이라 일본조차도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지진의 규모는 M9.1로 지진 관측 역사상 네 번째로 강한 지진이었고, 일본 역사상 가장 강한 지진이었습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의 규모가 7.9였으니 이 지진은 한 차원 더 강했던 것입니다.

 동일본 대지진은 해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1차 피해보다도 쓰나미로 인한 2차 피해가 더 컸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도 발전소 시설을 덮친 15m 규모의 쓰나미가 원전의 시설을 침수하여 노심 냉각 장치를 망가뜨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도쿄전력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체르노빌과 동급인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로 인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인근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극은 우리 옆에서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라는 점이 더 무섭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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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안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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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 어스)



 구글 어스 상의 표시는 외교부의 출국권고지역을 보면서 제가 직접 그린 것이라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미나미소마시, 남쪽으로는 이와키시 북부, 서쪽으로는 타무라시의 동쪽이 이 경계입니다. 이 지역은 후쿠시마 원전 30km 이내이거나 일본 정부에서 피난지시를 내린 지역으로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우리에게는 일본의 비극보다는 오염수 방출로 인한 국제 갈등으로 먼저 와닿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현재 진행 중인 민감한 문제이지요.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게임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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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game_classic&no=867980)




 우리가 어떠한 사건이나 역사를 직접 또는 주변인의 경험을 통해 체험하느냐와 문자나 숫자로만 접하느냐는 그 사건이나 역사를 인식하는데 큰 차이를 불러옵니다. 이것은 어떠한 방식이 더 진실에 가깝다거나 더 올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건은 다채로운 층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사건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는 포함한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때 전자의 관점으로 바라보기는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윗글 사례와 같은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면, 한국인이 당시 일본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기는 어려웠고,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정보는 이 사건을 겪는 일본인 개인들의 경험보다는 사건의 규모와 한국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뉴스나 사료와 같은 1차 창작보다도 문학과 같은 2차 창작이 사건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감정이 제거된 텍스트를 통해서는 사건 당사자에 공감하기가 어렵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 경험으로 사건 당사자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주의: 지금부터의 글은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으셨다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3월에 개봉했던 <스즈메의 문단속>은 매우 뜻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일본인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이 남긴 상처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보고 공감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선 동일본 대지진 당시의 참상과 오늘날까지의 영향이 모두 그려져 있습니다. 도호쿠 지방은 그날의 생지옥 같은 모습과 사람이 살 수 없는 오늘날의 참담한 모습이 모두 그려졌지요. 또한 스즈메와 스즈메의 이모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이 사람들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스즈메는 고작 네 살에 어머니와 고향집을 잃고 이모 손에 맡겨졌고, 스즈메의 이모는 갑작스럽게 스즈메를 맡으며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영화 종반에 표출되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가족으로 아끼고 있음에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달라진 인생으로 인한 마음속 깊은 상처가 부정적인 감정이 격화되며 드러난 것이죠.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렇게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인들에게 남긴 상처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일상을 소중히 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문 밖을 나선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おかえり」로 화답된 것이죠. “다녀오세요.” 이후로 끊어진 일상이 새로운 “다녀오셨어요”로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4. 1장을 마치며


 글이 여기저기로 새어버려서 한 편으로 쓰려던 글이 굉장히 길어졌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도호쿠 지방 이야기는 처음 생각보다 글이 굉장히 길어졌습니다. 원래는 혼슈를 먼저 소개하고 나머지 지방을 소개하려고 했지만, 도호쿠 지방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이 부분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다시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키가하라>와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분량이 너무 많아진 것도 같습니다. 이 게임에서 등장하는 지역은 간사이부터 도호쿠 남부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드게임 <세키가하라>가 동일본 대지진과 상관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 게임의 작가 Matt Calkins는 게임의 초판 작가 수익을 전부 동일본 대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기부했기 때문입니다(<세키가하라> 초판은 2011년에 나왔고 동일본 대지진은 2011년 3월에 일어났습니다). 작가의 마음이 일본에도 잘 전해졌길 바랍니다.

 이제 다음 장부터 우린 <세키가하라>를 향해 나아가보겠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인 일본 역사 이야기가 기다리는 다음 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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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의 종착지를 세키가하라로 삼고, 일본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세키가하라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 첫 번째 일본인


일본에는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을까요?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12만 년 전의 것으로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가 50~60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늦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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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위 사진은 마지막 빙하기 당시의 동아시아 지도입니다. 지금은 바다인 곳들이 육지여서 일본이 대륙과 붙어있었습니다. 인류의 여정은 아프리카 남단에서부터 출발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갔으니,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던 일본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것이지요.

빙하기가 끝나고 일본이 섬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간빙기가 시작된 12,500년 전의 일입니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대륙과 분리되어 섬이 됩니다. 이렇게 고립된 인류는 대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석기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이 시기를 조몬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일본에 살던 사람들을 조몬인이라고 부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 기원전 905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농업을 시작했습니다(괴베클리 테페가 연구되며 이 시기는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농업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의 일입니다. 국사시간에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되었다고 배우셨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이미 간빙기가 한참 진행되어 한반도와 일본이 바다로 갈린 시기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조몬 시대는 농업 기술이 전해지지 않아 농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몬인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다는 말이지요.

조몬이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승문(縄文)으로 줄무늬라는 뜻입니다. 당대에 사용되었던 토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빗살무늬 토기 시대” 같은 말인 셈입니다(빗살무늬 토기 시대라는 말이 어색한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토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중 실질적으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는 후기부터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라는 용어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분법에서는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 토기 시대로, 청동기 시대를 민무늬 토기 시대로 구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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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드림)



조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입니다. 가운데의 토기가 대표적인 조몬 토기입니다. 흰색으로 강조된 부분을 보시면 이 토기가 왜 줄무늬 토기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왼쪽의 유물은 조몬 시대 후기의 토기로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띕니다. 비단 조몬 시대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수렵채집시대 후기의 토기들이 농경시대의 토기들보다 화려한 편입니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일상에 필요한 열량을 섭취하고 나면 더는 노동하지 않고 여가를 보냈던 반면, 농경 시대에는 끊임없이 농사를 지어야 해서 토기에 장식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이후에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오른쪽 유물은 어딘가 친숙하지 않나요?  디지몬 시리즈에서 가장 못생긴 디지몬을 꼽자면 1위를 다툴 토우몬이 바로 이 조몬 시대의 토우에서 따온 캐릭터입니다.

 

 (아직도 생방송으로 토우몬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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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나무위키)



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조몬 시대의 토기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저 유물이 우리나라 부산시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조몬인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도 한반도 남부와 일본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조몬인들은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던 인류이지만 이렇다 할 문명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역사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조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3~13%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본 내에서도 홋카이도나 오키나와 쪽으로 가면 조몬인 유전자 비중이 많이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은 66~79.3%, 류큐인의 경우 27%로 일본 본토에 비해 확실히 비중이 높습니다.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지만, 정작 일본의 변방에 조몬인들의 유전자가 더 많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소개할 민족에게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일본인



일본에 농경과 금속 제련법을 가져온 인류는 야요이인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기원전 10세기부터로 주장하지만, 세계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부터 넘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 인구 이동이 일어날 어떠한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북방계 민족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민족이 일본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들이 이주를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고대 국가를 세우는 고훈시대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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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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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woojy119/20129088329)



야요이라는 명칭은 이 시기 유물이 처음 발견된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의 지명에서 따왔습니다. 이때 발굴된 토기를 야요이 토기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미송리식 토기와 같은 명칭인 것입니다. 조몬 시대의 명칭이 조몬 토기에서 비롯되었듯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도 야요이 토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일본의 선사시대는 토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화려했던 조몬 토기와는 달리 농사가 시작된 야요이 시대의 토기는 한반도에서도 그러했듯 민무늬임이 특징입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수렵채집에 머물던 조몬인들을 인구로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한 후, 세토 내해를 따라 시코쿠와 혼슈까지도 진출합니다. 이 시기의 유물이 도쿄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야요이인들은 일찍부터 혼슈 동부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류는 규슈나 긴키(간사이) 지방이었습니다. 규슈와 긴키 중 어느 지역이 중심지였느냐는 일본 사학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입니다. 저는 야요이 시대의 초기에는 규슈 지방이 중심지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긴키 지방이 중심지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성읍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일본 사서로는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의 사서를 통해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후한 세조 광무제 때의 일인 서기 57년입니다(이 시기 한반도는 삼국시대 초기로 석탈해가 신라 이사금에 오르던 해입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년), 왜노국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자는 스스로를 '대부(大夫)'라 칭하니 '왜국' 제일 남쪽지역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주어 하례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왜(倭)

왜노국은 노국 또는 일본식으로 나노쿠니로 불리는 나라로 사서로 교차검증 가능한 최초의 일본국입니다. 일본을 가리키는 왜나라 왜자가 이 시기부터 쓰입니다. 한 줄짜리 기록이지만 우리는 이 기록에서 많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왜노국을 왜국과 분리해서 인식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일본이 중국에 최초로 조공을 한 기록이지만,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이 큰 섬이고 이곳에 노국 이외에도 여러 세력이 있음을 중국이 인지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왜노국을 왜국 제일 남쪽 지역이라 설명한 점입니다. 중국에 조공을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중국에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제 외교전에 나설 수 있는 정도의 국가적 여력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봐도 일본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려면 규슈 지방에서 출발해야 하고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으니, 중국에 조공을 할 정도의 세력을 가장 먼저 키운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민들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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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일본의 국보인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입니다. 여기서 위(委)는 왜(倭)의 인변을 뺀 오기로 봅니다. 이 유물은 한나라에서 내린 왜노국왕의 금으로 만든 도장으로 1784년에 후쿠오카시 앞바다에 있는 시카노섬에서 한 농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보나 이 유물이 발견된 지역으로 보나, 야요이 시대 초기의 중심지는 규슈 지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국가는 왜면국입니다. 이 나라의 왕인 스이쇼는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일본 왕입니다. 사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기원전부터의 역사와 역대 천황의 이름도 적혀있지만, 이 사서는 720년에 천황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의 계보가 신화시대부터 끊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했기에 연도를 뻥튀기하거나 한 인물이 지나치게 오래 사는 등 기록의 신빈성이 낮습니다. 물론 일본의 기록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갈 길이 머니 고고학적 증거와 교차검증 가능한 기록을 중심으로 고대 일본에서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 기록이 참 재미있는데, 바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입니다. 히미코 여왕의 이야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옵니다.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한 것은 서기 238년의 일로 이 시기는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황제이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중국은 제갈량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후로 조예는 사마의를 시켜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며 위나라의 후방을 평정했습니다. 그 여파로 고구려는 위나라와 직접 대치하게 되었고, 훗날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해 국내성을 내주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가 서진이 혼란에 빠진 시기를 틈타 낙랑군 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당대에 생소했던 여왕이 흥미로웠는지, 중국 측 기록은 이전에 왜국이 조공했을 때보다 더 자세합니다. 조공 당시의 기록은 물론 히미코 여왕의 즉위 전후의 일까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왜)는 본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 ~ 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에 난이 있어/왜국이 어지러워져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오랫동안 서로 싸웠다.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을 히미코卑彌呼라고 한다. (그녀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들을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왕이 된 이후로 본 적이 있는 자가 적었다. (여자) 시종 1,000여 인으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사람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을 전하여 드나든다. 사는 곳은 궁실과 누각이고 성책을 삼엄하게 둘렀는데, 항상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ㅡ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또한 삼국사기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은 이전의 왜국들에 비하면 적극적으로 외교전을 펼칠 여력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는 백여 국이 있다가 히미코 여왕 당대에는 30여 국으로 세력이 정리되었고, 야마타이국이 그중 상국이었습니다. 삼국지에는 히미코 여왕에 속하지 않은 왜국도 있다고 적혀있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히미코 여왕이 조공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중국의 책봉을 받아 아직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타국을 제압하고 정복할 명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히미코 여왕은 타국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군주였지만, 일본의 기록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히미코 여왕이 모티브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신화나 인물은 있지만, 히미코 여왕의 행적과는 맞지 않아서 이 글에서 참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히미코 여왕 사후 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 즉위한 남자 왕의 권위를 다른 국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혼란은 히미코 여왕의 종녀인 토요가 13세의 나이로 여왕에 오르며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냐는 일본 학계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도쿄대학과 규슈대학에서는 규슈설을 교토대학과 오사카대학에서는 긴키설을 지지합니다. 전자는 삼국지에 기록된 야마타이국까지 가는 길을 따져보면 규슈 지방을 벗어나기 어렵고, 규슈 지방에서 한나라 시대의 거울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규슈 지방에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후자는 긴키 지방에서는 위나라의 거울이 출토되었고, 삼국지의 기록에서 동남쪽을 남쪽으로 잘못 기록하는 것을 보정하면 긴키 지방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긴키 지방에서 이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발굴이 진행 중입니다. 이 유적이 야마타이국의 것이라면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시대 말기에서 고훈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국가입니다. 한반도에 여러 성읍국가가 있다가 점차 세력이 정리되면서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듯이 일본도 이 시대를 지나며 6~7세기경에는 본격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바로 오늘날 일본의 직계 전신이 되는 야마토입니다. 일본에 나중에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일본의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야마토의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번외. 세 번째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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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야요이인들은 규슈에서부터 문명을 시작했지만, 정작 규슈 전체가 야요이인들에게 정복되는 것은 8세기의 일입니다. 야마토가 세워진 이후에도 규슈 남부에는 하야토인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야마토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내륙 지역은 조몬인들이 주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해안가에는 야요이인을 비롯한 도래인들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주장이 있습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들 중 일부가 규슈 남부에 정착했다는 것이지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타이완 섬에서부터 출발해 폴리네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대로 뻗어나간 해양 민족으로 이들이 규슈 남부까지도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편의상 도래인을 야요이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분류하는 것이지, 당대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출발하기 전부터 정체성이 다를 수 있고, 도착한 후에 정착한 곳이 달라지면서도 정체성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비슷한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향유했기에 일찍부터 교류하며 연맹국가를 만들었고 마침내 야마토 건국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하야토인들은 야마토에 복속된 후 동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민족이었을지는 모릅니다. 이들은 부족국가 수준의 공동체를 가졌기에 똑같이 하야토로 분류되어도 어디는 야요이인이 주류이고 어디는 조몬인이 주류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대만에서부터 넘어온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의 도래인이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만, 하야토인이 전부 대만계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일본의 야마토 시대부터 무로마치 막부시대까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마토 시대는 야요이 시대 이후의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이 시기의 국가인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과거에는 두 시대를 야마토 시대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오늘날에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편입니다.
 

 

1. 야마토
 

 
 야마토라고 하면 제 나이 또래의 분들은 대부분 이걸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배틀크루저의 특수 기술로 게임에서도 손꼽히는 최종병기급 기술이죠. 미국에서 만든 게임의 우주전함 기술 이름이 일본어인 야마토가 된 이유는 미국 제작진들이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입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파동포)


 우주전함 야마토는 일본 제국의 야마토급 전함의 1번함인 야마토를 우주전함으로 개조했다는 설정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함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지만, 우주전함 야마토의 주제는 반전과 평화입니다. 물론 야마토 전함이라는 상징의 의미와 특공 공격 미화와 같은 요소는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 입장에서 편하게만 볼 수는 없게 만드는 요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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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야마토 전함의 사진)


 
 야마토급 전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거대한 전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력은 한 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의미하며, 해군에서도 최강의 병기인 전함은 그 나라 해군력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최강의 전함을 만드는 경쟁을 했고 이러한 거함거포주의의 끝에 다다른 전함이 야마토급 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부터 해전의 주력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었고, 야마토 전함은 최종병기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함재기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합니다.

 야마토급 전함의 이름은 일본의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율령국은 중국의 성이나 우리나라의 도 같은 개념이라 보시면 됩니다). 야마토는 지금의 나라현 일대에 설치된 율령국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의 발현지가 나라현 일대였기 때문에 일본에 율령제가 도입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야마토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해도, 일본 제국이 가장 자랑할만한 전함에 야마토라는 이름을 그 이유만으로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마토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일본인들이었을 테니까요. 고대국가 야마토는 오늘날 일본의 시초로 여겨지는 국가이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야마토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야마토의 한자는 대화(大和)입니다. 일본어를 아시는 분들은 일본에서 한자를 읽는 방법에 소리를 읽는 음독과 뜻을 읽는 훈독이 있는데, 大和는 어떻게 읽어도 야마토로 읽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고대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야마토라는 말을 왜나라 왜(倭) 자의 훈독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왜나라 왜자에 멸칭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비슷한 화할 화(和) 자로 순화하고 그 앞에 클 대(大) 자를 붙여 大化를 야마토의 표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왜=야마토라고 봐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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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위키피디아)


 위 지도는 7세기 경의 야마토의 영역입니다. 한반도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야마토는 한반도의 국가들과 교류하며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야마토는 주로 백제나 가야와 교류하고 신라와 적대했는데, 신라에 왜구가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또한 왜국을 침공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국지전 이외에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왜국이 개입하거나, 일본에서 벌어진 전쟁에 한반도 국가가 개입했던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한반도와 일본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아스카 시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야마토는 본격적인 중앙집권형 국가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 쇼토쿠 태자였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왕위계승서열 1위에 섭정직을 수행한 당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수나라와 한반도 국가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불교를 진흥하고 유교를 받아들였고, 관직을 비롯한 법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673년에 즉위한 덴무 천황은 군주의 호칭을 이전의 대왕(오키미)에서 천황으로 바꿉니다. 국명을 야마토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집니다. 덴무 천황은 정변으로 정권을 잡아 일본사에 유례없을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기에 칭호와 국명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편찬도 덴무 천황의 지시로 시작되었는데, 학문적인 의미라기보다는 현 천황가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답보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서기의 고대사 부분의 기록이 신뢰성이 낮은 이유입니다. 학자가 학문적인 목적으로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와는 편찬 목적이 달랐던 것이지요.
         
 
 

2. 쇼군


 쇼군은 장군(將軍)의 일본식 독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쇼군이라고 말하는 막부 수장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일본어로는 세이이타이쇼군이라고 부릅니다. 정이(征夷)라는 말은 이민족을 정벌한다는 말로, 이 직책은 본디 혼슈 북동부나 규슈 남부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대장군의 직책이었습니다. 장군의 직책명은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나 정서장군(征西將軍)과 같은 명칭이나 정이장군으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천황의 군권을 위임받아 지휘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고 황실 방계의 무가 가문이 맡았습니다.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책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제 아무리 실권자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정이대장군도 천황만큼이나 신분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실 방계를 참칭 할 수 없을 만큼 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을 칭할 수 없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의 마쓰다이라 성에서 조정으로부터 받은 도쿠가와성으로 개성 하면서 황실 방계 가문 족보에 편입되었기에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패권을 잡은 후 막부를 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전과는 다른 체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추후 두 인물을 다루며 더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일본은 규슈 남부와 혼슈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중앙 정부는 권력 투쟁을 거치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고, 이민족을 토벌하며 넓어진 영토에 자리 잡은 지방 무사들은 조금씩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중앙 정부의 권력 투쟁에 지방 무사들이 끼어들게 되었고, 그중에서 최종 승자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모토였습니다.


 

 3. 막부

 
 막부(幕府)는 장막 막에 마을 부자를 씁니다. 일본어로는 바쿠후(ばくふ)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본래 장군의 사령부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여기서 사령부란 단순한 진영을 넘어 행정 조직을 갖춘 조직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장군이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조직을 움직인다는 것은 반란의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라 예로부터 부를 여는 권한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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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미나모토노 요리모토의 초상)


 일본의 첫 번째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헤이안 시대 말기 중앙의 권력 투쟁을 정리하며 등장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에게 양위를 한 전대 천황인 상황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도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방원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권을 내려놓은 입장이라 군주의 권위가 쪼개져서 충돌할 일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상황이 실권을 쥔 상태로 양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차기 계승에 개입하여 한 시대에 상황이 여럿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중앙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지방의 무사들까지 중앙 권력 투쟁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권력의 추는 중앙의 천황과 귀족들에게서 무사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다른 지방 무사들을 모두 꺾고 권력을 잡은 미나모토노 요리모토는 교토에 자리 잡는 대신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로 돌아갑니다. 이미 가마쿠라에 휘하 무사들을 통치할 “막부”가 있는데, 굳이 교토로 옮겨 기반을 잃고 조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른 무사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직위를 조정에 요청해 받았으니, 그 직위가 바로 정이대장군이었습니다. 이제 일본에 본격적인 막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부터 전국적인 지배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일본은 긴키 조정의 영향하에 있었고 막부의 지배력은 동일본에 한정되어 있던 것이지요. 하지만 조정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며 막부의 영향력은 전일본에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사후 막부의 실권은 정이대장군의 외척인 호조 가문에게 있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본인부터 처가의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했고, 막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를 모두 숙청하며 미나모노토 가문의 힘이 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호조 가문은 신분상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막부의 섭정이라 할 수 있는 집권(執權, 일본어로 싯켄) 직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막부 정치는 천황을 대신하는 정이대장군을 대신하는 집권이 실권을 가진 옥상옥의 구조였던 셈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접어들며 호조 가문도 가주가 실권을 잃고 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면서, 권위가 약하던 막부 체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또한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졌지만,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전이라 무사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었기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다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4.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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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일본의 남북조시대를 연 고다이노 천황과 아시카가 다카우지)


 고다이고 천황은 수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호조 가문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모아 마침내 막부를 타도합니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천황 중심의 통치는 채 3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힘을 빌려준 무사들의 생각은 달랐기 때문이지요. 그중에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치도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처음부터 자신의 막부를 열 생각으로 막부 타도에 가담했습니다(족보상으로 그도 미나모토노 가문과 뿌리가 같은 명문가였습니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세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아시카가는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반란을 꾀합니다. 한때는 천황군에게 쫓길 때도 있었지만, 결국 무사들의 지지를 받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을 폐한 다음, 고묘 덴노를 세우고 그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며 막부를 엽니다. 하지만 폐위된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요시노에 새 조정을 세우면서 일본은 남북조시대에 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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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남북조시대의 각 수도의 위치)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북조의 수도인 교토와 남조의 수도인 요시노는 매우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는 남조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남조에게 교토를 내주고 피난을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본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가문은 고다이고 천황 아래 호조 가문을 타도한 여러 세력 중 하나였기에 이에 맞설 다른 무사들이 건재하기도 했고, 막부 내부의 당파 갈등으로 인해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할 정도로 막부 내부 정치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조와 남조는 모두 지방 무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세력이 큰 무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지방을 통치하고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으니 이 직책의 이름이 수호(守護, 일본어로 슈고)입니다. 슈고는 가마쿠라 시대에도 있던 직책이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슈고는 지방 행정관을 넘어 영주로 나아갈 수준의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역 세력을 흡수하며 훗날 슈고 다이묘가 되는 것입니다.

 남북조시대를 종결한 것은 아시카다 다카우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였습니다. 남조의 기반인 규슈를 정벌하여 남조의 항복을 받아내며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일본 통일을 이뤘던 것입니다. 이때가 1392년으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합니다. 이후 그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왕으로 책봉받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천황이 있지만,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정이대장군임을 명나라에게도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 중 그만큼 정이대장군 다운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요시미츠도 슈고들을 견제하기 위한 직속 무력 기구를 설치했을 정도로 슈고들의 권력은 막강했고 막부의 의사결정도 슈고들의 합의로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훗날 있을 혼란의 씨앗과 같았습니다.


 

 5.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나누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1467년 오닌의 난부터 오사카 전투가 끝나는 1615년으로 잡고자 합니다. 148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이중 우리에게 친숙한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기는 150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오닌의 난은 정이대장군 가문과 슈고 가문의 후계자 문제로 발생한 전란입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이 없어서 승려로 출가한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합니다. 이때 동생에게 설사 아들을 낳더라도 후계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합니다. 이미 휘하의 가신단은 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하는 파와 동생을 지지하는 파로 갈려있었고, 요시마사에게는 이들을 누를 권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계 문제는 정이대장군 가문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슈고 가문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고, 막부는 이러한 문제를 일관성 없게 처리하며 분쟁을 키우기만 했습니다. 오닌의 난은 막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각 가문의 권력을 두고도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교토로 상경한 무사들의 전쟁은 11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전장이었던 교토는 수도의 영광을 잃고 황폐해집니다. 이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의 무사들은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슈고가 교토에서 전쟁하는 사이 가신이 지역을 장악해 다이묘가 되는 하극상이 일어나고, 간토 지방에서는 지방 무사들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전국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슈고로 대표되는 기존 권력층이 몰락하고 상인이나 부농으로 대표되는 신흥 권력층이 부상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다이묘와는 다른 강한 권력을 가지고 영지를 다스렸고, 서로의 영지를 노리거나, 상위 다이묘를 하극상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시대에 부상한 이 신흥 다이묘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한편 일부 슈고 다이묘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도 했습니다.


 위 지도는 전국시대 초기인 1477년의 세력도입니다. 다테나 시마즈처럼 에도 막부 시기까지도 살아남는 가문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가문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하극상을 당하거나 다른 가문에게 멸문당해 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키가하라>에 등장하는 가문을 중심으로 전국시대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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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국시대의 다이묘들

 


 지난 글 막바지에 소개했던 오닌의 난이 막 끝난 1477년의 세력도입니다. 정확한 영토라기보다는 대략적인 영향력을 나타내는 세력도라 보시면 좋겠습니다. 정이대장군이 슈고 다이묘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듯이 슈고 다이묘들도 자신의 영지에서는 가신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영지를 완벽히 통치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시대를 거치며 많은 다이묘 가문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가신에게 빼앗기거나 다른 다이묘에게 패하며 몰락합니다. 하지만 다테나 시마즈처럼 전국시대 끝까지 살아남아 에도 막부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자랑했던 가문도 있었습니다.

 중앙의 아시카가가 무로마치 막부입니다. 저곳이 바로 교토인 것이지요. 전국시대 초기에 두각을 드러내던 다이묘는 주코쿠 지방의 오우치나 시코쿠 지방의 호소카와 같은 서쪽의 명문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문들은 중앙 진출에 신경을 쓰다 정작 가신에게 본거지를 빼앗기고 맙니다. 동쪽에서는 막부의 분가인 이마가와와 슈고 가문인 우에스기를 중심으로 동부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권력의 틈을 노리고 새로운 다이묘들이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90년 후 전국시대의 판도는 아래와 같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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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s://historystory.tistory.com/77, 아시카가 요시카게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오타입니다.)


 1560년대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다 가문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전국시대 경쟁에 뛰어든 시기입니다. 오닌의 난 직후와 비교해 보면 여러 지역의 주요 다이묘가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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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가문의 가몬)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2/Ichimonjimitsuboshi.png)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백제 왕가의 후손인 오우치 가문과 오닌의 난의 주역인 야마나 가문을 모두 제치고 주코쿠 지방의 패자로 떠오른 가문입니다. 본래 모리 가문은 오우치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오우치 가문과 야마나 가문이 경쟁하는 동안 차분히 세력을 길러 두 가문을 모두 제압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리 모토나리가 쓴 계책이 흥미로운데, 바로 다른 가문에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켜 그 가문을 자신의 분가처럼 만든 것입니다. 후계가 끊긴 킷카와 가문과 코바야카와 가문에 자신의 차남과 삼남을 양자로 보낸 다음, 그 아들들이 그 가문의 당주가 되게 한 것이지요. 이렇게 주코쿠 지방의 유력 가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둔 덕분에, 규슈나 주코쿠의 다른 가문들과의 전쟁에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리, 킷카와, 코바야카와 이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큰 역할을 했고 보드게임 <세키가하라>에는 이 중에서 모리 가문과 코바야카와 가문이 등장합니다.

 시코쿠 지방에서는 긴키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명문가인 호소카와 가문이 몰락하고 쵸소카베 가문이 시코쿠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가신이었던 미요시 가문이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을 이용해 호소카와 가문의 유산을 장악했지만, 정작 미요시 가문도 가주가 연달아 요절하면서 무너지고, 그 사이 시코쿠 남쪽 도사의 다이묘였던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시코쿠를 거의 통일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간토 지방에서는 호조 가문의 대두가 눈에 띕니다. 호조 가문은 간토의 아시카가 가문을 비롯한 전통적인 다이묘들을 멸문시키고 간토를 지배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이 가문의 흥망성쇠로 설명하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호조 가문은 전국시대의 중요한 가문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섭정가인 호조씨의 후예를 자칭하지만 실질적으로 연관은 없기에 이 가문을 후호조씨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케다와 우에스기처럼 전국시대 초기부터 세력을 지켜온 가문도 있습니다. 물론 이 가문들도 내분을 거치며 분가가 본가를 몰아내는 등의 혼란의 시기를 거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문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일대를 평정해서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켄신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특히 신겐과 켄신은 전국시대에도 손에 꼽을만한 명장이었고 이들이 다섯 차례나 맞붙은 카와나카지마 전투 또한 전국시대의 주요 전투로 꼽힙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분가인 이마가와 가문도 이 시기에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9대 당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주변의 유력 다이묘인 다케다 신겐과 호조 우지야스와 혼인 동맹을 맺고 마츠다이라 가문의 미카와를 사실상 지배하면서 오다 가문을 압박했습니다. 오다와 이마가와 사이에 낀 군소 다이묘인 마츠다이라 가문은 후계자를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 인질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유력한 다이묘들은 끝내 천하를 호령하지 못했고, 일본을 뒤흔든 것은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2. 오다 노부나가


 




 1) 오와리의 영주에서 중부의 패자로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는 오늘날의 나고야 일대입니다. 본래 오와리의 슈고 다이묘는 시바 가문이었으나 이웃한 이마가와 가문의 침공으로 인해 권력을 잃고 신하였던 오다 가문이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노부나가의 가문은 오다 가문 중에서도 방계 말석에 해당하였지만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노부히데가 본가와 주군을 모두 제압하고 센고쿠 다이묘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실권을 잃었다고 해도 오다 본가는 건재했고 그런 상황에서 노부히데는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로 갑자기 서거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노부히데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습니다. 하지만 불안요소도 많았습니다. 우선 동생과 서자 형들이 있었고 오다 본가도 건재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장례에 막바지에나 나타나 영정에 향을 던지는 등 노부나가의 행실이 좋지 않았기에 오와리 지배층 사이에 평판도 나쁘다는 불안요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오와리 내부의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일가친족을 숙청한 끝에 오와리의 완벽한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오와리의 지배자가 된 오다 노부나가는 곧바로 주변 다이묘들의 위협에 직면합니다. 가장 위협적인 적은 오다 가문의 숙적인 이마가와 가문이었습니다. 호조와 다케다와 3국 동맹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킨 이마가와는 교토에 입성하여 스스로 새 막부를 창시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고, 교토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와리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요충지였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교토 상경을 위해 그동안 비축한 물자를 바탕으로 최대 4만의 병력을 일으켰고, 이때 선봉을 맡은 부대는 마츠다이라 토모마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한편 북쪽의 사이토와도 적대 중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최대 5천 명뿐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다는 기습만이 방법이라 생각하여 첩자를 보내며 적당한 장소와 시기를 물색했습니다. 그러다 악천후 속에서 휴식 중이던 이마가와군의 본영을 기습하여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베는 최상의 전과를 거둡니다. 다이묘를 잃은 이마가와군은 급격히 붕괴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최후를 맞은 것을 제외하면 오다 노부나가는 하늘이 돕는다 싶을 정도로수많은 위기를 운 좋게 극복했는데 이 오케하자마 전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꼽을만합니다. 기습이 성공했더라도 이마가와를 베지 못했다면 이마가와 가문과의 전쟁이 지속되어 사이토 가문도 맞대고 있는 오다의 전세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이마가마 가문이 크게 흔들렸고, 그 와중에 도쿠가와가 독립하여 강력한 우군이 되었기에 오다는 동쪽 방면을 도쿠가와에게 맡기고 북쪽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동쪽의 강대한 적이 사라지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우군이 생긴 것이니, 이 전과가 아니었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역사대로 일본을 뒤흔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보내져서 가신으로 활동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마가와 가문에 보내지기 전에 잠시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의 계략으로 인해 납치되어 오다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 시절에 1534년 생인 노부나가와 1543년 생인 이에야스는 비록 나이차이가 있었을지라도 이 시기에 교감을 했었을 것이고, 공동의 적인 이마가와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맹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 둘의 동맹은 이에야스가 일군의 세력을 이뤄낸 시점부터 오다가 죽을 때까지 유지됩니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생긴 이마가와 가문의 권력 공백을 틈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가신단을 장악했고, 인근 지방인 미카와국을 평정해 천황으로부터 조정의 작위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받을 때, 자신의 성을 마츠다이라 씨에서 도쿠가와 씨로 “복성”해달라는 특이한 요청을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본디 저희 가문의 시조는 황실 방계인데, 마츠다이라 씨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잃었습니다. 부디 제가 황실 방계 성씨를 다시 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천황은 전례 없는 요구와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조정 대신들이 받아준 덕분에 이에야스 본인에 한해 복성이 허락됩니다. 이 덕분에 도쿠가와는 촌동네의 별 볼일 없는 다이묘에서 정이대장군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신분으로 격상됩니다. 그가 일찍부터 오다처럼 큰 뜻을 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이렇게 개성한 덕분에 도쿠가와는 별 다른 무리 없이 에도 막부를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개성하면서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받은 모토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에라는 이름을 붙여 이때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동쪽의 위협을 정리한 오다는 북쪽 전선인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전쟁에 집중합니다. 사이토 가문은 오다의 처가였으나, 완전한 동맹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처남 사이토 요시타츠가 장인인 사이토 도산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때 장인을 도왔기 때문에 이후로는 적대 관계로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이토 요시타츠가 30대 초중반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빈틈이 생겼고, 오다는 이때를 틈타 사이토 가문 영지 정벌에 나섭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여동생을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고 사이토 가문 내부의 분열을 획책한 끝에 마침내 오다는 사이토 가문의 영지인 미노국을 손에 넣어 2국을 지배하는 다이묘가 됩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오다에게 날개를 다는 사건이 막부에서 일어납니다. 미요시 가문이 13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시혜하고 그의 사촌동생을 새 정이대장군으로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시테루 일가는 이 사건으로 인해 거의 몰살되었지만, 그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출가하여 교토가 아닌 야마토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오다에게 의탁합니다. 마치 조조가 헌제를 옹립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568년 9월 오다는 적통 정이대장군을 다시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진합니다. 미요시 가문을 비롯한 간사이 지방의 다이묘들은 오다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다는 교토를 점령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새 정이대장군으로 옹립했고 이듬해인 1569년에 교토 동쪽의 이세 국을 완전히 평정하면서 일본 중부의 패자로 올라섭니다.



 2) 1∙2차 노부나가 포위망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와 정이대장군의 관계는 엇나가게 됩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로 남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붕괴한 막부의 힘만으로 오다에 대적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국의 다이묘와 사원세력에게 서찰을 돌려 노부나가 토벌을 호소합니다. 오다의 두 번째 위기인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된 것입니다. 이 포위망에는 당대 최고의 강병을 자랑하는 다케다 신겐과 오다와 끝없이 대립하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중심으로 여러 다이묘와 사원들이 합세했습니다(당시 승단은 자체적으로 승병을 육성하여 다이묘에 준하는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이 포위망에는 오다의 매제인 아자이 나가마사까지 참여하였는데, 본래 아자이 가문이 아사쿠라 가문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양자의 대립에서 아사쿠라 쪽을 지원한 것입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아군마저 이탈하였으니 오다는 매우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다는 불리한 시점에는 조정을 압박해 평화 조약을 맺는 식으로 시간을 벌고, 작은 세력부터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포위망에 대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 세력인 엔랴쿠지(연력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절을 불태우고 안의 사람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가던 오다였으나 다케다 신겐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을 개시하면서 전황은 반전됩니다. 전국시대 최고의 무장으로 꼽히는 다케다 신겐의 대군을 상대로 오다와 도쿠가와의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맙니다. 이때 벌어진 전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역사적인 참패인 미카타가하라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참패하고 후퇴하는 와중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했던 것처럼 공성계를 펼쳐서 적이 물러나게 했다거나 역습을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기록들은 에도 시대 이후부터 발견됩니다. 도쿠가와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에 후대에 명예회복을 위한 창작이 더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쿠가와군이 맡던 전선이 붕괴되면서 오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지는 듯했지만, 신겐이 급사하면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다이묘가 죽은 신겐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포위망은 그렇게 와해되고 맙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한 오다와 도쿠가와는 역습에 나서 포위망에 참여한 다이묘들을 정복합니다. 이때 매제인 아자이 가문을 정벌할 때 활약한 사람이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키노시타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전쟁통 속에서 오다의 여동생을 구출해 오는 활약을 했고, 전후에 아자이 가문의 영지를 받아 이때부터 다이묘로 자리 잡게 됩니다.

 1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와해된 후, 오다는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여 막부를 사실상 해체합니다. 추방된 요시아키는 주코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에게 몸을 의탁하고 막부를 이어갑니다. 1차 포위망을 극복한 오다에게 새로운 적이 생긴 것입니다.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을 맹주로 주코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와 오사카의 불교 세력인 혼간지를 주축으로 만들어집니다.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1차 때보다는 비교적 덜 위협적이었고, 맹주인 겐신이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로 급사하면서 와해되고 맙니다. 두 번의 포위망 모두 가장 위협적이었던 다이묘가 급사하는 행운이 겹친 것입니다.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와해된 후, 남은 것은 그들을 정벌하는 일뿐이었습니다.



 3) 혼노지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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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나무위키)


 혼노지의 변 직전의 세력도입니다. 이 시기의 노부나가는 단독으로 다면 전쟁을 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노부나가는 휘하 가신들을 다이묘로 임명하여 여러 군단을 운용하며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대부분은 그동안 적대하던 세력을 점령한 것이지만, 간사이 지방을 점령하는 동안 동맹 관계였던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영역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이제 토사구팽의 시기가 온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이때까지도 동맹 관계였지만, 오다가 이에야스의 장남(이자 오다의 사위)과 아내를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처형할 것을 명하며 양자 사이에 긴장이 흐르게 됩니다. 이 일은 결국 도쿠가와가 아들과 아내를 자결시키며 일단락됩니다. 명을 듣지 않고 이제 와서 오다와 맞서기는 도쿠가와로서도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오다는 주코쿠 지방의 정벌은 히데요시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시코쿠 지방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쵸소카베를 정벌하고, 본래 시코쿠 지방의 영주인 미요시 가문 아래에 둔 다음, 미요시 가문에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내 시코쿠를 손에 넣는 것이 이번 정벌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면서 정벌은 계획대로 이뤄지지 못합니다.

 혼노지의 변은 오다의 가신인 아케치 마츠히데가 일으킨 정변입니다. 아케치 마츠히데는 처음부터 오다를 섬긴 가신이 아니라 원래는 마지막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가신이었습니다. 요시아키가 오다의 신세를 지는 과정에서 주군을 바꾸게 된 처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합류했지만, 마츠히데는 히데요시와 함께 일 중독자 수준으로 근면한 오다에 맞출 수 있는 둘 뿐인 가신이었기에 중용됩니다.

 혼노지의 변 직전, 오다는 히데요시에게 원병 요청을 받고 마츠히데로 하여금 원군을 이끌고 지원을 가도록 명령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시코쿠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교토의 혼노지라는 절에 진을 차립니다. 아케치 마츠히데는 오다의 명을 따라 단바에서 병력을 모은 다음, 서쪽으로 행군합니다. 그러다 교토에서 열병식을 한다는 핑계로 행군로를 바꾼 다음, 교토에 입성하고서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과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합니다. 당시 오다를 수행하고 있던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히데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후계자인 오다 노부타다까지 전사하고 맙니다.

 아케치 마츠히데가 관련된 기록을 얼마 남기지 않고 전사했기 때문에 그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만 남아있습니다. 다만, 정변을 일으킨 후 교토에서 민심을 얻고자 프로파간다를 벌이고 인근 다이묘들의 협조를 구했던 점을 보면 오다의 자리를 노리는 마음은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츠히데가 오다 가문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꾸준히 요시아키와도 서신을 주고받았던 점을 보면 요시아키가 정변을 부추겼을 정황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히데요시의 천하

 혼노지의 변이 전국에 알려지자 일본은 일대의 혼란이 일어납니다. 각군에는 탈영병이 속출하고,오다 가문의 지배가 자리잡지 못한 지역에서는 반란도 이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가장 빨리 움직인 사람이 바로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을 전해 듣고는 바로 모리 가문과 화친하고 교토로 행군합니다. 이때 히데요시군은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해 7일 밤에 히메지성에 도착했는데, 대략 30시간 동안 70km를 행군한 것입니다. 히메지에 도착한 히데요시는 오다의 삼남 노부타카와 합류하며 명분은 물론 군세도 늘립니다. 반면 아케치 마츠히데는 교토에서 돈을 뿌리고 자신을 주 무왕에 비유하는 프로파간다를 펼쳤으나,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둘은 13일 교토 서쪽의 야마자키에서 맞붙었고 최소 2배에서 4배까지 군사가 많았던 히데요시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습니다. 전투에서 패하고 달아난 마츠히데는 낙오병을 사냥하던 농민의 죽창에 찔려 사망합니다.

 이후 히데요시는 이 사태의 뒷수습을 위한 키요스 회의를 개최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이제 히데요시가 천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통일의 기틀을 만든 다이묘입니다. 오다 이전 시대의 천하인들은 자기 지방을 기반으로 교토에 진출하여 막부와 조정에 영향을 끼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러 다이묘들을 정벌하고 넓은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오다의 장점은 대국적인 전략을 그리는 능력과 정치력이었습니다. 오다의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이나 오다 군의 전투력은 당대의 다른 세력과 비교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다는 불리할 때는 외교전을 펼치고 상대가 약해졌을 때 전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적들을 제압합니다.

 또한 가신들이 독립적인 다이묘로 활동한 다른 세력과는 달리 오다의 가신들은 군주의 신하처럼 움직였습니다. 이 때문에 반기를 든 가신도 몇 있었지만, 봉건제에 머문 다른 다이묘들과는 달리 절대군주정과 비슷한 체계를 갖춘 오다 세력은 세력이 커지더라도 분열되지 않고 다면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다가 죽으면서 세력은 분열되고 동맹인 도쿠가와도 독자적인 행보를 걷습니다.

 오다가 그렸던 통일 후 일본의 체계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의 행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오다는 수도 교토와 자신의 고향 나고야 사이에 있는 비와호 인근에 아즈치 성을 지어 기성으로 삼았습니다. 아즈치 성은 단순한 방어용 성을 넘어 화려하기로도 유명했고, 성 내부에는 가신단이 머물 수 있는 저택도 있어 이곳이 훗날 오다 정권의 수도가 되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다가 천황 조정을 어떻게 다루었을지는 정권의 중심지를 추측해보는 일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삼직추임문제입니다.

 삼직추임문제는 오다가 제대로 의사를 표하기 전에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여 비교적 모자란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천황 조정에서는 천하의 패권을 쥔 오다에게 관백, 태정대신, 정이대장군 중 하나에 취임할 것을 제안합니다. 정이대장군은 어떤 직위인지 모두 아실테고, 관백은 천황의 섭정, 태정대신은 조정의 우두머리인 직위입니다. 관백과 태정대신의 차이는 태정대신은 율령제 체제 하의 정점이지만, 관백은 율령제 체제 밖의 특수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다는 이 제안에 확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합니다. 설에 따라서는 오다가 세 직위를 모두 거절했다고도 보는데, 그렇다면 오다는 조정에서 제안할 수 있는 최고의 직위 셋을 모두 거절하고 새로운 체제를 꿈꿨다고도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히데요시는 관백에 올랐고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에 오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제 길었던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까지 왔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

 1) 혼노지의 변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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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국권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인들에게는 국가적 원수입니다. 이 인물들에 대한 한국의 관점은 일본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데요시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바라보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야망과 광기로 불타는 인물로 그리는 편입니다. 저는 두 가지 모두 히데요시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는커녕 무사도 아니라 오다의 하인으로 출세길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실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일처리 능력에 감복한 오다가 그를 중용하면서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주코쿠 지방의 군단장까지 맡았습니다. 이 덕분에 그는 혼노지의 변 이후로 가장 먼저 교토에 도달하여 아케치 마츠히데를 토벌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혼노지의 변을 수습한 후 개최한 키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의 세 살배기 장손을 후계자로 밀어 옹립합니다. 하지만 장성한 차남과 삼남은 이에 반발하였고, 히데요시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가신들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반기를 듭니다. 오다의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역시 오다의 차남 편에 서서 히데요시와 대적합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 내에서 반기를 든 세력을 각개격파하며 오다 가문을 봉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 이후 생긴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쉽게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도쿠가와와의 전쟁에서는 패전하며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의 명분이었던 차남 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오다의 차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버립니다. 이렇게 도쿠가와는 병력을 움직일 명분을 잃고 히데요시에게 입조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입장에서 오다 가문의 세력을 거의 흡수하여 600만 석고에 달했던 히데요시와 단독으로 장기전을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도쿠가와를 제압하는 것이 무리가 있었기에 도쿠가와를 입조시키기 위해 동생을 시집보내고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다이묘를 끝내 제압하지 못하고 훗날의 불씨를 남겨두게 됩니다.



 2) 일본 통일

 다시 오다의 영역을 발아래에 둔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오사카성을 짓고 자신의 거처로 삼습니다. 이제 다시 전국시대 통일 작업에 나설 시기가 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우선 오다가 하려다가 못한 시코쿠 정벌에 나서 쵸쇼가베 모토치카의 세력을 시코쿠 전역에서 도사 번으로 줄여놓습니다. 그런 다음 규슈를 거의 통일하기 직전이었던 시마즈 가문 정벌에도 나서 규슈 지방까지도 자신에게 복속시킵니다. 혼노지의 변 이전에 전쟁 중이던 모리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에게 입조했기 때문에 이제 서일본은 모두 히데요시의 발아래에 있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진뿐이었습니다.

 이제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지 않은 세력은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와 도호쿠의 다테 마사무네뿐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자신과 계속 대립각을 세운 호조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전국적인 동원령을 내렸고, 도합 21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집합니다. 히데요시의 정벌군은 호조 가문의 성을 파죽지세로 점령했고, 호조 가문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도 함락하지 못했다는 오다와라성에서 마지막으로 농성에 들어갑니다. 지연전에 들어가면서 동맹인 다테의 지원과 다른 다이묘들의 반란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테는 히데요시의 군세를 보고 뒤늦게나마 히데요시의 정벌에 동참했고 다른 다이묘들은 이미 천하의 판도가 정해진 마당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더는 버틸 수 없던 호조 가문은 3개월 만에 오다와라성의 문을 열고 항복합니다. 호조 가문은 멸문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실권자인 호조 우지마사는 할복하고 당주였던 호조 우지나오는 고야산으로 추방당하며 세력이 와해됩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합니다.
 


3) 도요토미 정권 체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이전의 가마쿠라씨나 아시카가씨와는 달리 히데요시는 천출이라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에 합당한 지위에 오를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 수 있는 존재는 일본 조정이었습니다.

 일본 조정에는 천황의 섭정인 관백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막부가 생기기 전에는 일본의 실권을 쥔 직책이지만, 막부 시대로 넘어오며 유명무실해진 직위였습니다. 하지만 막부 시대에도 무가인 정이대장군 가문 출신은 오를 수 없는, 고셋케라 불리는 최상위 공가(조정 귀족)의 전유물인 직책이었습니다. 막부는 황실과 먼 친척인 무인들의 자리이지만, 최상위 공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하는 외척 가문의 자리였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고셋케는 황가가 아니지만 오히려 먼 황실 방계보다도 가문의 격이 높았던 것입니다. 조정은 물론 막부의 작위들조차 유명무실하고 참칭 하던 시대였지만, 조정 최상위 직책인 관백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데요시 시대에 관백직을 놓고 고셋케 간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히데요시는 이들의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이 고셋케 중 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관백에 취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 다음,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씨를 하사 받아 관백직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을 엽니다. 무인이 관백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관백직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이 창시된 것은 전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는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마지막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공식적으로 천황에게 직을 반납하게 하여 막부를 끝냅니다. 이제 일본에 이어오던 막부와 조정의 이원정부체제가 종료되고 관백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들어선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첫아들이 요절하고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누나의 아들인 히데쓰구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히데쓰구에게 관백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으로 올라섭니다. 일본에는 흔한 상왕 정치 구도가 관백직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최초의 태합은 아니었지만, 일본사의 모든 태합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태합이라고만 해도 일본에서는 히데요시를 지칭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흥선대원군을 대원군이라고만 부르기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게임의 이름이 <태합입지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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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나무위키, 태합입지전 V)

 <태합입지전>이라는 게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명목상 일인지하 만인지상, 실질적으로 일본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의 태합이라는 뜻의 “이마타이코(今太閤)”가 자수성가하여 출세한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4) 다이묘 세력 재편

 히데요시는 관백에 오른 후, 다이묘들의 세력을 재편하고 통제합니다. 우선 다이묘들이 힘을 기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다이묘들이 사사로이 통혼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합니다. 이 정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도 명목상 이어졌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개전하게 되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우에스기 카케카츠가 성을 세우고 병량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기에 도쿠가와는 이를 히데요시의 치침을 어긴 것이니 역심을 품은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에스기 측은 오히려 히데요시의 지침을 어기고 세력가들과 통혼하는 도쿠가와가 역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다이묘 세력 구상은 자신의 거성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인근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다이묘들의 세력권을 안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전봉입니다. 주코쿠의 모리 가문의 경우,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분가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가문의 후계자로 자신의 외조카을 보냈고, 주코쿠에 나름 독립적인 세력을 자랑했던 우키타 가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며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주부의 도쿠가와는 이런 방식으로 견제할 수 없었기에 히데요시는 전봉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전봉은 무사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있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일군 영지를 모두 포기해야 하며, 새롭게 부임한 영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막부 치하나 전국시대 동안 전봉된 영지에서 반란에 휩쓸려 사망한 다이묘는 부지기수입니다. 한편 무사라면 자신의 영지를 스스로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영지를 접수하지 못한 다이묘 이상으로, 새로운 영지를 잘 다스려 세력을 일군 다이묘도 많았습니다.

 도쿠가와의 간토 전봉은 명목상으로는 석고(성인 남성 1명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으로 영지의 경제력을 측정하는 단위)를 늘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셈은 일단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먼 변방으로 보내고, 호죠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간토에서 저항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거나 최선으로는 반란에 직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그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전봉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도쿠가와가 간토로 전봉되어 자리잡은 곳이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 성입니다. 에도 성 일대는 호죠 가문이 간토를 지배하던 시기에도 변방이라 지금과는 달리 시골 어촌이던 곳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도 호죠 가문의 중심지인 오다와라도 아닌 이곳을 도쿠가와가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간토 내륙과 해안을 잇는 주요 교통지였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를 중심으로 간토를 발전시켰고, 이전의 영지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보존하며 히데요시의 기대를 완벽히 저버립니다.



 5) 히데요시의 최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을 정비한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가도정명을 내세우며 조선을 도발한 끝에 히데요시를 한국인들의 국적으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히데요시가 측근들조차 반대한 임진왜란을 기어이 일으킨 이유는 히데요시 본인의 야욕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휘하 영주들에게 더 많은 땅을 나눠주거나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다와 같은 시각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 내치를 염두에 둔 정책이라는 가설의 반례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해 임진왜란을 기획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쿠가와를 임진왜란에 참전시켜야 맞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밖으로 자신의 병력을 출진시킨 바가 없습니다. 단순히 땅이 목적이었다면, 역시나 일본 안에서 도쿠가와나 다른 다이묘를 다시 정벌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히데요시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무장들을 선봉으로 세워 조선을 침공한 것은, 정말로 조선을 정벌하여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쿠가와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륙 정벌의 영광을 이에야스에게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이해할 수 없는 정복욕을 결국에는 쇼군에 올라 막부를 창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보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대장군은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정신라대장군입니다(삼국시대 동안 일본은 백제나 가야와 친교하며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있는 직책입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다면, 아예 조선을 정벌하여 정신라대장군에 올라 막부를 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껏 막부를 해체하고 관백 체제를 만들었음에도 또 막부를 열고자 했다는 것이 이상한데, 관백은 도요토미 가문 외에도 다른 공가도 오를 수 있으니 안정적으로 승계가 가능한 막부를 열고자 했다고 하면 이해를 해볼 수도 있을 노릇입니다. 정말 그럴 의도였다고 해도 그 여력으로 관백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편이 지도자로서 더 올바른 자세였겠지만, 히데요시는 국가의 지도자가 될 그릇이 못 될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굉장히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지만, 슬하에 자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낳았던 아들들이 모두 영아 시절에 사망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인 히데츠구를 양자로 맞아 관백에 올려 후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실인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으며 후계 구도가 엉망이 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를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확고했기에, 히데요리가 출생하자 히데츠구는 관백이었음에도 그 지위가 매우 흔들립니다.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읽고 히데요리가 아직 어리니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장성할 때까지 자신이 후견인이 되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모반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히데츠구를 할복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히데츠구의 가족은 물론 가신들도 숙청당하면서 도요토미 세력 전체가 약화됩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히데츠구파 가신들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으니, 도대체 누굴 위한 숙청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의 히데요시는 이미 56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고령인 나이라 갓난아기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라이벌 도쿠가와는 73세까지 살았지만,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삼남 히데타다는 1579년생으로 1593년 생인 히데요리와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에게 일본을 물려주겠다는 근시안적인 욕심 때문에 오히려 가문을 파멸로 몰아간 것입니다.

 1598년 히데요시는 가문과 국가를 넘어 이웃 나라에까지 재앙만 안긴 채로 사망합니다. 히데요시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었기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퇴각합니다. 이때 일본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모르는 다이묘는 없었을 것입니다.


 
 2. 세키가하라 전투

 1) 칠본창과 오봉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은 무사인 칠본창과 문신인 오봉행으로 나뉩니다. 같은 히데요시파지만 양쪽 계파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습니다. 칠본창 중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에 모두 참전해 참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유명합니다. 같은 무사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칠본창이 아니었고 가토 기요마사와는 철천지 원수로 유명했습니다. 오봉행 중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에 맞선 이시다 미츠나리가 유명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신들이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경쟁을 붙여 전공을 올리게끔 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고니시와 가토를 세운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들의 갈등은 봉합되지 않고 벌어지게 됩니다.


 
 2)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는 누가 뭐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이때 당시의 도쿠가와의 석고는 200만 석이 넘는 규모로 모리 데루모토와 같은 다른 대다이묘와 비교해도 배가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데요시 사후의 일본 정세는 친도쿠가와와 반도쿠가와파로 나뉘게 됩니다. 반도쿠가와파의 거두는 주부 지방의 대다이묘인 마에다 토시이에였는데,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신분이 낮을 때부터 부부끼리도 교우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기에 석고 이상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오봉행과 칠본창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에다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지시를 어기고 다이묘간의 통혼을 하는 도쿠가와를 견제하고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며 도요토미 가문의 패권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토시이에마저 사망하면서 히데요시 가신단 사이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인물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갈등을 도쿠가와는 놓치지 않습니다.

 중재자가 사라진 도요토미 가신단의 갈등은 극에 달해 칠본창 측에서 미츠나리를 죽이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미츠나리는 도쿠가와에게 의탁해 구명을 합니다. 이미 정적이었고 훗날 전장에서 맞붙는 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화인데, 이때 도쿠가와는 미츠나리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고자 미츠나리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츠나리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거성으로 돌아가 은거했고, 미츠나리 대신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머물며 일본의 정무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칠본창의 행보를 보면 이들이 정말 도요토미 가의 충신이 맞는지 의심됩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대국적인 그림을 볼 수 있었다면, 도요토미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도쿠가와를 견제하는 것이 맞다는 것은 이 시대 역사를 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뼛속까지 무사였기에, 정말 순진하게도 요사스러운 문신인 미츠나리가 아니라 믿음직한 대다이묘인 도쿠가와야 말로 도요토미 가문을 제대로 보필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택한 것입니다. 영화 타짜의 명대사 “늑대새끼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가냐”는 말처럼 신하의 그릇은 주군의 그릇을 따라가는 법입니다.

 이시다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도요토미 가신단은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쿠가와라는 기지는 여전히 의미가 있었기에 이시다는 자신에 편에 설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반도쿠가와에 가장 적극적인 다이묘는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한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겐신 사후의 내분을 수습하고 히데요시에게 순응하며 이전과 비슷한 세력을 유지합니다. 도쿠가와와 단독으로 대적할 체급은 아니었지만,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했기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다음으로 반도쿠가와에 참여한 세력은 주코쿠의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였습니다. 주코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는 할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도쿠가와도 무시 못할 세력가였습니다. 게다가 형제 가문인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예 히데요시의 조카가 양자로 가문을 이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 모리 데루모토를 도쿠가와에 대응하는 서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자 했고, 데루모토는 외교를 담당한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의 조언을 받아 이 직을 수락합니다.

 이시다 입장에서는 히데요시의 양자들은 소위 말해 믿을맨들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우키타 히데이에가 바로 그들입니다. 둘 다 히데요시의 양자지만 이 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조카였습니다.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양자로 들였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내면서 후계구도를 정리하고 주코쿠에 친위세력을 세웠습니다. 한편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 혈연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버지인 우키타 나오이에는 주코쿠의 패자인 모리 모토나리의 등쌀 속에서도 갖은 수를 동원하여 자립한 다이묘입니다.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의 패권전쟁에서 중소 다이묘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는데, 결국 최후를 앞두고 히데요시를 상대로 마지막 승부수를 겁니다. 자신이 사망하면 자신의 미망인을 거두고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였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중용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수많은 노련한 장수들을 두고 젊은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사령관으로 오른 이유가 바로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 양자의 행보는 엇갈리게 됩니다.

 한편 주부 지방에서 나름의 세력을 자랑하던 사나다 마사유키도 서군으로 제안을 받았는데, 양측에 모두 연이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의 사위였던 장남은 동군으로 보내고 자신과 차남은 서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밖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이시다와 가까웠던 소규모 다이묘들도 서군에 참전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의 동군에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뒤를 이은 마에다 토시나가가 참여합니다. 아버지는 도쿠가와의 가장 큰 정적이었지만, 아들은 정작 도쿠가와 편에 붙은 것입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사망하면서 아들들에게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라는 유훈을 남겼지만, 토시이에의 아내는 그가 죽은 후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너희 아버지만 못하니 기어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마에다 가문이 먼저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토시이에 사후, 마에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입니다. 당연히 마에다 가문에서는 우군인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합니다. 결국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아내이자 토시나가의 어머니인 마츠를 인질로 보내고 도쿠가와와 혼인동맹을 하는 것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파는 가장 중요한 우군을 잃게 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칠본창들도 대부분 동군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시기에 도요토미가의 본진인 오사카에 있었기에 강제적으로 서군에 참여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가 규슈에 있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옆 동네 고니시의 영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토호쿠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가 동군에 참여합니다. 모가미의 경우 히데츠구가 숙청되는 과정에서 딸이 죽었기에 원한이 있었고, 다테는 모가미의 외조카였습니다. 이 두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우에스기 카케카츠와의 별도의 전선에서 자신들의 전쟁을 이어갑니다.



 3) 세키가하라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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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2%A4%EA%B0%80%ED%95%98%EB%9D%BC_%EC%A0%84%ED%88%AC#/media/%ED%8C%8C%EC%9D%BC:Sekigaharascreen.jpg
(출처: 위키피디아)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용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회전을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부르지만, 이 회전이 있기 전까지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 역시 뭉뚱그려서 세키가하라 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전자만을 세키가하라 전투라 부르고, 후자의 의미로는 세키가하라 전역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거한 후,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머물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이 시기 이에야스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위협적인 다이묘들을 제압합니다. 가장 먼저 마에다 가문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정벌에 나섰고, 앞서 설명했듯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 복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됩니다.

 마에다를 굴복시킨 이에야스는 다음으로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노립니다.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문이 성을 짓고 군비를 증강하는 이유를 해명하라며 교토로 상경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에스기측은 카케카츠의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가 나오에장이라고 불리는 반박문을 발표하며 도발로 대응합니다. 이러한 도발에 분노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를 토벌하기 위해 오사카를 떠나 본거지인 에도로 돌아갑니다. 이 도발장은 실존했던 것인지, 후대의 창작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무엇이 사실이냐에 따라 우에스기가 이시다와 사전에 교감을 하고 도발을 한 것인지, 오히려 이시다의 거병을 유도하기 위해 도쿠가와가 만든 함정인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시다는 도쿠가와가 에도로 돌아간 것을 알자 서군을 조직해 거병합니다.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역이 개전된 것입니다. 이시다는 최대한 많은 다이묘를 세력에 가담시키기 위해 인질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호소카와 가문의 인질이었던 호소카와 가라샤가 인질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망하며 호소카와 가문이 이탈하며 이시다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기에, 이시다는 동군 측 성을 함락시키며 거점인 오사카성에 입성합니다.

 한편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다테와 모가미에게 맡긴 채, 에도에 머물면서 정세를 살핍니다. 그동안 동군의 주력을 맡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무장들은 서군에 속한 오다 히데노부가 다스리던 기후성을 함락시킵니다. 인근의 기후성은 일본의 양대 가도인 나카센도와 도카이도를 장악할 수 있는 거점이었습니다. 도쿠가와가 본거지인 에도에서 서군의 심장인 오사카로 진격하려면 양대 가도를 반드시 거쳐야 했기에 기후성 공략은 이 전역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후성을 손에 넣은 도쿠가와는 마침내 에도에서 출진합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했고, 후계자인 히데타다에게는 3만 8천의 병력을 맡겨 나카센도를 따라 진군하게 합니다. 그런데 히데타다는 진군 도중에 서군에 속한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공략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후에나 도착한 히데타다를 매우 질책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가주와 후계자가 동시에 전사한 오다 노부나가의 전례를 보고 일부러 히데타다를 대규모 병력과 함께 후방에 배치했다고도 합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전투를 이어온 동군과는 달리 서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에 주둔한 채 출진하지 않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배신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후방에 있는 동군 세력인 타나베성을 공략하는데 병력 15,000명이 묶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쿠가와가 기후성을 장악하고 서군의 코앞까지 도달하자 이시다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것처럼 보였던 전쟁은 단판승부로 바뀝니다.



 4)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가 선택한 전장은 교토와 오사카로 넘어가는 길목인 세키가하라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적을 막지 못한다면, 간사이 지방 전체가 적의 위협에 노출되어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부 결속이 좋지 않은 서군 입장에서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는 것은 더 위험했기에 이시다가 세키가하라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양군은 위와 같이 포진합니다. 양측의 병력 숫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각각 적어도 8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11시 방향의 석전삼성(石田三成)이 이시다 미츠나리, 가운데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시다는 전선에 위치했던 반면 도쿠가와는 전선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9시 방향, 서군의 우현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隆景)가 맡았습니다. 5시 방향에 있는 서군은 모리 히데모토와 킷카와 히로이에입니다.

 포진만 놓고 보면 서군(파란색)이 고지대에서 동군(빨간색)을 포위한 형국이라 유리했습니다. 서군의 본대는 적을 학익진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서군 별동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일본에 교관으로 온 프로이센 장교에게 누군가 이 포진을 보여주자, 서군의 승리라고 주저 없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것은 작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2시간 동안 대치하던 양군은 안개가 걷히자 격돌합니다. 가장 먼저 앞장선 것은 도쿠가와의 돌격대장 이이 나오마사였습니다. 본래 선봉을 맡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역시 부대를 움직였고, 서군은 우키타와 이시다가 이에 응전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교전은 정오까지 이어졌고, 이때까지만 해도 서군은 동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익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후미를 맡은 모리 군도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전투에 참여해 준다면 전세를 확실히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었기에 이시다는 봉화를 올려 이들의 참전을 독려합니다.

 한편 도쿠가와 역시도 더는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병력이 다 모이지 않았음에도 적진으로 출진한 이유는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전황이 교착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철포를 날립니다. 이에 놀란 코바야카와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서군을 배신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코바야카와의 배신을 필두로 모래알 같았던 서군의 다이묘들은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영이 붕괴된 서군은 분전이 무색하게도 무너지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동쪽에 있던 서군 별동대는 동군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가 아군의 진출로를 막은 채 주저앉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이쪽의 총사령관인 모리 히데모토는 자신이 모리 가문의 가주도 아닌지라 킷카와 군을 어찌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에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인다는 핑계로 같이 주저앉습니다. 두 다이묘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모리 가문의 주전론을 이끈 안코쿠지 에케이도 전장에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전투를 관망하다가 오사카로 회군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운명을 건 대결은 배신으로 종결됩니다.



 5) 전후처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은 몰살당합니다. 대부분은 큰 피해를 입고 몰살되었고, 그나마 전력을 유지한 모리 가문은 오사카로 퇴각했다가 도쿠가와에게 항복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비롯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서군 다이묘들 역시 전투의 결과를 듣고 항복합니다.

 서군의 핵심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달아났으나 모두 붙잡힙니다. 이들은 조리돌림을 당하고 처형당합니다. 똑같이 서군의 핵심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처가인 마에다 가문이 구명을 해준 덕분에 목숨은 부지하고 태평양 방면의 외딴섬으로 유배당합니다. 이들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동군 다이묘들에게 분배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멸문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를 대부분 잃고 본래 가신의 땅이었던 최북부 일부만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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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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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가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사진. 본래 코바야카와 가문의 문장은 가운데와 같은 모양이지만, 히데아키 본인은 오른쪽의 낫 모양 가몬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의 세키가하라 풍경도에서는 가운데 가몬만 확인된다. 하지만 보드게임 <세키가하라>를 비롯한 서양 콘텐츠에서는 코바야카와를 오른쪽 문양으로 표시한다.)


 반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전보다 더 높은 석고로 영지를 옮깁니다. 하지만 똑같이 배신으로 공을 세운 킷카와 히로이에는 자신이 약속받은 대로 모리 가문을 지키지 못합니다. 도쿠가와는 주코쿠의 대다이묘이자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하고 그중 일부를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내리고자 했습니다. 히로이에는 이와 같은 조치에 놀라 자신의 몫으로 올 영지를 모리 가문에 남겨줄 것을 탄원합니다. 결국 모리 가문은 이렇게 일부 영지나마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킷카와 히로이에는 배반자로 낙인찍히고 모리 가문 내에서의 입지도 좁아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의 석고는 기존의 250만 석에서 400만 석으로 증가됩니다. 반면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다른 다이묘들이 연합하더라도 도쿠가와에게 대항하기가 어려운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3년이 지난 후, 도쿠가와는 스스로 막부를 개창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를 수도로 삼습니다.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막부를 개창한 후에도 관백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칠본창과 같은 세력은 물론, 그동안 쌓아둔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분상으로도 관백이 정이대장군보다 상위직이기에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을 숙청한 후, 마침내 오사카를 정벌합니다.

 
3. 에도 막부

 에도 막부는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오랜 기간인 26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가마쿠라 막부가 141년, 무로마치 막부가 25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무로마치 막부는 전후로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가 걸쳐있어 실질적으로 일본 전역을 통치한 기간은 7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중앙집권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문화와 풍습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도쿠가와는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사농공상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신분제를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전국시대만 해도 상인이나 농민 출신으로 출세한 무사들이 있었지만, 에도 막부 시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경직된 사회변동성은 에도 막부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쿠가와가 다이묘들의 재정을 소모시키고 견제하고자 만든 제도로는 참근교대도 있습니다. 참근교대는 1년을 주기로 다이묘들이 에도로 상경하여 생활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다이묘들이 홀로 상경하는 것이 아니라 가신단과 병력을 이끌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묘들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화려한 규모로 상경하느냐가 각 다이묘들의 위세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중에는 지나치게 과열되어 막부 차원에서 자제를 명할 정도였습니다. 참근교대로 인해 주기적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했기에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교통과 상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초밥도 에도 시대에 상업이 발전하며 탄생한 일종의 패스트푸드였습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중심지는 완전히 간토로 넘어갑니다. 간토를 중심지로 삼았으나 한계에 봉착한 가마쿠라 막부나 아예 교토로 중심지를 옮긴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로 전봉 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계획적으로 발전시켰고, 자신의 압도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 천하를 얻고 자신의 막부를 개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전국시대 최고의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다가 지은 밥으로 도요토미가 떡을 지었더니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이야기는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평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 이상으로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에필로그

 이번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시리즈는 <세키가하라>가 출시될 즈음에 마지막 편을 올리는 것으로 기획을 했습니다. 처음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결국 예정된 대로 <세키가하라> 출시를 앞두고 마지막 편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획기사는 <세키가하라>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미리 알아보실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하고자 연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비교적 덜 친숙한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많은 TMI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즐겨주셨길 바랍니다.

 보드게임 <세키가하라>에는 게임 작가가 자신의 관점으로 작성한 역사 이야기도 실려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에 주석을 달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드리고자 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주석을 더 달 수 없어 아쉬웠던 지점들이 모여 이번 기획기사를 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키기하라> 기획기사는 이번 편을 끝으로 연재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워게임 입문을 망설이시는 분들을 위한 간단한 게임 공략을 마지막 기사로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다음 게시글은 <세키가하라> 기획기사가 아니라 <세키가하라> 공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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